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12) 산청군 생초면 곱내들~산청읍 경호교.

엄천강(임천) 물길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 두물머리에서 남강 본류와 합수한다. 여기서부터 남강은 산청군 경계를 벗어나 진주시 진양호에 이르기까지 '경호강(鏡湖江)'이라 불린다. 이름의 유래는 정확지 않으나 '명경(거울)같이 맑은 강'이라는 뜻이다. 진주시 진양호로 접어드는 단성면 소남나루까지 이리저리 굽어 도는 물길은 대략 100리에 이른다.

산청군 오부면 양촌마을을 지나 산청읍으로 흐르는 경호강 물길.

경호강은 대부분이 자갈과 암석으로 이뤄져 있다. 생초면 어서리 강정, 오부면 양촌리 등 자연발생유원지는 1960~80년대 인근 지역 주민들의 꽃놀이 또는 피서지로 손꼽혔는데 크고 작은 자갈밭이 펼쳐진 강변 유역이다. 해질 무렵 강가 언덕에서 S자로 굽어 도는 물길을 내려다보면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이런 것이려니 뜬금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생초 골짜기 물꼬싸움 이야기

"홀애비가 새벽녘에 논에 나가니 옆 논에 과부가 물꼬를 몰래 자기 논으로 대놓고 줄 생각을 안하는 기라."

물이 귀하던 시절 실제 일어난 이야기라며 생초 사람들 사이에 왁자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잘 지내던 한 마을 일가친지일지라도 해마다 6~7월만 되면 물 때문에 원수가 되기도 하던 시절이다.

"처음에는 괘씸허긴 허지만 물꼬만 돌릴라 했지. 근데 이노무 과부가 아즉 멀었다며 순 억지인기라. 할 수 없이 홀애비가 가지고 간 괭이로 물꼬를 억지로 돌리니 과부가 온갖 욕을 퍼붓는 기라. 홀애비도 열이 나서 대거리를 하며 억지로 끌어내릴라 했제. 근데 뻗대던 과부가 갑자기 발딱 서더니 저고리를 훌훌 벗는기라. 홀애비가 기겁을 하고는 손을 댈 수가 없어. 열은 뻗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홀애비가 아랫도리를 다 벗고는 아예 또랑에 드러누워 버린 기라. 고마 과부가 놀래가지고 돌아섰다쿠데."

과부와 홀아비 물꼬싸움은 입에서 입으로 돌면서 희화되긴 했지만 이곳 생초 사람들에게도 물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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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초면 상촌리 곱내들로 들어가기 전이다. 강 건너편은 함양군 유림면 장항리이다. 강변 풍경에 넋을 놓다가는 금세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여러 기의 빗돌들이 절벽 아랫자락에 나란히 서있다. 이들 중 '경은배공통거송혜비'가 눈에 띈다. 통거송혜비는 경은배공이라는 사람이 물이 부족해서 농사짓기를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위해 금서면에서 물길을 잡아 이곳 생초면까지 수로를 이어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 공덕을 치하하는 비였다. 비는 1940년경에 세워졌으나 경은배공은 훨씬 더 옛 사람이라 하니 이곳 곱내들 산 쪽으로 이어지는 관개수로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통거송혜비 옆에는 '의병장경은배공공적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은배공은 의병장으로도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경은배공통거송혜비

생초면 하둔마을은 새마을금고 발상지

생초면 어서리 태봉산 남쪽 언덕은 '고대와 현대의 만남'을 시도했다는 국제조각공원이다. 이곳에는 '산청 생초 고분군'이 있다. 발굴 결과 100기 이상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3기이다. 내부 석실에다 입구와 통로를 갖추고 있다. 목아 전수관 등을 갖춘 이곳은 생초면 소재지인 어서리 일대와 경호강, 강변 개뜰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태봉산에서 발굴된 산청 생초 고분군.

이곳에서 계남천을 따라 계남리 골짜기로 살짝 들면 새마을금고 발상지로 알려진 하둔마을이 있다. 새마을금고는 우리나라 근대부흥기에 서민 금융을 이끌어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새마을금고중앙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새마을금고 50년사〉에 따르면 첫 번째 설립된 마을금고는 1963년 5월 25일 산청군 생초면 계남리 하둔마을에서 시작된 하둔금고(당시 하둔신용조합)이다.

어떻게 이 골짜기 안에서 일어났을까 싶은데 역시 사람이다. 이곳 하둔마을 출신으로 일본에서 상업학교를 나온 권태선(1903년생) 씨가 적극 나섰다고 한다. 산청에 이어 창녕, 의령, 남해 등 차례로 이어지고 곧 경남 전역에 걸쳐 115개의 조합이 설립됐다. 이후 신용조합 활동은 유신정권 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명칭을 새마을금고로 바꿨다.

이곳은 현재 국도 3호선 이전확장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주민들은 생초면 소재지를 벗어난 우회도로가 개설되면 민물고기 식당가 등 지역 상권이 대폭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물이 약이었다…'신연단 찬새미'

'찬새미' 또는 '참새미'는 명의 신연당 유이태(劉以泰 또는 爾泰·1652~1715)의 일화로 유명한 곳이다. 유이태가 살았다는 신연마을 회관 앞에서 마을 노인에게 '유이태 찬새미'를 물었다.

