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79) 통영별로 45회차

소설을 지났는데 겨울 날 채비는 잘하고 계신지요. 아직 우리 지역은 본격 김장철이 아닌지 길가 남새밭에는 거두지 않은 배추와 무가 그대로 있고, 산자락 감나무 밭에는 여태 거두지 못한 단감과 홍시가 이파리를 다 떨어트린 채 붉게 익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곡리 한실마을에서 고성 경계까지 걷습니다. 사천강의 공격사면에 바짝 붙여 났던 길은 33번 국도가 흡수해 버렸고, 건점에서 대산을 지나 복상으로 이르는 구간에는 지금도 옛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으며 그 쓰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국도 확장으로 사라진 창널모퉁이 비리길 = 오늘 걸을 길은 한실에서 건점으로 이르는 부웅더미 남서쪽 창널모퉁이의 비리길 터에서 시작합니다. 지난여름에 통영별로 옛길을 걸을 때는 예비조사를 충실히 못한 탓에 이곳에 비리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번에 기사를 작성하느라 <한국지명총람> 등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장산리 배후의 천금산이 대곡리로 뻗어내린 부웅더미 끝자락의 창널모퉁이에 바위벼랑을 깎아 만든 비리길이 있었습니다.

놀란 마음에 아침 안개를 뚫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 자리는 이미 33번 국도를 확장하면서 벼랑이 크게 깎여나간 상태였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건점마을로 들어가 한실에서 도로가 이어질 만한 곳을 찾아보니 지금 도로보다 약간 낮은 곳에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부웅더미 기스락을 따라 남아 있는 옛길을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농로로 쓰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건점마을로 드니 길가에는 향수어린 빨래터가 있고 그곳을 지나자 곧장 건점마을입니다.

마을에는 아직도 곳곳에 돌담이 있어 마치 어릴 적 고향마을을 찾은 듯한 느낌입니다. 마을 이쪽저쪽을 걷다보니 느티나무 아래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셔서 건점과 한실을 잇던 옛길과 창널모퉁이의 비리길에 대해 이모저모 묻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자료에서 확인한 대로 예전에 길이 있었는데 도로 공사로 없어졌다는 말씀을 전해 줍니다.

사천 정동면 창널모퉁이∼건점 구간 통영별로 옛길. /최헌섭

◇현종이 소싯적 우거했던 배방사 터 = 건점을 벗어나 길이 이끄는 대로 가다보니 어느새 장산리의 으뜸마을인 대산마을에 듭니다. 마을 북쪽 배방골은 산 너머(서쪽) 성황당산 자락에 유배와 있던 왕욱의 아들인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배방사(排房寺)가 있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불우에 "배방사의 옛날 이름은 노곡(蘆谷)이며, 와룡산(지금 천금산)에 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 절에 우거하며 뱀 새끼를 보고 시를 짓기를, '작디작은 뱀 새끼 약포의 울타리를 도는구나. 온 몸에 붉은 무늬가 제대로 아롱졌다. 언제나 꽃 숲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하루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먼 남쪽 바닷가 한적한 절에 몸 부치고 살던 자신의 처지를 뱀 새끼에 빗대어 읊은 것으로 언젠가는 곡령(鵠嶺=개성 송악산을 이름, 모후 황보씨가 꿈속에 이곳에 올라 오줌을 눈 태몽을 꾸고 뒷날 현종이 된 순詢을 낳았음)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리라는 강한 염원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바람은 아버지 욱이 유언처럼 남긴 귀룡동에 복시이장(伏屍而葬=주검을 엎어서 하는 매장)하면 발복하리라는 도참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절대적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지금도 대산마을에서 복상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옛길이 잘 남아 있어 어린 아들을 만나러 이 길을 오갔던 왕욱의 심정을 아비의 마음으로 되새기며, 배방사가 있던 배방골로 길을 거슬러 올라가 먼발치에서 절터를 헤아리며 사하촌을 서성이다 다시 길을 잡습니다.

