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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문화적인 세상읽기]집밥 신드롬

고동우 기자 kdwoo@idomin.com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음식 또는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맛집·요리·식문화를 다루지 않는 언론사·방송사가 없는 듯하고, TV 예능 프로그램도 온통 '먹방' 천지다. 그 중심에 tvN <삼시세끼>로 대표되는 '집밥'이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추억의 밥상. 식당에서 흔히 먹게 되는 공장산 식품이나 화학첨가물 범벅이 아닌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밥·반찬, 국·찌개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말대로 집밥 신드롬은 대부분 집 바깥에서 밥을 사 먹어야 하는 매식의 시대, 정작 집에는 집밥이 존재할 수 없는 근원적 결핍이 낳은 산물이다. 황교익은 "농업사회에서는 다들 집에서 음식을 해 먹었다.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밖에서 먹는 음식이 점점 늘어났다"면서 "최근 집밥 마케팅은 이름이라도 집밥으로 지어 그 애달픈 상황을 비틀어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강한 음식을 찾는 식문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겠으나, 현재 각종 매체가 주도하는 집밥 담론은 본의든 아니든 그 수혜자와 피해자를 극명하게 가를 가능성이 높다. 가장 신 난 건 역시 자본이다. 대기업들은 포장을 뜯어 데우기만 하면 되는 집밥 콘셉트의 인스턴트 제품(간편 가정식)을 출시하거나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다. 크고 작은 레스토랑들도 형용모순을 무릅쓰고 집밥을 먹으러 오라고 유혹한다. 한때 유행했던 '착한' '웰빙' '자연' 등의 수사는 빠르게 집밥으로 대체되는 분위기다.

가수 김범수의 신곡 '집밥' 뮤직비디오 한 장면. 김범수는 방송 촬영 도중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집밥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캡처

괴로워지는 사람은 이 땅의 어머니 그리고 여성들이다. 집밥은 곧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남자 배우들이 고생 고생해 식사를 차리는 <삼시세끼>를 떠올리겠지만 그들 또한 자기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고 도움을 받는다. 노골적인 공식화도 있다. 19일 방영한 <삼시세끼> 마지막회를 수놓은 자막이다. "밥은 해주는 사람보다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더 고맙다는 것.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가수 김범수의 신곡 '집밥'에서도 여성(어머니)은 남성 또는 자식에게 밥을 갖다 바쳐야만 하는 자리다. "엄마? 집밥 먹고 싶어서 전화했지." "알았어. 얼마든지 해줄게."

평생 밥을 지어온 고령의 어머니 세대에겐 뭉클한 현상일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들이다. 해고·구조조정·노후불안이 일상화되고 교육비·생활비가 폭등하는 현실에서 여성의 노동 참여는 이제 대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40·50대(가구주 연령) 부부 두 쌍 중 한 쌍이 맞벌이에 나서고 있다. 30대도 40.6%에 이른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임을 인정한다면 집밥의 부담은 과연 누구에게 집중될 확률이 높을까. 바깥에 나가 일도 하고 남편·자식 끼니도 챙겨야 하고 업무 능력에 요리 실력까지 갖춰야 하고, 이중삼중의 고통이 여성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집밥이 있는 삶, 대환영이다. 하지만 '노동'의 관점이 빠진 집밥 운운은 다 환상이고 사기고 심지어 폭력이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퇴근해 먹을 만한 밥상을 차린다는 건 웬만한 솜씨와 열정 갖곤 불가능한 일이다. 애꿎은 피해자 양산하지 않으려면 언론과 방송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거대 식품기업들의 '가짜' 집밥 홍보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야근을 강요하는 기업문화, 확산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차별, 정부와 재계의 노동조건 개악 시도에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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