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당당히 '고향'이라고 말하는 곳…농부가 된 일, 푸근한 고향을 물려준 일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배고픈 자식들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라 할 만큼, 먹고사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합니다.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고 땅과 기후에 따라 먹고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나라 백성이든 먹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천하장사라도 먹어야 산다는 말이지요. 아랫글은 내가 정붙여 살던 도시를 떠나 산골 농부가 되고 이 년쯤 지났을 무렵에, 군대에서 첫 휴가 나온 큰아들 녀석이 쓴 글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 자신이 태어난 곳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기억도 없는 그곳을 고향이라 부르며 살았다. 고향이라면 돌아가야 할 어머니 품 같은 곳이어야 하는 데 말이다. 따뜻한 기억도, 골목의 정취도, 어떤 사건도 생각나지 않는 그곳을 고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내게 고향의 풍경은 황무지와 같았다. 그런 내게 고향이 생긴 것이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생긴 것이다. 이름도 고운 '나무실 마을', 경상남도 합천 황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조그만 산골 마을이다. 아버지의 귀농은 마침내 내게 '고향'이라는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황토로 만든 집에 들어서면 기분 좋은 흙냄새가 나고, 어느 바람결에 들어왔는지 풀 냄새도 난다. 그리고 집 옆에는 창고와 생태 뒷간이 있다. 뒷간에 앉으면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글도 있어 똥 누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은 열일곱 평밖에 안 되는 작은 흙집이지만 아늑하고 따뜻함이 물씬 흘러나온다. 이제는 이곳이 내 고향이다. 도시 사람들의 위로용 멘트로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곳을 고향이라 말하지만, 내게는 정말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먼 곳에 있더라도 나의 그리움과 외로움은 이곳 황매산으로 달려갈 테니까 말이다."

논 한 마지기도 없이 남의 땅 부쳐 농사짓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 녀석이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메마른 도시 삶에 지쳐 몸과 마음이 병든 나를 살려준 것은 흙냄새 풀 냄새 가득한 농촌이었습니다. 마음의 고향도 없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던 아이들의 영혼을 되살려준 것도 결국은 농촌이었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농촌'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시에 살 때는 몰랐지만, 농부가 되고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하루가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갖가지 나무 냄새와 꽃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끔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산골 마을에 찾아오면, 나는 가장 먼저 논으로 데려갑니다. 날마다 먹는 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야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눈을 손수건으로 가려 논둑길을 천천히 걷게 하기도 하고, 눈을 뜨고 논둑에 앉아 자라는 벼를 가만히 바라보게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가끔 논 안에 들어가서 풀을 매기도 하고, 논 안에 무엇이 자라나 살펴보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논에 들어가 본 아이들은 대부분 처음엔 두려워합니다만 조금 있으면 질퍽질퍽하고 폭신폭신한 논흙을 밟으며 신기하다며 웃고 떠들며 잘 놉니다.

서정홍.jpg
여태 살면서 내가 가장 잘 선택한 일은 농부가 된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생명 창고'와 고향을 물려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