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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출신 신돈, 괴짜였을까 성인이었을까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9) 창녕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창녕은 화왕산(火旺山, 757m)에서 시작한다. 화왕산은 바깥쪽으로 깎아지르는 절벽을 이룬 두 봉우리가 남북에 솟아 있고 그 안쪽은 부드럽게 퍼져내리는 억새평원이다. 펑퍼짐한 데는 높이 쌓고 가파른 데는 낮게 쌓은 화왕산성이 있으며 가운데 움푹한 데는 동그란 못이 셋 있다. 높은 산꼭대기에 물이 넉넉한 못이 있으니 옛적에는 아주 긴요하게 쓰였을 것이다.

못은 창녕 조(曺)씨 득성 전설을 안고 있는데 사람들은 기우제라든지 하늘에 대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었다. 가운데 못에서 2003년 2005년 발굴에서 호랑이 머리뼈 세 마리분과 돼지뼈·사슴뿔이 발견됐고 그밖에 통일신라시대 물건으로 짐작되는 세 발 달린 구리솥과 청동관·접시·가위·항아리·기와 따위도 출토됐다. 호랑이 머리라… 그이들은 하늘을 오르내리며 구름을 쥐락펴락하는 용이 비를 관장한다 여겼고 이런 용에게 호랑이는 상극인 존재였다. 둘이 한 번 붙어 다투는 사이(용호상박龍虎相撲) 비가 내린다고 믿었던 것일까.

◇화왕산성을 지킨 곽재우

화왕산성은 뒷날 정유재란을 맞아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에게 크게 쓰임을 받는다. 곽재우는 지형지리를 활용해 곳곳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화왕산성에서는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1597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5만은 안의를 거쳐 전주로 넘어가면서 7월 화왕산성에 이르렀다. 경상좌도방어사 곽재우는 밀양·창녕·영산·현풍 네 고을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여기 들어와 농성(籠城)했다.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지키는 데 있었다. 5만 위세에 흔들리는 백성과 장졸들에게 곽재우는 말했다. "왜장도 병법을 안다면 쉽사리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과연 가토는 이레 동안 을러대다 물러났고 그래서 일대는 안전할 수 있었다.(하지만 전설 속 곽재우는 화왕산성에서도 갖은 기책으로 왜군을 무찔렀다.)

화왕산성 동문.

곽재우는 나고 자란 의령 유곡면 세간마을 외갓집을 떠나 창녕으로 왔다. 지금이야 '의령을 떠나'라 표현하지만 당대에는 의령과 창녕은 물론 합천과 함안·밀양까지 낙동강·남강·황강·밀양강 물길로 이어지는 하나였다. 망우당은 자기 첫 승전지인 기강나루에서 지척인 창녕 도천면 우강마을 강가 언덕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살았다. 모든 재산을 쏟아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는 마지막 남은 망우정조차 자기 자식한테는 남기지 않았다. 외손뻘 되는 이도순에게 물려줬는데 망우정에 여현정(餘賢亭)이란 현판이 하나 더 달려 있는 사연이다. 망우정 안에 있는 '여현정기'(조임도 씀)에서 곽재우는 이렇게 말했다. "요임금은 (자식이 아닌) 순에게 천하를 넘겼고 나는 이 강사를 현자인 이군에게 물려주니 이를 요순에 견주면 넓은 하늘을 좁은 못이랑 비교함과 같으나 마음 속 깊은 뜻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자네가 자연을 벗하고 학문을 좋아해 능히 지킬 수 있기에 정사를 내것으로 삼지 않고 이렇게 준다네." 곽재우는 1600년 임금이 내린 벼슬을 받지 않은 죄로 귀양갔다가 돌아온 뒤 1602년부터 여기서 살다 17년 세상을 떠났다. 그이는 왜 벼슬을 마다했을까. 곽재우는 남명 조식이 아끼는 제자이면서 외손서였다. 남명 수제자로 곽재우와 마찬가지 의병을 일으켰던 정인홍은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결국 처형당하는 운명이 됐다. 곽재우는 가난하게는 살았지만 평화롭게 종신했다. 해질 무렵 망우정에 서면 낙동강 휘어지는 허리께로 햇살이 자디잘게 쏟아진다. 망우당은 이런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근심걱정(憂)을 잊었(忘)으리라.

◇창성부원군 조민수

화왕산에서 성을 얻은 창녕 조씨는 고려 말기 조민수를 내었다. 최영 다음 가는 장군이던 조민수는 최고현장사령관(좌군도통수)이 돼서 5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선다. 그러다 바로 아래 우군도통수 이성계 설득을 따라 1388년 5월 22일 군사를 돌렸다(위화도회군). 이들은 팔도도통수 최영 목숨을 빼앗고 우왕을 몰아낸 뒤 좌시중과 우시중을 꿰찼다. 이성계는 개혁의 대표였고 조민수는 보수의 대표였다. 실권이 이성계한테 많았지만 조민수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우왕을 뒤이은 창왕은 조민수 쪽이 주장한 결과였다. 권력은 조민수에게로 기울었으나 대토지소유라는 약점이 있었다. 1389년 전제(田制) 개혁을 반대하다 이성계 일파한테서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귀양갔으며, 이후 창왕 생일 특사로 풀려났으나 공양왕 즉위와 함께 다시 창녕에 귀양갔다가 1390년 숨을 거둔다. 개혁세력에 맞서는 마지막 당랑거철(螳螂拒轍)이 조민수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대합면 신당마을 지나면 나오는 산기슭 조민수 무덤 앞에는 1987년 문중에서 세운 묘비가 있다. 조민수는 창성(창녕)부원군이었다.

