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80) 통영별로 46회차

지난주는 11월과 12월이 어떻게 다른지 실감할 수 있는 나날이었습니다. 소설과 대설 사이여서 그런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는데 잘들 지내셨는지요.

오늘은 사천시 경계 소곡리에서 길을 잡아 고성군 상리면을 거쳐 고성읍으로 이르는 길을 걷겠습니다. 예전에는 통영이 고성군에 속하기도 했으니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천·고성의 지경에서 = 오늘 걸을 길은 사천 땅 소곡리에서 고성군 상리면을 지나는 구간입니다. 지난 번에 마감한 소곡리는 금곡(金谷)이라 쓰고 쇠실이라 읽기도 합니다. 쇠실이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적은 것이려니 헤아려져 <한국지명총람>9(경남편 Ⅱ)를 뒤져보니, 쇠를 많이 캐냈으므로 그리 불렀다고 채록해 두었습니다. 지난 번에 살핀 대로 이곳 소곡리에서 청동기시대 무덤이 발굴되기도 하였지만, 지명으로 보아 쇠 관련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높은지라 언젠가 한 번 뒤져보러 와야겠습니다.

고성군 상리면과 경계를 이루는 소곡리의 동쪽 끝 마을은 이름이 객방(客坊)이라 옛길 관련 시설이 있음직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마을 북쪽으로 사천시 금곡면 죽곡리와 오가는 객숙치(客宿峙)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개의 이름이 그러한 것은 나그네가 묵던 고갯마루의 주막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며, 객방 북쪽 골짜기에는 금골이라는 광산이 있어 소곡리 일원에서 제철유적을 찾기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사천을 지나 고성 땅으로 들어서는 옛길도 이처럼 아스팔트 국도가 덮어써서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고성 땅에 들다 = 객방 남쪽에서 큰냇고랑(사천천)으로 흘러드는 작은냇고랑(고봉천)을 건너 고성 땅 상리면 고봉리에 듭니다. 통영별로 옛길은 지나온 여정과 크게 다름없이 3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지만, 위험 요인을 없애고자 스스로 차도를 버리고 사천천 냇가 둑길을 찾아 내려섭니다.

혼자 걸으며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어찌 이리 큰 하늘이냐 나는 달랑 혼자인데'라고 짧게 읊은 고은 시인의 시가 떠올라 일본 고유의 짧은 시 하이쿠처럼 짧은 그 시를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걷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좁은 산골에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혼자여서 그렇겠지요. 예전 통제영이 속했던 고성 땅에 들어 그런지 생각은 우보천리(牛步千里)에 미칩니다. 소걸음으로 통제영을 출발한 여정이 서울을 돌아 2000리 길 마무리 즈음에 이르고 보니 길에서 보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역시 혼자 걷는 걸음은 많은 생각들을 길러내고 그것들을 걸러낼 수 있어 좋습니다.

◇둑길을 걷다 = 차도에서 냇가로 내려 선 고봉리 정거장땀 마을을 <조선오만분일도> 거제도15호 삼천리에는 슬촌(瑟村)이라 적었습니다. 내 건너 마을이 신촌리(新村里)이니 사천천의 동쪽 마을이라 동쪽을 이르는 '살' '새'의 소리를 빌려 슬이라 적고 뜻을 빌려 신이라 적어 슬촌 신촌이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원래 이름인 슬촌은 지워지고 신촌리가 일대를 대표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촌리 하촌에서 텃골로 이르는 양쪽으로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 두 산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동쪽은 오두산(烏頭山·422.6m)이고 서쪽은 장군당(將軍堂·378.8m)입니다. 길가에 있는 오두산의 오는 까마귀이고, 이는 달리 검다는 뜻도 있으므로 오는 지모신(地母神)을 이르는 우리말 '감' '가마'를 훈차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던 장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오두산의 까마귀가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이라 믿으니 이런 추정을 해 볼 수 있는 거지요. 냇가 둑길이 오두산 남서쪽 기스락으로 바짝 붙어 산을 안돌이하듯 동쪽으로 크게 방향을 꺾어들면 전통 취락의 전형적 입지 양식인 등에 산 지고 가슴에 물 품으며 남쪽으로 햇살 안은 오산리입니다.

