[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 (2) 지역특성 맞춤 프로그램(하)

◇산청 단성향교~단속사지~남사마을~남명조식유적지(산천재·덕천서원)~구형왕릉·덕양전

구형왕릉은 역사적 상상력을 한 뼘 더 키울 수 있는 장소다.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여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살다가 무덤을 남겼다는 얘기다. 무덤도 예사롭지 않다. 한반도에 유례가 없는 적석총,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구형왕은 여기서 고토회복을 위한 항쟁을 준비했을까, 아니면 그냥 아무 뜻없이 목숨을 부지하기만 했을까.

산청 구형왕릉.

단속사(斷俗寺)는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로 남았다. 남향으로 두 갈래 개울이 흐르는 사이 도도록하게 솟은 자리인데 골이 넓어 온종일 햇살이 비친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두 번째로 실력자가 됐던 최우는 아들 만종을 단속사 주지로 삼았다. 이 때 단속사에는 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만든 관청인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설치돼 있었고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같은 장경판각(藏經板閣)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단속사를 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산청 단속사지동서삼층석탑.

◇양산 통도사~춘추공원~용화사·황산잔도~북정동고분군·양산박물관

문화재만 놓고 보면 통도사는 양산을 압도한다. 양산시 전체 문화재가 219개인데 139개(63.5%)가 통도사에 있다. 하북면 백록리 718-1번지 35번 국도변 국장생석표는 경계를 일러주는데 통도사가 옛적부터 어마어마했음을 일러준다. 고려 1085년 나라 명령으로 통도사 둘레에 세운 12개 가운데 하나란다.

양산은 신라 박제상의 고장이다. 박제상 앞에는 언제나 '만고충신'이라는 말이 붙는다. 눌지왕의 아우를 왜왕 손에서 구하고 붙잡힌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 신하는 될 수 없다"고 했다. 왜왕은 그이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 생가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효충사가 있고 춘추공원 장충단(삼조의열단)에는 고려 충신 김원현 조선 충신 조영규와 함께 신라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빗돌이 있다.

◇의령 덕곡서원~정암진 일대~성황리소나무~곽재우·안희제 생가~망우정

의령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의 땅이다. 곽재우는 기강나루에서 임진왜란 육전 최초 승리를 거뒀고 정암진 전투 승리는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았다. 기댈 데 없던 백성들한테 커다란 희망이 된 활약이었다. 역사는 의병장한테 가혹했다.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로 몰려 죽었고 곽재우와 함께 남명 조식 아래서 공부한 정인홍은 합천 의병장의 대표격이었는데 인조반정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재산을 바친 곽재우는 전란이 끝난 뒤에도 재산과 권력을 가까이하지 않은 덕에 망우정에서 가난하기는 했으나 종신(終身)은 할 수 있었다.

의령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나무.
의령 정암진 일대 강물 한가운데 있는 솥바위.

◇진주 청곡사~문산성당~진주역차량정비고~진주교회~진주상무사~옥봉경로당~형평운동기념탑~진주향교~진주성·국립진주박물관

진주는 경남에서 으뜸이었다. 진주향교도 역사가 1000년을 넘었고 천주교·개신교 같은 신식 종교도 문산성당이나 진주교회처럼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청곡사가 한 번도 사그라들지 않고 오랫동안 큰 절간이었던 배경도 진주의 풍성한 물산이라고 봐야 한다. 전통기와집으로 남은 옥봉경로당이나 경남 최초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가장 앞선 축에 드는 진주상무사(지금 상공회의소) 결성도 진주가 교역이 활발했던 때문이고, 백정해방을 위한 형평운동도 진주 산물이 풍요로워 잡을 소가 많았던 때문이 크다고 해야겠다.

진주향교.

