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8) 남해

◇사천전투와 충무공

옛적 남해는 가야 세력의 한 부분이라 짐작되지만 역사에 적혀 있지는 않다. <삼국사기>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겨울 10월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전야산은 기록에 전해지는 남해의 첫 이름이다. 당시 남해는 강주(康州:지금 진주)에 포함돼 있었고 그 중심은 지금처럼 남해읍이 아니라 고현(古縣)면이었다.

남해대교를 건너면 설천면 노량 마을이 나오고 계속 길 따라 가면 오른편에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목숨을 잃은 곳으로 정식 이름은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다.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철군을 시작했다. 한 해 전 정유재란으로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때 충청도까지 나갔으나 권율과 마귀가 이끄는 조명연합군에게 직산전투에서 지고(9월 7일) 곧바로 명량(울돌목)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다시 깨지자(9월 16일) 보급 루트가 잘릴까봐 두려워 울산·사천·순천왜성으로 물러났다.

이락사 들머리에 있는 이순신영상관.

조명연합군은 그때부터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로는 더욱더, 세 곳 왜성을 줄곧 쳤으나 무찌르지는 못했다. 사천전투(1598년 10월 1일)에서는 조명연합군이 4만 명이나 됐지만 왜군 7000명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순천에서는 명나라 제독 유정의 육군이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이순신·진린 조명연합 수군이 쳤으나(왜교성전투, 9월 20일~10월 7일) 결정적으로 이기지는 못했다. 어려움에 빠진 순천왜군은 전투에서 이긴 사천왜군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사천왜군은 고성·남해에 있던 왜군까지 합해 병선 500척 병력 6만 명으로 11월 18일 밤 남해 노량 앞바다로 나왔다.

조명연합 수군 150척 남짓은 이튿날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왜선 450척가량을 불태우고 깨뜨렸으며 왜군 유탄을 맞은 이순신 장군은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7년을 끌어온 임진왜란이 끝났다.

만약 사천전투에서 왜군이 이기지 않고 조명연합군이 이겼으면 어떻게 됐을까? 순천왜군이 사천왜군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는 없었지 싶고 그렇다면 노량 앞바다로 왜군이 대규모로 전선을 몰아나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한다.

◇관음포 승전보 '정지석탑'

충무공의 주검이 처음 뭍에 오른 데가 바로 관음포다. 충무공 사후 234년인 1832년 세워진 유허비가 있다. 이순신이 떨어진(落) 뒤 남해 사람들은 관음포를 이락포라 더 자주 일컫는다고 한다. 뒤편 바닷가에 있는 첨망대에 해질 무렵 오르면 앞바다는 노을을 받아 붉은 핏빛으로 물든다. 지금 이락사 들머리에는 이순신영상관 같은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충무공 주검은 나중에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모셔지는데 운구되기 전 여섯 달 동안은 노량나루 근처에 묻혀 있었다. 지금 남해 충렬사 자리다. 1632년 처음 지어질 때는 조그만 띠집이었는데 1658년 사당이 됐고 임금이 현판을 내리기는 1663년이었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킨 영웅에 대한 대접이 그리 후한 편은 아니었다.

남해는 이순신 이전에도 왜적을 무찌른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려 말기 남해안에는 왜구가 들끓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1350년 "봄 2월에 왜가 고성·죽림·거제 등에서 노략질하였는데, … 왜구는 이때부터 일어났다"고 돼 있다. 그 탓에 남해 사람들은 섬을 통째로 비워야 했을 정도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말과 조선초 벼슬아치 정이오(1347~1434)의 기록을 빌려 당시 정황을 보여준다. "경인년(1350) 왜적에 침략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1358)에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진주) 선천 들판에 거처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383년(우왕 9) 관음포대첩이 일어난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해 여름 5월 "해도(海道) 원수 정지가 남해현에서 왜적을 크게 깼다.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있었다. 적선 120척이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원수 유만수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이르러 합포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은 이미 관음포에서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나아왔다. 정지가 독려하여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운 큰 배 20척으로 선봉을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에는 정지(鄭地) 장군이 최영·이성계에 버금가는 뛰어난 장수였다. 관음포전투는 또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실전에 적용한 첫 해전이라는 의미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관음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우(고려 우왕) 때에 원수 정지가 여기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 패전은 이 싸움이 처음이었다"고 적었다. 이성계 황산대첩(1380)·최영 홍산대첩(1376) 이후에 관음포대첩이 있었으니 이는 육전을 뺀 해전에서 첫 승리로 봐야 마땅하겠다.

