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13) 산청군 산청읍 경호교~신안면 신안리 명동마을

산청읍 경호교에 닿은 물길은 경호1교와 내리교를 지나 옛 나루터가 있었다는 신안면 신안리 명동마을에 닿는다. 40리 정도 되는 물길이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동쪽으로는 정수산 병곡천, 둔철산 심거 골짝물과 외송천, 선유동과 수월폭포를 지나온 안봉천 등이 경호강 남강 물길로 합수한다. 강 건너쪽으로는 내리천과 어천, 석대산 골짝물과 강누천이 합수한다. 옛 명동나루터를 지나온 물길은 신안면 하정리 원지마을에서 합천군 삼가를 지나온 70리 물길 양천과 합수하여 두물머리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단성면 묵곡교를 지나자마자 웅석봉 동남쪽 청계저수지에서 흘러온 남사천까지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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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초교에는 '거북돌'이 있다

다시 산청읍 경호교 위에 섰다. 물길은 모고리에서 흘러온 송경천을 보태어 수계정과 산청공원 아래를 지나고 있다. 경호강을 따라 수계정, 산청초등학교, 산청군청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 일대는 옛날부터 산청군의 중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옛 관아 터에 그대로 군청이 들어섰고 객사 터에는 산청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산청초교는 설립한 지 100년이 훌쩍 넘었다. 교정 가장자리에 오래된 비석이 있다. 거북 모습을 본뜬 받침돌에다 빗돌을 올린 것이다. 산청초교를 신축할 당시 땅속에서 발견됐던 척화비이다. 척화비는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세운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의해 두 조각으로 파손됐던 것을 현 위치인 교정에 복원해 놓았다. 어린 학생들은 굳이 무슨 의미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있는 것조차도 모르거나 그저 '거북돌'로 알고 있다.

산청초등학교 가장자리에 있는 척화비.

산청읍 내 중심도로를 지나 경호1교 어귀에서는 다시 물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는 바위산이라 모롱이를 돌 때마다 절경을 들춰내고, 새로이 조성된 강변길은 꽃봉산 아래 내리교로 이어진다. 내리계곡 끝자락에는 인적 드문 심적사가 있다. 신라 경순왕 3년(929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청군 산청읍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심적사.

크고 작은 산이 흐르는 물길을 호위하고

산청읍에서 경호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웅석봉이 길게 이어진다. 산청읍과 삼장면, 단성면에 걸쳐있는 웅석봉은 지리산을 바라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천왕봉이 중봉,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다시 치솟는 산이 웅석봉이라 말한다. 웅석봉은 말 그대로 '곰바위산'이다.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청읍에서 경호강을 따라 내려오는 길 왼쪽으로는 정수산(841m)과 둔철산(812m), 월명산(320m), 백마산(286m), 적벽산(210m)으로 이어진다.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아침부터 내린 비가 마치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상강 지나고 엊그제 소설 지났는데…. 내리교를 지나온 경호강은 국도 3호선과 나란히 흐르다가 통영~대전간 고속국도와 교차하기도 한다. 범학리 자신마을 앞을 지나는 옛 국도3호선에서 강변유역이 환하게 드러난다. 빗방울은 차갑지만 강 건너 비안개에 성심교와 성심원이 희뿌옇게 떠오른다.

산청 성심원(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은 1959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인 작은형제회가 풍현마을에 설립한 한센인 마을이다. 수십 년 동안 외부와 고립된 채 살아온 마을이다. 그런데 2012년부터 매년 '성심仁愛(인애) 대축제'를 열고 성심원 입구에는 지리산둘레길 센터도 열었다. 이곳은 둘레길 6구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최근에는 '세월호 천일기도' 등 인근 지역민들과 뜻을 같이하기도 하고 성심원 내 다양한 시설들을 개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 일대는 강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디에서 바라보든 가던 발길을 멈출 만큼 아름답다. 강폭이 넓은 데다 큰 바위가 없고 잔돌들이 깔려있다.

새고개 임걸룡 전설과 참전기념공원

신안면 외송리 경호강변 새고개는 의도 임걸룡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새고개에서는 의도 임걸룡 이야기를 빠뜨릴 순 없제."

외송마을 홍화원 입구에서 만난 사월아재(80)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걸룡은 시천면 내공리 정각사 터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무예가 뛰어났지만 이곳 새고개 석굴에 살며 팔도 등 짐장수의 보따리를 털었다. 하지만 일부만 가져오고 그것 또한 부하들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중에는 등짐장수들이 통행세를 내듯이 알아서 굴 앞에다 물품을 내놓고 다녔다.

"비록 도둑이지만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도둑질한 걸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나눠줬으니…. 양반들이며 있는 것들이 상도둑 같았던 시절이니. 허기사 지금도 의원이다 공무원이다 뭐다, 천지에 상도둑들이 설치고 있네."