15.jpg

◇장산리 몽대마을 = 장산리 으뜸 마을은 배방골 초입의 대산인데, 달리 몽대(夢垈)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활약한 삼룡 가운데 한 분인 주몽룡(朱夢龍)의 태몽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한국지명총람>9에는 그의 어머니가 애를 배었을 때, 아버지의 꿈에 동쪽에서 온 청룡이 방으로 드는 것을 보았다고 이름을 몽룡이라 하고 마을을 몽대라 했다고 전합니다. 뒷날 주몽룡이 금산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강덕룡·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牛旨峴)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 뒤로도 경상도 곳곳에서 여러 전공을 세워 강덕룡·정기룡과 함께 삼룡(三龍) 장군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마을 한가운데 별묘는 사천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구암(龜巖) 선생 이정(李禎)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명종 연간에 경주부윤을 하며 신라 왕릉을 크게 수리하였고, 물러나서는 살던 곳에 구암정사를 지어 날마다 유생들과 강학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60세에 몰하니 만죽산(萬竹山) 남쪽 기슭(사천읍 구암리 구계서원 맞은바라기)에 장사지냈습니다. 무덤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도굴되어 지금 그 자리에는 석곽만 남아 있습니다.

◇사천강 가의 험한 길, 가메바우 = 몽대를 나서 뒷산이 코끼리가 엎드린 형국을 한 복상(伏象)마을 남쪽으로 길을 대어 시리봉 기스락으로 난 길을 따라 옛 가곡원이 있던 만마(萬馬)마을에 듭니다. 가곡원(可谷院)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역원에 '현 동쪽 20리에 있다'고 나오지만, <여지도서> 사천 역원에는 원집은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다고 나옵니다. 아마 <여지도서>가 간행된 영조 이전에 없어졌기 때문이겠지요.

만마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이었음은 가곡원과 가메바위 가까이 파발등 지명으로도 알 수 있지만, 달리 이곳을 통과하는 길이 험하였음을 전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마에 있는 가메바우 전설인데요. 전하는 말에 예전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신행을 가던 중 앞에서 가마를 메고 가던 가마꾼들이 발을 헛디뎌 길 아래 소(沼)에 떨어져 모두 익사를 했습니다. 대곡리에서 객방에 이르는 구간이 사천강의 공격을 받아 비탈이 가파른 바위였기에 이리로 난 길을 오가면서 사고가 잦았음을 일러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달리 비리길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는 없지만, 가메바우 주변에는 시리봉 자락의 바위벼랑을 깎아 만든 비리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자실을 지나다 = 마을에서 강 건너로 바라보이는 마을이 지금은 학촌리 학촌마을이라는 고자실입니다. 바로 왕욱과 현종이 남긴 애잔한 부자유친의 정을 품고 있는 고자치(顧子峙) 아래에 있다는 장소성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들머리에는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의 활엽수로 구성된 고자실숲이 조성되어 있어 마을의 풍치를 한층 돋우어 줍니다.

언젠가 고자치를 걸으리라는 염을 새기며, 33번 국도가 덮어쓴 옛길이 바라보이는 강 서쪽 충적지에 난 길을 따라 소곡리로 향합니다.

소곡리의 으뜸마을인 신월에는 먼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무덤인 소곡리 신월유적이 있어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사람이 자리잡고 산 이력이 만만찮음을 일러줍니다. 사천강 양안의 충적지에 자리잡은 이 유적은 홍수로 그 구조가 드러나 1969년 단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하였습니다. 무덤이 모두 12기 조사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발견 사례가 드문 묘역을 갖춘 지석묘였습니다.

이곳과 함께 막 지나온 대산마을에서도 마제석검과 석촉, 질그릇 등이 출토되어 사천강 상류에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닦은 때가 매우 오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유적은 모두 사천강과 그 지류에 발달한 충적지에 있어 사천강이 제공하는 생태적소 요소가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