◇창녕 관룡사·용선대~옥천사지~신씨고가·영산향교~창녕지석묘~망우정~술정리동삼층석탑

창녕 출신 역사 인물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로는 신돈이 으뜸이다. 절간 종년의 자식으로 연줄이 없었던 신돈을 고려 공민왕은 개혁 추진 파트너로 기용했다. 권문세족이 독차지했던 땅과 노비를 원래대로 돌리려 하자 가진자들의 저항은 극심했고 신돈은 실각과 함께 처형당했다. 권문세족은 신돈이 나고 자란 옥천사를 모조리 파괴했다. 옥천사지에 서면 인간의 탐욕이 어느 정도까지 비정해질 수 있는지 가늠이 된다. 아울러 야트막한 등성이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창녕지석묘는 경남 고인돌을 대표할 만큼 잘 생겼고 덩치도 크다.

◇창원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제포진성·웅천읍성~창동·오동동 근대역사유적

진해 제포진성은 요즘으로 치면 해군 경남본부에 해당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마산 합성동에 있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과 더불어 이 일대가 군사요충이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다. 그래서 지금도 진해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마산 창동·오동동 일대에는 근대역사유적이 있다. 경남 최초 조선인 주식회사였던, 부산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도 냈다는 원동무역 자리, 일제 때 공연이 펼쳐졌고 1950년 보도연맹 관련해 사람들을 모았다가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옛 시민극장,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를 가뒀던 마산형무소 자리…. 70~80년대 잘 나갈 때 사람들 들끓던 가게도 많이 남았다.

◇통영 서포루~통제영~문화동 벅수~삼덕항 일대~당포성지~박경리기념관

통영은 1603년 들어선 삼도수군통제영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군수물품과 생활용품을 생산·조달했던 십이공방은 통영 예술의 뿌리다. 십이공방에 옛적 관청 건물까지 나름 복원하고 본디 있던 세병관까지 아울러 2014년 통제영으로 선보였다. 통제사 권한이 상당했음을 일러주는 주전소 터도 있고 장수기 꽂는 기삽석통과 오방기 꽂는 석인도 발굴돼 나와 있다.

위험한 바다일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들 의지가지로 삼덕항에 돌벅수를 세웠다. 그 앞에서 고기 많이 잡고 탈없이 돌아오게 해달라 빌었다. 삼덕항 옆 당포성도 바다가 없었으면 들어서지 않았을 성곽이다. 왜구가 들끓던 고려 말기에는 최영 장군이 여기서 승전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통영 복원된 통제영.

통영 예술을 대표할 만한 인물 가운데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있다. 박경리기념관과 박경리 묘소는 자리가 아주 좋다. 그이 일생과 작품 세계가 잘 정리돼 있는 기념관에서는 <토지>와 <김 약국의 딸들>에 형상화돼 있는 통영 모습도 볼 수 있다. 묘소로 이어지는 여기저기에는 그이 육필 원고와 시편·산문이 읽기 좋게 놓여 있다.

◇하동 하동읍성~쌍계사~범왕리푸조나무~세이암~조씨고가~최참판댁

고전면 고하리 양경산 꼭대기 하동읍성은 특징이 여럿이다. 읍성으로는 드물게 산마루에 있다. 조선시대 축성 방법이 정해지기 전에 쌓아 옛 모습을 알 수 있다. 외적을 효과적으로 무찌르기 위한 치성과 옹성이 제대로 남아 있다. 산성인데도 해자가 뚜렷하게 파여 있다. 읍성 마루는 전망도 빼어나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하동에는 신라 슈퍼스타 최치원 관련 유적이 많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쓴 몇 남지 않은 금석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외국인이라 빛을 못 보고 신라에서는 신분이 왕족이 아니라 쓸쓸했던 최치원이다. 어쩌면 그런 덕분에 관련 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았는지도 모른다. 범왕리푸조나무는 그이가 꽂았던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고 하고 곁에 있는 세이암은 최치원이 속세에서 마지막으로 귀(耳)를 씻은(洗) 바위(巖)라고 한다. 벼슬을 살고 권력을 누리는 데는 불우했지만 최치원은 그 덕분에 자연을 제대로 즐기고 삶을 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함안 칠원향교~장춘사~무기연당~주리사지사자석탑~함안고분군·박물관

함성중학교 들머리 주리사지사자석탑은 경남에서 보기드문 모양이다.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처럼 사자 네 마리가 몸돌을 떠받치고 있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에 담기는 모습이 색다르다. 말이산고분군은 그 규모만으로도 엄청나고 그 유물까지 더하면 더욱 대단하다. 하지만 함안 학생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함안 무기연당.