남해 고현면 탑동마을에 가면 '정지석탑'이 있다. 정지 장군 관음포 승전을 기리려고 만든 기념탑으로,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었다고 하니 당시 이 승리에 대해 남해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살갑게 짐작된다. 크지는 않아서 보통 사람 키보다 40~50cm 정도 높이가 더 있을 따름이다.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다섯 개씩으로 번갈아가며 쌓아올렸다.

관음포대첩도 남해 사람들을 남해로 곧바로 돌려보내지는 못했다. 남해 사람들은 조선시대 들어서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정이오의 기록은 이렇다. "(남해가)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와 왜구들 소굴이 된 지 46년 … 지금 임금(태종) 즉위 4년만에 … 지역이 좁고 험하여 백성들이 옛날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 하동·사천·명주·고성·진해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2월 시작해 3월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 돌아와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몄다." 태종 4년은 1404년이다.

◇문화재 발굴로 바쁜 고현면

고현면에는 요즘 들어 문화재 발굴을 하는 데가 여럿 있다. 남해군이 고려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장소를 고현면 일대로 보고 물증을 찾기 위한 작업이다. 남해에 대장경 새기는 사업을 맡았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설치돼 있었음은 사실로 인정된다. 지금은 분사대장도감과 대장도감이 다르지 않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대장경 판각은 최씨 무인정권이 대몽항쟁을 위해 밀어붙인 당대 국책사업이다. 최씨정권이 남해에서 판각 사업을 진행했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남해는 몽골 침략에 따른 직접 피해가 없는 지역이다. 둘째 남해안 한가운데에 있고 섬진강이 가까워 수운에 이점이 있었으며 셋째 최씨 집안이 식읍으로 갖고 있었던 진양과 가깝고 또 집권 최우의 아들 만전·만종도 가까운 쌍봉사(전남 화순)·단속사(산청) 주지여서 물량 동원이 쉬웠다. 또 남해에는 대장경 판목으로 쓰인 후박·비자나무 등이 자라는 지대이며, 대장경판을 찍어내는 데 쓸 닥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도 자생한다.(천연기념물 제152호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

남해군이 대장경 판각지로 짐작하면서 발굴을 진행하는 장소는 전(傳)선원사터·전관당성지·전망덕사지·안타골유적지 네 곳인데 직접 물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대장경 판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건물(터)이나 물건은 꽤 확인됐다. 전선원사터는 최우의 처남 정안(鄭晏)이 세운 정림사 자리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사>를 따르면 그이는 최우가 권력을 휘두르자 자기한테 화가 미칠까봐 남해로 물러나 살았으며 재산을 내놓고 나라와 약속해 대장경을 반분하여 간행했다. <삼국유사>를 쓴 보각국사 일연의 비문에는 또 "을유년(1249)에 정안이 남해 사제(私第)를 사찰로 삼아 정림사(定林社)라 하고 일연에게 주지를 맡아달라 청하였다"고 적혀 있다.

남해군에서 대장경 판각과 관련된 인물이 묻혔으리라고 본 남치리 '고려'분묘군은 '엉뚱하게도' 백제 귀족 무덤으로 판명되면서 또다른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 1월 9일 공개된 이 무덤은 6세기 전형적인 백제계 석실묘로 백제 고위 관료들이 쓰던 은으로 만든 머리 장식품인 은화관식이 출토됐다. 여태까지는 남해가 한때 가야의 일부였다가 신라로 편제됐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로 말미암아 어느 시점에는 백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됐다.

◇〈구운몽〉 탄생 배경 '유배'

남해 외딴 섬 남해는 전통시대 유배지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130명가량이 남해에서 귀양을 살았고 이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만도 30명에 이를 정도다.

