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꽃들이 화사한 모습을 뽐내며 앞다투어 피지만 황량한 늦가을에 무서리를 맞으며 피어나는 꽃이 국화다. 그러니까 국화는 온갖 풍상을 겪고도 의연한 자태를 잃지 않는 인고의 대명사요, 고결한 기품을 잃지 않는 선비의 상징이다. 또한 온갖 유혹에도 지조를 지키고 뭇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충절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국화는 대략 5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한다. 국화는 중국에서는 국(菊)이요, 일본에서는 먼저 쿠쿠라 했다가 쿠키로 변해서 지금은 기쿠라 한다. 가을에 핀다해서 추화라 하고 중양절(9월9일)에 국화주를 마신다해서 중양화라 한다. 음양으로 치자면 음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절(女節)·여화(女華)·여경(女莖)·갱생(更生)·음성(陰城)·음위(陰威) 또는 일정(日精)·일화(日華)라 한다.

오행에 있어서 황색국화는 중앙 토에 속한다. 중국을 중화(中華)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황화(皇華)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은 황토의 나라 황하(黃河)인 것이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황제(皇帝)이다. 황제가 입는 옷을 황의(黃衣)라 하고 공식석상에서 입는 예복은 황포(黃袍)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을 상징하는 색은 황색인데 황색은 바로 천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겐 붉은 색을 쓰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국 국화가 모란인 줄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옛날에는 국화였고 지금은 매화로 정하고 있다.

두보의 시에 곧잘 인용되는 감국화(甘菊花)는 식용·약용으로 애용하며 귀하게 여긴다. 때문에 최고의 국화라 하여 진국(眞菊)·가국(家菊)·다국(茶菊)이라고도 부른다.

뭐니뭐니해도 국화재배는 일본이 제일 발달했다. 일본 고대기록에 서기 386년 백제에서 청·황·적·백·흑의 국화를 수입한 것으로 되어있다. 에도중기(1700년대)에는 국화재배 붐이 절정에 달해 지금의 도쿄·교토에 대대적인 국화전시회를 열어 최고의 명예를 얻은 사람을 기쿠다이묘(菊大名)라 칭하고 실질적으로 계급을 올려주었다.

해마다 신궁·사찰 등지에서 국화축제가 열림으로써 외국인에겐 좋은 인상에다 호감을 갖게하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대전 후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이란 책을 내었다. 국화를 그토록 사랑하는 평화민족이 어째서 칼을 신주 모시듯 숭상하는가에 관한 연구였다. 베네딕트도 결국 일본인의 이중성을 간파하게 된다. 지금의 일본기인 일장기(日章旗) 이전에는 국화를 그린 것이었다. 이 깃발은 일본 관군이 사용하였는데 그 후 국화문장을 왕실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신라때 기록도 있지만, 고려 충숙왕 때 국화가 대량 도입됐다고 전한다. 세종 때 황·백·홍·자 등 도합 154개 품종을 기르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당나라 70개 품종보다 갑절이나 많은 품종을 재배했던 것이다. 선조들은 국화에 대한 정신적 기준의 가치로 삼아 선호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매·난·국·죽의 반열에 올려 시를 읊고 글로써 칭송하기도 하였다.

가물가물 꺼져가는 고려사직을 온몸으로 지키려고 나섰지만 불시에 목숨을 앗긴 대충신 정몽주도 ‘국화를 사랑한다’ 하였고, 사육신인 성삼문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賞問食菊者 壽可五百年

所愛或異此 不競衆芳先

일찍이 들으니 국화를 먹으면 / 500년을 산다던가 / 내가 사랑함은 그게 아니고 / 뭇꽃을 앞서려고 다투지 아니함이라.

무릇 입신영달과 치부만을 노리는 오늘날 공직자를 비롯한 토호세력들에겐 폐부를 찌르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국화는 그 특유의 진한 향기를 뿜으며 의연한 자태를 잃지 않는 은자의 꽃이요, 오상고절의 대명사다. 지조의 절의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민주성지인 이지역 정서에 부합되는 꽃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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