함안에서 아름답기로 으뜸은 무기연당이다. 길게 네모난 연못과 굽은 소나무와 누정 두 채가 어우러지는 정원은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주인의 뜻도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하환정(何換亭)은 '(이 멋진 풍경을) 어찌 (벼슬과) 바꾸겠는가' 하는 뜻이고 풍욕루(風浴樓)에는 바람으로 목욕하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연못 돌계단 앞 탁영석(濯纓石)은 "물이 맑으면 갓끈(纓)을 씻고(濯)더러우면 발을 씻겠다"는 얘기고 연못 가운데 석가산은 백세청풍(百世淸風) 하는 양심대(養心臺)다. 더불어 대나무 사립문 하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조그맣고 욕심없는 장춘사도 그럴듯하다.

◇함양 벽송사·서암정사~용유담·와불~남계서원·청계서원~허삼둘가옥~운곡리은행나무~거연정·동호정

벽송사는 선원(禪院)이다. 절간 중심 자리 한가운데에 대웅전이나 비로자나전 같은 법당 대신 벽송선원이 있는 까닭이겠다. 풍경도 멋지고 푸근한데 나무 장승 한 쌍도 나름 유명하다.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서 옹녀와 함양 등구 마천에 자리잡은 변강쇠가 도끼질을 해댔을 그런 장승이다. 곁에 있는 서암정사는 미래 문화재라 할만하다. 80년대부터 바위를 갈고 불상과 글씨와 그림을 새기고 굴법당도 만들었다. 100년이나 200년 뒤 사람들에게는 문화재 취급을 받겠지 싶다.

함양 서암정사 사천왕상.

우리나라에서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서원이 남계서원이다.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뿌리인 셈인데 규모는 작지 않지만 구조가 단순하고 꾸밈이 소박하며 짜임새도 잘 갖췄고 잘 자란 나무들과도 썩 어울린다. 옆에 있는 청계서원은 이보다 작지만 분위기는 처지지 않는다. 이런 남자 중심 양반 고을 함양에 여자가 중심이 되는 옛집이 있다. 허삼둘 가옥이다. ㄱ자로 꺾어지는 안채 한가운데에 부엌이 있고 여기서 보면 안마당이나 행랑채는 물론 사랑채까지 한 눈에 장악된다.

◇합천 영암사지~뇌룡정·용암서원~삼가장터 삼일만세운동기념탑~월광사지삼층석탑~옥전고분군·합천박물관(또는 해인사)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품은 불보종찰로만 알려져 있을 뿐 대가야 건국설화가 서려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모른다. 해인사 국사단 산신령=정견모주가 대가야를 세운 뇌질주일(惱窒朱日)의 어머니다. 대가야의 옛땅은 경북 고령이지만 합천과 고령은 가야산을 공유하기에 이렇게 됐다. 월광사지는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 관련 전설이 있다. 나라가 망한 뒤 월광태자가 여기 거닐었다는 것이다. 물론 월광사지동·서삼층석탑는 아무리 올려잡아야 8세기 신라시대 탑이다. 어쨌든 월광사지 언덕과 들판과 개울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참 대단하다.

합천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조선 시대 경남 대표 선비 남명 조식이 태어난 삼가면 외토마을에는 그이가 제자들 가르쳤던 뇌룡정과 그이 제사를 지내는 용암서원이 있다. 그이는 무엇이 옳은지 아무리 깨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이 사후 20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떨쳐일어난 의병장 대다수가 남명 제자였다. 남명의 이런 정신은 300년 남짓 세월도 건너뛰었다. 1919년 삼가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두 차례 벌어졌는데 3만 명 넘게 참가했다. 전국 최대 규모라 하겠는데 이 또한 남명이 끼친 영향이 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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