이 가운데는 안평대군·양사언·한석봉과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꼽히는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도 있다. 중종 기묘사화(1519) 때 개령에 유배됐다가 죄목이 추가되면서 남해로 옮겨져 1531년까지 13년 동안 남해 노량에서 살았다. 남해찬가(南海讚歌)라 할 수 있는 화전별곡(花田別曲, 화전은 남해 별명)을 경기체가로 지었고, 이 별곡에는 삼남 일대와 남해 사람들의 실명도 나온다.

가장 이름이 높은 이는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다. 김만중은 1689년 다시 남해에 유배돼 여기서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썼고 남해에서 92년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쓴 구운몽은 불도를 닦던 성진(性眞)이 여덟 선녀와 노닌 죄로 인간세상에서 양소유(楊少遊)로 태어나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고 입신출세해서 갖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깨어보니 꿈이더라는 내용이다. 김만중은 또다른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도 썼다.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인 숙종을 일깨우려는 목적소설이다.

남해읍 유배문학관.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 1718~?)도 있다. 그이는 남해에서 귀양살이하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을 1773년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으로 펴냈다. 남해 귀양 직전 홍문관 부수찬이던 유의양은 한글로 쓴 문견록을 통해 남해의 문화유적과 명승절경·세시풍속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남해읍에는 남해유배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유배 형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은 한편으로는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 이기게 하는 힘을 인간에게 질러주기도 했다. 유배문학이 성립되는 실질 배경이라 하겠다. 남해유배문학관은 전통시대 남해로 귀양온 이들의 삶과 문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배문학 전반까지 잘 다루고 있다.

◇죽방렴·다랑논 낳은 자연환경

남해 자연 환경은 어부림·석방렴·죽방렴·다랑논을 낳았다. 어부림은 삼동면 물건리에 있다. 천연기념물 공식 명칭은 물건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附林)이다. 어부림(魚附林)은 고기를 붙이기 위해 바닷가에 만든 숲이다. 고기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거기서 쉬거나 자는 고기를 잡는다. 또한 마을에 바닷바람이 바로 닥치거나 해일(海溢)이 덮치지 않도록 막는 방조(防潮)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숲에서는 고기만 쉬지는 않는다. 일에 지친 백성들도 여기 숲에서 쉬고 놀았다.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

석방렴은 원래 돌살 또는 독살이라 했다. 바다 움푹 들어간 데에다 둥글게 돌담을 쌓아 밀물과 함께 들어온 고기를 썰물 때 빠져 나가지 못하게 가둔 다음 잡아내는 전통 고기잡이 방법이다. 남해 남면 홍현마을에 가면 볼 수 있다. 홍현마을에서는 호잇 호잇 소리를 내며 물질을 하는 해녀도 보인다.

또 죽방렴은 남해본섬과 창선섬을 잇는 지족해협에 많이 있고 창선섬과 삼천포 사이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면서도 여럿 볼 수 있다. 지족해협은 이순신 장군 명량해전으로 이름높은 울돌목 다음으로 해류가 빠르다. 이처럼 물살이 센 장소에다 물이 흘러오는 쪽으로 아가리를 벌리게 해서 안으로 들어온 고기를 가두는 방법이다. 지금은 기둥을 쇠로 만든 커다란 빔을 꽂아 만들지만 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를 썼고 지금은 그물을 써서 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옛날에는 대나무로 만든 발을 썼다고 한다.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전경. /김훤주 기자

다랑논도 남해 자연환경이 낳은 독특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보통 논이라 하면 원래부터 그러한 모습으로 갖춰져 있었다고 은연중에 여기지만 논이나 밭에는 인간의 노동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다. 수평을 맞춰 땅을 돋우거나 축대를 쌓아 붙이고 두렁을 만드는 한편으로 안에서는 또 돌과 바위를 골라내야 했다. 평야지대에서도 논과 밭은 사람들에게 이런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데 바닷가 층층이 바위가 절벽처럼 가파르게 이어지는 남해에서는 더 말해 무엇했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에 구경나와 아무 생각없이 '우와!' 탄성만 내지르기 일쑤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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