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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잃은 아픔, 딸기 재배로 달래는 사람들

[남강 오백리] (15) 산청군 새들교~진주시 대평리

권영란 기자 kyr65@idomin.com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배양마을 앞에서 묵곡교를 건너지 않고 옛 20번 도로를 잠시 타고 가면 웅석봉에 산채를 둔 도적 임걸룡이 지키던 살고개이다. 이곳에서 경호강 변으로 난 길로 방향을 틀어 산길을 넘어가면 경호강 넓은 풍광과 함께 강 건너 묵곡마을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금세 새들교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청계골짜기에서 남사예담촌을 가로질러온 남사천이 경호강으로 합수한다.

여기서부터 경호강 강폭은 얼추 500m 이상으로 보인다. 강 건너 묵곡마을이 아스라하다. 마을 옆으로 이어진 울창한 대숲이 시퍼렇다. 1049번 도로는 진양호로 이어지는 경호강 물길과 나란히 뻗어있다. 이 도로는 진양호 서북쪽에서 진주시와 산청군 경계를 이루는 단성면 소남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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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대소헌 조종도는 누구인가?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2000)에서 저자 손성모 씨는 '소남진 강 가운데 탕건처럼 생긴 바위가 서 있고 그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강 언덕에 송객정(送客亭) 유허비가 서있다'라고 말했다.

길 떠나는 손님을 배웅하기 위한 정자라니, 어디일까 두리번거리며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강 언덕 솔숲에서 눈길이 멈춘다. '송객정 유허비'라고 새긴 비는 1983년에 세웠다. 비문을 살펴보면 원래 '송객정'은 단성현감으로 있던 하구정 조응경이 지은 정자이다.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에 있는 대소헌 조종도의 종가.

하구정은 조선 성종 때 인물로, 생육신 정절공으로 알려진 어계 조려의 후손이다. 그가 소남마을에서 단성현으로 가는 객을 배웅했는지 단성현에서 진주로 가는 객을 이곳까지 배웅한 건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지리적으로도 이곳이 단성현과 진주목을 드나드는 길목이었다는 점이다. 강을 내려다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담을 나누기에 맞춤한 자리이다. 하지만 강 가운데 '탕건 같은 바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소남리 경호강변에 있는 송객정 유허비.

"소남리가 본디 함안 조씨들이 마이 사는데, 여기 소남마을에 아직 30여 가구가 있습니더. 생육신 정절공으로 알려진 어계 조려의 후손 조응경이 단성현감으로 있었고 그 후손인 대사헌 조종도도 단성현감으로 있었다예. 마을 가운데 종갓집이 있는데 후손들은 다 서울 살고 집만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돼 있습니더."

소남마을 경로당 근처에서 만난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소남정류소에 닿기 전 지나쳐왔던 비각이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선생 신도비'임을 알았다. 안내판에는 신도비는 왕이나 정삼품 이상 고관의 무덤 동남쪽에 남향으로 세우는데 왕명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대소헌 조종도는 어떤 인물일까.

대소헌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1592년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망우당 곽재우와 더불어 싸웠다. "문무를 겸비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임을 주창한 그의 창의문은 관직 여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을 의병으로 참여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단성현감으로 있을 때는 관곡은 물론 사재까지 털어 빈민구휼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소헌은 황석산성에서 순절했다. 함양군수를 거쳐 사직을 한 직후였는데 새 군수가 오기 전에 정유재란 패잔병들이 함양으로 밀어닥쳤다. 대소헌은 안의현감 곽준과 함께 나서서 황석산성에서 싸우다가 순절했고, 부인 전의 이 씨 또한 대소헌의 뒤를 이어 자결했다고 한다.

경호강 물길을 따라 소남진에 닿기 전에는 대소헌 조종도의 행적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었다. 안내판은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는지 비각에는 잡초가 우거져 황량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도로에서 20m도 채 되지 않는데 따로 진입로가 없어 텃밭 고랑을 밟고 들어서야 한다.

소남마을에는 대소헌의 후손들이 있고 종갓집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을 갖춘 사대부 가옥을 갖추고 있어 문화재자료 165호로 지정돼 있다. 툇마루 묵은 먼지들을 보니 한동안 사람 손길이 없었던 듯하다. 대소헌 조종도의 선비됨과 그 행적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선지 신도비나 종갓집 등 관리가 소홀한 점이 아쉽다. 신도비는 소남진이 있는 경호강 변을 향해 서있다.

소남진(召南津) 이야기

산청군 생초면 강정 두물머리에서 엄천강과 합수하면서 시작된 산청 경호강 물줄기는 생초면, 오부면, 금서면, 산청읍, 신안면, 단성면을 거쳐 이곳 소남진에 닿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남진은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의 하류'로 밝혀두고 있다.

남쪽으로 흐르던 물길이 서쪽으로 크게 휘돌아간다. 그 자리에 소남진이 있고 강 건너편은 단성면 묵곡리에서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로 이어지고 있다. 물길은 강폭을 500m가 넘게 넓혀놓았다.

옛 소남나루터는 조선시대까지 진(津)이라 불릴 만큼 주요 요충지에다 산청에서 수로를 이용해 진주, 남해안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규모도 상당했다. 소남리와 강 건너 대평리를 잇던 뱃길에는 이제 대관교가 있다. 대관교는 하류에 있는 남강댐 보강공사가 끝나던 시기인 2000년에 놓였다.

옛 소남나루터. 현재는 소남리와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를 잇는 대관교가 놓여 있다.