◇정민변정도감 신돈

창녕 출신 역사 인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기는 신돈(辛旽)이 으뜸이다. 신돈 법명 편조(遍照)는 세상만물을 고루 비춘다는, 부처가 이룩한 높은 경지 가운데 하나다. 창녕 으뜸 절간 관룡사 올라가는 산기슭에 터가 남은 옥천사(玉泉寺)에서 신돈은 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천한 사비(寺婢)의 아들이었다. 신돈은 당대 고승 보우가 지목한 그대로 '사승(邪僧)' 요사스런 중놈이라는 이미지를 아직 벗지 못했다. 처음에는 개혁을 하려 했으나 갈수록 주색을 즐기고 권력을 오로지했다는 것이다. 이는 승자의 기록이다.

신돈은 1365년 역사 전면에 등장한다.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이 재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고 왕권은 졸아 있었으며 갓 생겨난 사대부 집단은 아직 약했다. 공민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돈을 발탁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와 어거지로 노비가 된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는 개혁을 하려 했다. 땅(田)과 사람(民)을 가려(辨) 가지런히(整) 하는 특별 부서였다. 백성들은 "성인이 나타났다"고 반겼지만 권문세족은 미워했다. 1366년부터 해마다 신돈을 몰아내려는 시도가 있었고 1370년 실각한 신돈은 이듬해 역모로 처형되고 공민왕 또한 74년 권문세족에 독살된다. 지금 옥천사는 아주 망가져 있다. 부도·석등·석탑은 물론 연자방아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진짜 하나도 없다. 권문세족의 저주가 그만큼 사무친 때문일까. 그러나 그 권문세족도 영원히 권문세족이지는 않았다. 세상살이 참 무상하다.

옥천사 터에 깨진 채 남은 석등받침돌.

◇창녕에 어린 가야와 신라

창녕은 가야의 옛 땅이다. 창녕 옛 이름 불사국(不斯國)·비자화(比自火)·비사벌(比斯伐)은 모두 여기 가야 세력을 이르는 말이다. 자취는 교동·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옛 무덤들로 남아 있고 유물들은 창녕박물관에 꽤 남아 있다. 도도록하게 솟은 데 자리잡은 송현동고분군 위로 눈길을 돌리면 목마산성·화왕산성이 보이는데 이 또한 가야 세력이 처음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일제강점 1918년 조선총독부가 발굴을 한답시고 죄다 빼냈기 때문이고 국립중앙박물관조차 발굴 유물을 창녕에 두지 않고 서울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송현이'가 남았다. 2007년 송현동고분 하나에서 발견됐다. 순장된 넷이 있었는데 가장 깨끗한 하나를 복원했더니 키 153㎝에 왼쪽 귀걸이를 한 열여섯 이팔청춘 소녀가 생겨났다. '송현이'는 지금 창녕박물관에서 오른손을 내밀고 서 있다.

창녕 옛 이름은 모두 '불' '빛'으로 통한다. '빛벌', 햇빛 가득한 벌판이다. 화왕산도 있기는 하지만 장마면 유리 조그만 야산 꼭대기 창녕지석묘에서는 그런 기운을 더욱더 느낄 수 있다. 보통 고인돌은 평지 또는 야트막한 언덕에 있기 십상이지만 창녕지석묘는 제법 높은 마루에 있다. 둘레 우묵하게 자란 수풀이 눈길을 가리기는 하지만 둥글게 펼쳐진 분지 한가운데 사방 툭 트인 자리에 놓였다.