임걸룡이 의적 노릇을 하던 새고개에는 지금 '산청군 참전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딱히 눈에 띄지 않고 지나치는 곳이라 드나드는 발길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이곳은 산청군 출신 유공자 1297명의 공훈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건립한 공원으로 6·25참전 기념비, 베트남 참전 기념비, 88사건 위령비가 있다. 88사건은 1951년 8월 8일 산청읍 장승배기에서 북한군 패잔병들에 의해 경찰과 의용경찰 수십 명이 희생당한 치욕적인 패전이다. 위령비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총 8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건립됐고, 2008년 5월 9일 자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등재됐다. 영혼들의 이름이 면 단위로 일일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공교롭다. 건립 시기가 2004년이면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에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준공되던 해다. 산청군은 산청읍까지는 북부, 그 아래부터는 남부라고 말한다. 북부에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토벌과정에 군인들에 의해 죽은 양민들을 추모하는 공원이 있고, 남부에서는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은 컸다. 묵직하고 깊은 통증은 수시로, 느닷없이 밀려온다.

솔밭 잉어도 팔아먹고 대도 팔아먹고

새고개를 지나면 신안면 신안리 강변은 후천마을이다.

"1970년 진주에서 남강댐 만들고 난 뒤 여기 솔밭머리에 잉어가 엄청나게 많았다쿠던데. 솔밭에 앉아 놀고 있으면 2~3분 간격으로 잉어가 펄떡펄떡 뛰는 게 보일 정도라니께. 남해 어부들이 그물 들고 와서 타이탄차에 한 차 잡아 부산 구포 가서 팔아먹었다했으니께."

인근 마을 덕산 아재(76) 이야기는 회자되면서 부풀려졌겠지만 당시 후천마을은 엄청난 잉어떼만큼 살림살이도 넉넉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후천마을이 강변 솔밭을 없애고 난 뒤 기울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의 번성만 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1987년 셀마 때 상류에서부터 엄청나게 물이 쏟아져 후천마을을 덮쳤다. 주민들은 솔밭 때문에 물길이 막혀서 그리 됐다며 나중에 없애버렸다. 대전~통영간 고속국도 산청 상행선휴게소에서 내려다보면 후천마을 앞은 강폭이 더욱 너르고 펑펑하다. 물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자갈밭이 펼쳐져 있다. 산청군은 몇 년 전에 솔밭자리에 유채밭을 조성해 봄이면 유채축제를 한다. 소설 지난 강변유역이 유채 순으로 온통 새파랗다.

대나무가 돈이 되던 시절이다. 신안면 일대가 온통 대밭이었다.

"그때야 그냥 물에 떠내려 보냈제. 뗏목을 만들기도 하고. 대를 쳐서 물에 띄워 보내면 진주 가서 건져 내어 팔아먹었다데. 안봉이나 수월 골짜기 사람들도 대를 치면 안봉천으로 떠내려 보내서 경호강으로 흘러 가게 했지. 더러는 큰 뗏목을 만들어 남강으로 보내기도 하고…. 요 밑에 뱃소라는 곳에서 잘 흘러가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더만예."

지금처럼 육로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을 때였다. 신안면 하정리는 국도 3호선이 새로 나기 전만해도 이 일대에 대밭이 많았다. 원지마을에는 아직도 '대 공장'이 남아있다.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삼우당 문익점 묘

후천마을에서 강변으로 난 새 국도 3호선을 버리고 들판으로 들어서면 곧 신안마을이다. 동남쪽 월명산 자락을 지나는가 싶은 지점에 '도천서원道川書院' 표지석이 나온다. 옛 국도 3호선에서 왁대고개로 들어서기 전이다.

이곳은 고려 때의 문신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세조 7년(1461년))에 세웠으며, 정조 11년(1787년)에 '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도천서원. 삼우당 문익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현재 건물은 조선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1975년에 복원되었다.

입구에 난 산길로 접어들면 삼우당의 묘에 닿는다. 소나무숲 안에 자리잡은 묘는 좌우의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인적은 없는데 산새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묘 앞에서 뒤를 돌아보니 지리산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곳에서 강을 건너 20리 밖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는 '목면시배유지'가 있다. 삼우당이 장인 정천익과 목화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 곳이다.

다시 옛 국도에서 굴다리를 지나 왁대고개로 접어들면 강변으로는 신안리 명동마을이다. 이곳에는 단성면으로 들어가는 나루터가 있었다.

"요기서 강 건너 지금 단성면 양수장 쪽으로 나룻배가 다녔제. 물이 많으면 노 젓는 배가 있었고 물이 적은 겨울에는 노 젓기가 힘드니 줄배가 다녔고…."

물길은 백마산 아래를 굽어들며 넓은 모래톱과 자갈밭을 이루며 적벽산을 타고 흐른다.

산청군 단성면 강둑에서 강 건너를 보면 넓은 둔치와 백마산 능선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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