◇척번정리 = 오산리에서 내를 건너는 즈음은 상동천과 동산천이 만나 사천천이 되는 합수 지점입니다. 사천천의 옛 이름은 사수(泗水)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산천에 "사수는 물 근원이 고성 무량산(無量山)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원래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를 흐르는 강으로 그 이름에서 보듯 큰 물 넷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걷는 길가로 흐르는 사수는 그렇지 않으니 공자를 흠모하여 빌려 쓴 이름이라 여겨집니다. 가까운 곳에 무이산(武夷山)까지 자리하고 있으니 심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어쨌든 두 하천이 합류하는 이런 곳은 이질적 환경이 서로 만나 생태적소를 이루기에 일찍부터 인간에게 삶터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산 자취가 곳곳에 있습니다. 상리면소재지 척번정리에 있는 지석묘군이 그 증거이며, 같은 상동천 유역의 팔송정 지석묘군도 그런 사례입니다.

척번정리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는 옛길을 따라가니 농익은 술냄새를 풍기는 양조장을 지나 상리면사무소 앞에서 동남쪽으로 꺾습니다. 파출소를 지나 보건소가 있는 즈음이 척번정리의 으뜸마을인 옛 척정滌亭입니다. 척정의 자취는 오래된 느티나무를 통해 어림할 수 있을 뿐, 지금은 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고, 대가면 우산리에 있던 고성농요보존회가 옮겨 와 있습니다.

고성군 척번정리 척정마을의 느티나무 정자. /최헌섭

고성농요(중요무형문화재 제84-1호)는 하지 무렵 시작되는 농사 소리가 주축을 이루는 노동요입니다. 경상도에서는 모를 찌고 심을 때 부르는 노래를 정자·정지·덩지(등지) 등으로 부르는데 고성에서는 등지라 합니다. 조선 후기에 경상감사가 고성 들녘을 지나다 등지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길을 멈추고 다 듣고 난 뒤에 포상을 했을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가락이었다고 합니다.

고성농요는 모찌기등지, 모심기등지, 도리깨질소리, 상사소리 및 방아타령과 아낙네들의 삼삼기소리, 물레타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 심성을 고스란히 담은 고성농요는 가락은 투박하고 억센 경상도 특유의 음악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지리적인 영향인지 음악적인 면에서는 전라도의 계면조 선율구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곳 등지의 긴소리는 다른 곳에 비해 느리고 처량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리는 묘한 매력이 있으니 고성농요보존회 홈페이지에서 손수 찾아 들으시고 몸소 느껴 보시길 권합니다.

마을을 벗어나는 즈음의 삼천포 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는 고인돌공원이 있습니다. 다섯 기의 고인돌이 주제입니다. 2000년에 조성된 문화마을 공사에 따라 한 기는 매장주체부인 하부구조가 파괴되었으며, 모두 지석을 갖추지 않은 개석식 지석묘입니다. 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빚어진 반문화적인 파괴 사례입니다. 지석묘를 살피고, 척정마을을 벗어나면서 옛길을 덮어쓰고 있는 33번 국도를 버리고 개골(가동)마을 안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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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산 = 가동마을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앞서 언급한 무이산(武夷山·548.5m)입니다. 무이산이라면 남송대인 12세기부터 주희(1130~1200년)에 의해 성리학이 발전하고 전파된 본산입니다. 주자가 무이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하면서 구곡을 경영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실천한 곳입니다.

주자의 무이구곡은 그를 본받고자 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이상향으로 상정되어 경관이 뛰어난 골짜기마다 구곡을 설정하여 전국에 70개가 넘게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여지도서> 고성현 산천 신증에 "무이산은 관아의 서쪽 25리에 있다. 산 아래에 사수와 백록동이 있다. 감치산에서 뻗어 나왔다"고 나옵니다. 사수는 공자의 고향 곡부를 흐르는 강이고, 백록동(白鹿洞)은 당나라 때의 학관을 주자가 다시 일으켜 세운 백록동서원이 있는 고장입니다. 고성에 무이산 백록동 사수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은 유학의 비조 공자와 중흥조 주자를 본받고 기리자는 뜻으로 보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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