"뭐시라, 유이태 약수터는 저그 왕산에 가야제."

"아니, 류의태 말고 신연당 유이태 말입니더."

노인은 계속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으로 끔벅거린다.

"찬새미라 카던데. 찬새미요!"

그러자 옆 양파밭에서 일하는 아지매가 소리를 지른다.

"요래 상구 가가지고 조래 사아앙구 올라가모는 된다카이."

찬새미는 신연리에서 생초천을 따라 오부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간다. 3번 국도에서 오부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지름길인 듯하다. 찬새미는 차량도 인적도 드문 도로에 바로 붙어있으나 표지판도 없고 지상 돌출이 아닌지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비교적 깨끗이 정비돼 있지만 왕산에 있다는 '류의태 약수터'와는 달리 흔한 표지판 하나 없다.

신연당 유이태가 치료약으로 썼다는 찬새미.

유이태는 허준보다 100년 뒤 사람이다. 거창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산음(지금의 산청군 생초면)으로 옮겨와 의술활동을 했다고 전한다. 유이태는 홍역(마진·痲疹)에 대한 예방·치료의학 전문서인 <마진편>을 썼다. <마진편>에 따르면 큰 사찰 내 승려들이 모두 홍역에 걸려 위험에 처한 걸 보고는 산음에 있는 샘물을 계속해서 마시게 처방했더니 여러 날 후 나았다 한다. 또 찬새미 물을 먹고 웬 처녀가 배가 부풀어 오른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 샘물을 마시게 해 깨끗이 낫게 했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학으로 치면 심리치료쯤으로 여겨진다. 생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산청은 물도 약수'라고 내세운다. 유이태는 <마진편> 외에도 <실험단방>, <인서견문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산청 사람들조차도 동의보감 속 류의태(柳義泰)는 아는 척해도 신연당 유이태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류의태와 유이태를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동일인물로 은근슬쩍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실존인물이고 기록이 분명한 유이태를 조명하지 않고 류의태에다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류의태가 단성면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의견이 분분한데 그다지 사료가 없다더군요. 드라마 허준 때문인가 싶어요."

산청군 출신인 이동철(52·진주시 하대동) 씨는 산청군이 동의보감촌을 조성하면서 이곳 산청과 연관성이 적은 허준이나 허구 인물 류의태만 드러내놓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이곳 신연리 생림들에서 강 건너 갈전리에 가면 신연당 묘가 있다.

대포서원(大浦書院)과 서계서원(西溪書院)

산청군 옛 지명은 산음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서 산음현에 대한 최초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 산청군지에 따르면 지금의 산청(山淸)이란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영조 43년(1767년)으로 산음현을 산청현으로 개편했다. 이를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현재와 같은 행정단위로 개편했는데 당시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한 것이다.

산청 사람들은 산청읍을 가운데 두고 산청 북부와 남부로 나누기도 한다. 산청 북부에서 가장 손꼽히는 인물로는 농은 민안부와 덕계 오건(1521~1574)이다. 이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서원이 생초면과 산청읍에 각각 있다.

생림들을 지나 국도 3호선에서 대포교를 건너면 바위 절벽 아래로 물길이 크게 휘돌아간다.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대포서원(大浦書院)이 있다. 고려말 충신 농은 민안부의 절개와 의기를 기리는 곳이다. 민안부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기를 들고 두문동(경기도 개풍면)으로 들어가버렸다는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이성계가 두문동을 습격할 때 민안부는 다시 이곳 생초면 대포리로 피신해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포서원은 숙종 19년(1693)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 당시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다가 고종 11년(1874)에 다시 문을 열었다.

덕계 오건을 추모하는 산청읍 서계서원.

이곳에서 경호강 물길은 산청읍으로 이어지는 옛 국도 3호선과 나란히 이어진다. 옛 길은 장자골로 넘어가는 재를 끼고 있어 문득 돌아보면 강 건너 금서면 특리와 강 이쪽 오부면 양촌마을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멀리 왕산과 필봉이 눈에 들어온다. 산청읍 지리에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은 덕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선조 39년(1606) 때 세운 것이다. 현존 건물은 1920년 복원한 것이다. 덕계 오건은 산청군 산청읍 덕촌 사람인데, 남명의 수제자로 남명문인록 첫머리에 이름이 올라있으며, 퇴계 이황이 가장 아끼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덕계 선생은 조선 유학의 두 최고봉을 스승으로 두었으며, '중용'을 중시했다. 남명의 '경의'를 바탕으로 한 실천학과 퇴계의 '이기'를 바탕으로 한 이론학을 학문적으로 융합을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발길을 물길 옆으로 바투 잡으면 크게 휘돌아 가는 맑은 물길이 송경천을 만나 경호교에 닿는다. 현재 수계정 등 공원으로 조성돼 있지만 이 일대는 산청객사가 있던 자리이다.

산청공원 내 수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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