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핵발전소에 관한 '엄청난' 뉴스가 하루가 멀다 쏟아지는데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정치권조차 별 목소리가 없다. 지난달 11일 부산 고리원전 4호기 핵연료 저장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난 지 1시간이나 넘도록 아무런 인지도 조치도 없었던, 자칫 대형 참사로 확산될 뻔한 사고였다. 3일에는 미국 등 세계 각국이 심각한 안전 결함으로 오래전 사용을 중단한 핵발전 자재가 아직도 국내에서 쓰이고 있다는 그린피스의 폭로가 이어졌다.

왜 이런 일들은 유명인 열애 소식만큼도 관심을 못 끄는 것일까. 몇몇 운 나쁜 사람도 아니고, 다수 시민, 나라 전체가 결딴날 수 있는 사안인데 말이다. 여러 이유를 떠올릴 수 있겠다. 나와는 상관없는 저 멀리 촌구석 문제니까. 잘못(?) 건드렸다간 전기 소비를 줄여야 하는 등 불편을 겪을 수 있으니까. 정치권과 언론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 안하니까. 정부의 핵 통제 능력을 어쨌든 믿어볼 수밖에 없으니까 등등.

다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지만 왠지 허전하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인식체계 밑바닥에 뿌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서다. 이를테면 횡행하는 자기계발 담론이 부추기는 그것.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슬로베니아의 사회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동명의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삶에 대한 책임, 즉 사회적 성공부터 직업, 건강, 사랑, 양육, 스트레스 모든 것이 자기 자신한테 달렸다는 생각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달 20일 고리원전 주변 지역에서 '방사능방재 훈련'이 열렸다. 울산 울주군 남창역에서 방사성물질 누출 대피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들. /연합뉴스

핵발전과 방사능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종 암 발병 등 인체에 유해하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라는 재앙적 사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했지만 나 하나만 잘하면, 잘 대비하면 별 탈 없을 거라는 믿음을 대부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수입 식품에서 방사능 오염 물질이 검출돼도 각자 소비만 줄일 뿐, 노후 원전 폐쇄, 원전 추가 건설 등의 이슈에 무관심한 걸 보면 더더욱 확신이 생긴다.

또 다른 가설은 좀 참담한 것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인데 그깟 핵 공포가 무슨 대수냐는 정서가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4일 자 <한겨레> 칼럼에서 비정규직을 예로 들어 노동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왜 악화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생활 조건이 열악하니 먹는 것, 주거, 휴식, 인간관계 뭐 하나 평온할 리가 없다. 고용 불안정과 차별, 불공정·부정의의 일상화는 분노와 무력감, 낮은 자존감 등 정신적 스트레스의 근원이 된다. 비정규직의 사고 위험률이 정규직의 6배 이상이라는 조사도 있다. 그렇다. 원전 사고? 그래봐야 지금보다 나빠질 게 있겠어?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 두 가지 가설, 즉 각자도생과 자포자기의 곡예를 한층 더 조장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의료 민영화·영리화와 정규직 과보호론을 앞세운 노동조건 개악 시도가 그것이다. 이는 노동자·서민의 고통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가 우리 모두에게 던진 과제인 보다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된다는 점에서도 거부해야 마땅하다. 기억해 보자. 공공성 파괴, 규제 완화, 불안정 노동, 탐욕의 무한 추구가 결국 세월호라는 비극을 낳았다. 폭주를 멈춰 세우지 못하면 어느 곳에서든 터진다. 다음 차례는 진도 팽목항이 아니라 부산, 경주, 울진, 영광 혹은 당신 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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