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준비하며 옷차림에 맞는 방한용품을 찾다가 옷장에 얌전히 걸린 검정색 스카프를 발견한다. 그 위로 겹치는 얼굴. 스카프 한 장 따뜻한 선물로 남기고 이젠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먼 길로 가신 박정녀 씨. 갑자기 목젖이 뻐근해져 온다.

김해 '소리작은도서관'과 인연을 맺고 시각 장애인들과 독서·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책 읽기 좋아했던 내게 주어진 운명의 힘과 감동을 느꼈다. 처음 수업을 하게 되었을 때 설렘과 두려움이 묘하게 섞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각 장애인 대상 수업.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장애일지, 혹 내가 편견으로 이분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이런 것이 온통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나의 생각은 첫 수업 시간에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활자로 된 책을 소리 내어 읽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분들은 밝고 활기찼다. 좋은 책을 읽어 드린 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자신의 생각을 시나 수필로 써보는 수업은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누구나 밖에서 피상적으로 보는 것으로 타인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 때로는 하나의 결핍을 가진 이들이 감수성과 마음의 깊이는 훨씬 풍요할 수 있다는 것 등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우고 느꼈다.

내가 마음 깊이 그 분들과 하나가 되어 많이 웃게 될 무렵 1년의 계획된 강의가 끝나고 종강식을 했다. 그동안 모아둔 작품으로 낭송집을 내고 색지에 프린트해서 벽에 거니 그럴듯한 전시장이 되었다.

종강식이 끝날 무렵 수강했던 박정녀 씨가 포장지에 싸인 뭔가를 건네주셨다. 험한 세상 살아와 이제는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자기 같은 사람이 이렇게 문학을 배우고 시를 쓴다는 것이 꿈만 같다며 소녀처럼 기뻐하셨던 그 분. 그 분이 주신 것은 스카프였다.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서 딸집에서 얹혀 사는 가난한 처지, 한 장의 스카프는 얼마나 힘들게 산 것이었을까. 그 생각 앞에 나는 여지없이 무너져서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 달 뒤에 다시 만나 함께 경주로 문학 기행을 하기로 약속했던 박정녀 씨는, 그러나 한 달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지병이 악화되어 서둘러 떠나고 말았다. 장례마저 끝난 뒤 소식을 듣고 망연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다짐하는 일뿐이었다.

로마의 개선장군들은 승리의 행진을 할 때 전쟁에 패해서 포로가 된 이들에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란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뒤따르게 했다 한다. 삶의 순간에 불쑥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죽음은 어쨌든 피하고 싶지, 빛나는 승리의 순간에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 터이다. 하지만 절정에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마지막을 기억했고, 성취의 자만과 지나친 도취를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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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한 장의 스카프가 '메멘토 모리'를 말한다. 돈과 명예, 집착, 흘러가는 것들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주고 기꺼이 노예가 되어 굴복하는 일상의 삶에 경종을 울리는 소중한 따뜻함 앞에서 언젠가 찾아올 마지막을 기억한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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