창녕지석묘는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전국 고인돌을 조사할 때 경남 대표선수(마산 곡안리 고인돌과 함께)로 부름을 받았을 만큼 잘 생겼다. 원래는 여럿 더 있어 칠성바위라 했으나 일제강점기 도로를 만들면서 깨어 깔아 없앴다. 지금 것도 당시 마을 사람들이 20원을 보상금으로 일제한테 물어주는 바람에 남을 수 있었다. 위에 얹힌 바위는 재질이 근처에 흔한 퇴적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낙동강과 계성천이 만나는 장마면 일대는 죄다 퇴적암뿐 화강암은 창녕읍이나 영산면에서나 만나진다. 40톤이 넘는 돌을 거기서 여기까지 누가 어떻게 옮겼을까? 가야 이전 시대에도 창녕에 꽤 커다란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창녕에는 신라 자취도 많다. 역사에서 갖는 의미로 보면 진흥왕척경비가 으뜸이고 아름다움으로는 술정리동삼층석탑이 으뜸이다. 신사년 2월 1일립(辛巳年二月一日立) 글자로 561년 세웠음이 확인된 척경비는 555년 비사벌을 정복한 진흥왕이 낙동강 유역 가야 잔존 세력을 향해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 하겠다. 마지막 남아 있던 대가야는 이듬해 망했다. 읍내 장터 서쪽 술정리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미덕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장중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으나 세련되고 고상하면서 안으로는 단단해 쉽사리 꺾어지지 않을 그런 느낌을 뿜는다. 도로를 건너 KT창녕플라자 오른편 골목으로 들면 나오는 술정리서삼층석탑은 아주 빼어난 동삼층석탑이 옆에 있어 푸대접을 받을 뿐, 나름 기품있고 아름다운 석탑이다.

신라의 자취가 남겨진 술정리동삼층석탑.

창녕군청 동쪽에는 인양사조성비(탑금당치성문기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771~810년 어떤 한 사람이 인양사를 비롯해 있는 창녕에 있었던 여러 절간에서 범종·탑·금당 따위를 만든 때와 거기에 든 재물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다른 면에는 스님 서 있는 전신이 조각돼 있는데 얼굴이 젊어보이고 몸통은 조금 옹졸한 모습이다. 곳곳에서 여러 가지 역사(役事)를 독자적으로 일으킬 수 있었던 작지 않은 문화역량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창녕군청 동쪽에 있는 인양사조성비.

◇관룡사와 석빙고

창녕을 얘기하면서 관룡사를 빠뜨릴 수는 없다. 들머리 석장승에서 원음각·대웅전·약사전과 그 앞 삼층석탑, 그리고 용선대 석조여래좌상까지 멋지고 오래된 문화재가 가득하다. 병풍바위라 일컫는 관룡산 자락까지 관룡사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것에만 눈길을 주면 작지만 그럴듯한 물건은 놓치기 쉽다. 범종각에 놓인 법고, 그 법고를 받치는 괴수(怪獸)가 은근슬쩍 웃는 모습,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뒤쪽 바위 닫집 매다는 데 쓰였음직한 홈 따위가 그것이다. 아래 자연석에 맞추기 위해 쪼아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받침돌도 사람 눈길을 기다린다.

관룡사 범종각 법고를 받치고 있는 괴수.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훤주 기자

창녕은 석빙고로도 유별나다. 남한에 남은 석빙고 여섯 개는 이상하게도 경상도에만 있다. 경북 청도·현풍·안동·경주에 하나씩 있고 경남인 창녕에는 창녕읍과 영산면에 하나씩 두 개가 있다. 옛날 겨울 추위로 생긴 얼음을 창고에 넣고 짚·풀로 덮고 꽁꽁 닫아 갈무리했던 자취다. 모든 석빙고는 뒤쪽에 개울을 끼고 있다. 얼음이 녹은 물은 기울어진 바닥을 따라 개울로 빠진다. 돌을 길게 자르고 다듬어 쌓은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도 시원하다. 가운데는 공기 구멍이 나 있는데 바깥은 흙으로 덮고 띠를 둘러 모르는 이들은 고분이 아닌가 여기기도 한다.

관룡사 들머리의 석장승. /김훤주 기자

오랫동안 창녕과 다른 독자적 행정단위였던 영산에는 이런 석빙고에 더해 만년교도 있고 신씨옛집도 있고 영산향교도 있다. 신씨옛집은 특징이 너른 안마당, 낮아진 집채 축대와 지붕, 사랑채와 돌아앉아 독립적으로 쓰였을 별채에 있다. 전통 양식에서 벗어난 조선 후기 부잣집인 셈인데 앞에는 이 집 주인이 소작농 등한테 베푼 선행을 기리는 빗돌이 있다. 신씨옛집 뒤편 산기슭에 자리잡은 영산향교는, 공부하는 명륜당과 제사하는 대성전이 따로 떨어진 공간에 자리잡고 있어 색다르다.

◇창녕을 일신한 한강 정구

한강(寒江) 정구(鄭逑. 1543~1620)는 놓치기 쉬운 창녕 관련 인물이다.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모두에게서 배웠으며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1580년 창녕현감으로 와서 창녕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꼽지 않을 수 없는 창녕 인물이다. 팔락정·부용정·술정 등 정자를 마을마다 세우고 서당으로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으며 낙동강 바로 옆 유어면 가항마을서는 소벌(우포늪) 물이 넘어들지 못하도록 들머리 땅을 돋우기도 했다.(가항加項은 우리말로 풀면 '목덜미에 더한다'가 되고 그래서 '덤목'이라 한다.) 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창녕 문화역량을 모아 지역 역사·문화·풍물을 기록한 읍지 <창산지>를 펴냈다.

정구가 창녕을 떠나게 되자 창녕 사람들은 그이를 생사당(관산서원)을 지어 모셨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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