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에서 신용불량자까지 채현국의 인생·철학 담아

연세로 치면 현재의 60~70대 이상인 부모세대를 조명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유행이다. 이를테면 영화 <국제시장>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영화들. 미덕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두 영화 모두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기보다는 특정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미화한 혐의가 짙었다. 고단했고 애틋했던 부모세대의 삶에 존중을 바치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그래서 형성된 우리 삶의 기본 가치들이, 나아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진정 존중할 만한 것인지는 몹시 의문이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피플파워의 신간 <풍운아 채현국>은 이런 편향으로부터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인 채현국(79) 씨는 자기 폐쇄적이고 지혜롭지 못하다며 자기세대이자 지금의 노년세대에게 누구보다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다. 물론 일방적 비난만 있지는 않다. 그들 또한 피해자이자 희생양. "저렇게밖에 갈 길이 없"었다는 걸 그 또한 모르지 않는다.

"우리 살아온 시절 일제 때 잘못 배웠지. 해방되어서 엉망진창일 때 또 잘못 배웠지. 이승만이가 전쟁 치르면서 이승만이가 오만 거짓말한 걸 떼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알고…. 그 다음에 국민교육헌장 그거 외운 패들, 그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걸 깨닫도록 노력 안 한 사람들,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또 그 늙은이 돼. 저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이야. 잘못된 시절에 순전히 잘못된 통치자들에 의해서 잘못된 것만 하나 가득 배워가지고 저렇게 된 건데…."

책은 채현국의 살아온 인생과 삶의 철학, 소신을 담은 인터뷰집이다.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 거부로 살다가,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가두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시대의 어른, 심지어 신용불량자란 이름을 얻게 된 그의 80년 역사가 담겼다. 한때 24개 기업을 경영하며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였던 그가 왜 소득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는지, 어쩌다 리영희·임재경 등 민주화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을 물심양면 돕게 되었는지 생생히 소개된다.

저자인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그에게 '풍운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만큼 거침없이 살아왔고,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녔고,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울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채현국은 그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겨우 비틀거리면서, 어떤 술 취한 놈보다 더 딱한 짓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정말 어떤 놈보다 덜 떨어지고 모자란 놈이 그래도 여러분 덕에 살다보니 요만큼 사는 것만도 신통합니다."

한 개인의 인생과 철학을 있는 그대로 담은 <풍운아 채현국>인지라, 채현국이란 인간과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이 없다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힐 책은 솔직히 아니다. 다만 이것 하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할 수 있다는 것. 자신과 현실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는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분명 아니다. 더구나 생존논리에 치여, 자신과 가족 외에는 돌아볼 틈이 없었던 부모세대로서 말이다.

"젊은 세대들 역시 (부모세대의 삶을) 잘 보지 않으면 동정도 할 수 없어. 저자들도 우리의 일원이야. 저렇게 잘못된 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저 사람을 봐야지. 이미 젊을 때 잘못한 거야. 지금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야."

176쪽, 1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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