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경실련 2014 청소년 역사 문화탐방 (2) 예로부터 해양 방위의 요충 '거제 일대 바다'

거제경제정의실천연합의 제2기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11월 15~16일)은 임진왜란 유적을 대상으로 삼았다. 첫 번째 나들이 주제인 거제에 (산)성이 많은 까닭과 임진왜란 당시 중요 해전이 거제 일대 바다에서 벌어졌던 까닭은 다르지 않다. 거제가 우리나라 해상 방위에서 으뜸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욱더 뭍에서 떨어진 바깥바다는 조금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도 위험했기에 뭍(통영·고성)과 섬(거제) 사이 잔잔한 바다를 찾아다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제 바닷가 일대에 (산)성을 쌓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제 앞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거제 일대 바다에서는 옥포해전(조선 수군 최초 승리), 한산대첩(전쟁의 판도를 바꾼 해전), 칠천량해전(조선 수군 유일 대패) 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명보다는 직접 체험

15일 아침 10시 거제공공청사 회의실에는 앞서 제1기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제1기 탐방에 참여했던 아이들도 많았고 새로 참가한 아이도 적지 않았다. 전체 진행은 제1기와 마찬가지로 했다. 참여 학생들이 자율성과 능동성이 발현되도록 하면서 설명은 최소한으로 하고 몸소 찾거나 만져보도록 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서는 전시관을 미션 수행식으로 돌아봤다. 전시 유물과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아이들은 설명을 지루해하고 못 견뎌한다. 내용이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더하다.

통제영에서 미션 수행을 위해 안내문을 살펴보는 아이들. /해딴에

5월 7일 조선 수군은 옥포만에서 노략질하던 왜군을 포위하고 함포를 쏴서 26척을 깨뜨렸으며 탈출한 왜선은 얼마 되지 않았고 배를 못 탄 왜군은 뭍으로 달아났다. 이순신 전승·불패신화는 옥포에서 시작된다. 거제 사람들은 옥포해전을 '대첩'이라 이르면서 크게 기려왔다. 1996년 들어선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관은 판옥선 모양이고 옥포루에서는 옥포만이 한 눈에 든다.

미션을 마친 아이들 몇몇이 말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10분만 해도 다 둘러보고 남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한 시간 가까이 둘러봤어도 지루한 줄 모르겠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백 번 들어봐야 한 번 보는만 못하다. 또 백 번 들여다봐도 한 번 만져보느니만 못하다. 어른들이 아이들 머리에 억지로 새겨넣어봐야 오래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몸과 마음에 새겨야지 오래 남는 법이다.

◇이순신 장군과 통제영

이어서 칠천량해전공원으로 옮겨갔다. 제2대 통제사 원균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참패했다. 본인은 물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숨졌고 남은 것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한산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면서 챙긴 배 12척이 전부였다. 조선 해상 방어선도 경상도 거제 일대에서 남해가 끝나고 서해가 시작되는 전라도 서쪽 끝으로 밀려났다.

해질 무렵 아이들이 조선 수군 유일 패전의 현장이기도 한 칠천량해전공원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딴에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은 선조 임금의 무리한 명령에서 처참한 패배까지 당시 전투를 재구성해 놓고 있다. 임금·고관대작·장군이 아니라 일반 수군이나 백성 관점에서 다룬 동영상 애니메이션도 보여준다. 임금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투에 동원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괴로움이 담겨 있다. 칠천량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이루려 했던 대륙 침략을 아직도 노리고 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 강점을 지금 일본 정부가 반성하지 않는 까닭이다. 일본의 그런 의도를 제대로 꿰뚫어읽고 대응하지 못하면 칠천량의 엄청난 패배가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겨울에 들어선 탓에 두 군데 둘러보고 나니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저녁을 먹고 통영청소년수련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이들의 이튿날 첫 일정은 복원된 통제영 탐방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통영에 있는 통제영이 이순신과 관련이 깊은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지금 자리에 들어선 때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603년이다. 임진왜란 터진 당시에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조차 없었다. 경상·전라·충청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 수군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삼도수군통제사와 통제영은 난리 이듬해 들어서야 생겨났다. 통제영이라면 죄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해 왔던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다.

통제영 세병관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지난해만 해도 세병관 건물 하나만 있었으나 통제영은 올 3월 복원된 모습을 선보였다. 여러 가지 군수 물자와 생활용폼을 만들어내던 십이공방도 나름 재현했고 통제사가 묵던 내아나 업무를 보던 경무당 같은 건물도 새로 들이세웠다. 장군기를 꽂았던 기삽(旗揷)석통과 청황적백흑 오방기를 들었던 돌인형 석인도 발굴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끌만한 존재는 주전소 자리다. 요즘으로 치면 화폐를 만드는 공장=조폐창에 해당될 텐데, 옛적 통제사한테 엽전을 생산할 권한이 주어져 있었음을 일러주는 유적이다. 이렇게 주전소 터가 발굴된 데는 우리나라에서 통제영 한 군데뿐이라 한다.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어른들 설명 없이 미션 수행을 통해 스스로 본인들 힘으로 찾아낸다. 주어진 문제 해답을 자기 힘으로 찾겠다는 의지가 굳센 몇몇은 거의 뜀박질 수준으로 돌아다닌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역시 이렇게 바삐 움직인 아이들이 더 많이 맞혔고 문화상품권은 그 친구들 차지가 됐다.

세병관 대청마루에 올라 미션 문제 풀이를 한 다음에는 견내량을 한 번 내려다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뭍에서는 전쟁 당시 성곽이나 건물이 자리를 지키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다. 배든 사람이든 무기든 바다는 모두 삼키거나 아니면 처음 출발했던 포구로 돌려보낸다. 예나 이제나 바닷물은 마냥 조류를 따라 흐르고 흐를 뿐이다. 통영과 거제 사이 좁은 바다 견내량도 마찬가지다.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대첩을 치른 바다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유물·유적은 하나도 없다. 마지막으로 통영타워에 올라 멀리 한산도 앞바다까지 견내량 일대를 눈에 담고는 거제로 돌아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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