"저 다리가 생기고는 세사 편해졌다 아이가."

소남정류소에서 만난 월촌띠기와 언양띠기 아지매는 시집온 지 50년이 되는데 다리 없이 배 타고 다닌 게 30년이 넘는다고 말했다.

소남마을 유일한 가게이자 진주, 산청 등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소남정류소.

"옛날에는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게 장 보러 가는 거 아이가. 단성장이 제일로 컸고 그 다음이 대평장인거라. 덕산사람들도 여기 나루에서 배 타고 대평장에 갔다 아이가. 그 사람들 보고 우리는 지리산 밑에서 왔다꼬 산중사람이라 캤는데 나무를 잔뜩 해가꼬 와서는 대평무시로 바깠갔제. 대평장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평 종대거리 옆에 있었구만."

월촌띠기는 노를 젓는 배가 아니라 줄배이던 시절에는 사공이 부재중일 때 여럿이서 줄을 당겨 건너갔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마음은 바쁘고 사공을 기다릴 새가 없으니 더러 그렇게 강을 건넜다.

"여기 쏘가 엄청 깊어서 물이 시퍼래. 바느실고개 앞만 못하지만. 장날이나 무 뽑는 철이 되면 배 안에 나락, 나뭇짐, 사람들 북새통인기라. 뱃삯은 1년에 딱 2번 줬제. 뱃사공이 보리 때, 나락 때가 되면 구루마를 끌고 집집마다 다녔제. 그러면 됫박에다 다들 형편 되는 만큼 주는 거제."

월촌띠기 아지매는 대평교가 생기기 전까지 소남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있던 이가 이곳 소남마을 조대석(82) 아재라고 했다.

"근데 지금은 없을끼라예. 병원에서 아직 안돌아왔어예. 있다해도 몸이 마이 안 좋아 말을 주고받는 기 안될끼고."

대평리 한들이야기

소남역이 있었다는 관정리와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를 잇던 나루터에는 대관교가 놓여 있다. 물길은 이제 남강댐 건설 때 만든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인공호수 '진양호' 초입에 닿았다. 1970년 남강 본류인 경호강과 지리산 남동부를 타고 흘러온 덕천강을 가둬 진양호를 만들면서 이곳 대평면 일대 지형은 완전히 바뀌었다. 진양호는 다음 회에 톺아보기로 하고 먼저 물길 흐름대로 대평리 일대를 톺아본다.

대평리는 1970년 6월의 남강댐 건설과 1998년 10월의 남강댐 2차 보강공사로 옛 터전은 대부분이 수몰됐다. 현재 대평리는 새로이 조성된 이주단지 마을이다. 대평리 안으로 들어서면 구획정리가 잘 된 도로 변에 간간이 빗돌을 세워놓았다. 어은마을, 옥방마을, 대평마을…. 수몰되기 전에는 고개나 들을 사이에 두고 흩어져 있던 마을들이 이주단지 안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들어차 있다. 옛 자료들 속의 어은·옥방 등 마을이며 새령이들은 찾을 수가 없다. 소남들과 함께 넓고 풍요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대평 한들은 대부분이 물속에 들어있다.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이주단지 마을. 진양호가 들어서면서 한들 또는 벗들은 수몰되고 새 농경지에는 딸기하우스가 꽉 들어찼다.

"대평 무시 카모는 임금님께 진상할 만큼 좋은 기라 안캤나. 예전에사 내 어릴 때만해도 11월 초 무시 수확기가 되모는 들판 끝까지 시퍼렇고 골짜기 안에 트럭이 어떻게나 마이 들락거리던지. 집집마다 흙먼지가 뽀얗제. 상인들이 마이 드나들고 하니 주막이며 제법 가게들도 많았고…. 옛날부터 돈이 되는 기 있으니 살기는 잘 살았제. 동네 개들이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라 했다 아이가."

대평마을 어귀 망향정과 망향비가 있다. 실향민의 애환을 담은 곳이다. 망향비 앞에서 만난 정만근(75) 아재는 대평무 또는 벗들무는 무종자로 상품화될 만큼 알아주는 것이었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대평 한들이 옛날보다는 못하지만 몇 년 전부터 대평리 서남쪽으로 들판이 새로이 조성되어 지금은 주민들이 하우스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어귀에 있는 망향비와 망향정.

"새 농경지에다 특화단지를 맹글어 딸기를 재배하는데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으로 다 보내고 있지예. 매년 7억 원 정도 수출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성공적인 거지예."

수몰 이후 이곳 대평리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이주 초기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들에 무를 계속 심었지만 점차 하우스가 늘어나고 지금 대평리는 딸기특화마을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평리는 진양호 상류 지역으로서 낙동강 수계 수변 구역, 상수도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이곳 옥방지역은 댐 수몰 이전부터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다. 지석묘에서 돌칼, 돌활촉 등이 발굴되고 우리나라 최초 농경사회를 알 수 있는 밭 형태가 그대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제약이 따랐고 이곳 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의 터전에서 마음껏 경작하기 힘든 고충도 겪어야 했다.

딸기하우스가 빽빽이 들어찬 들판으로 가려니 한 귀퉁이 텃밭에 마늘 양파가 이랑을 따라 줄지어있다. 겨울 추위를 온 몸으로 버티는지 아직 여린 대가 누런빛이다. 대평들 서쪽을 휘돌아 진양호로 흘러든 물길은 며칠 동안 얼었다가 동지를 앞두고 슬쩍 풀리고 있었다. 대평교 건너 옛 상촌나루터 근처 물빛이 시퍼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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