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78) 통영별로 44회차

지난주 입동을 넘겼으니 이제는 겨울 준비를 서둘러야겠습니다. 오늘 걸을 통영별로 옛길은 대체로 3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지만, 풍정에서 대곡리 한실마을로 이르는 구간에는 산자락과 충적지의 접촉지대를 따라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부자유친의 감동을 전하는 고자치

오늘은 사천 성황당산 아래로 귀양 온 왕욱과 그 아들 현종에 얽힌 이야기를 살피면서 시작합니다. 현종의 어머니 황보씨가 왕욱이 사수현(泗水縣=사천)으로 유배 간 뒤에 아이를 낳다가 죽자 성종은 유모를 뽑아 어린 아이를 기르게 하다가 종국에는 유배 가 있는 아버지 가까이서 자라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사는 것은 허락지 않아 왕욱은 유배지 가까운 정동면 장산리 배방골(뱅아골)에 있던 배방사(排房寺)에 기거하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5년을 하루같이 배소에서 절을 오갔습니다.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돌아보곤 하던 고개를 고자치(顧子峙) 또는 고자곡고개라 불렀다는 지명 생성설화가 전해집니다. 부자유친을 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오래전에 지난 수원 경계의 지지대 고개에 얽힌 사연에 버금가는 감동을 전해줍니다.

효자 전설이 전해져 오는 사천시 정동면 풍정리 풍정숲 자리를 지나면 대곡리 한실마을숲에 이른다.

<고려사> 안종 왕욱 열전에 이어지는 내용을 살피면 그는 풍수지리에 능한 듯합니다. 왕욱은 훗날 현종이 된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며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술사에게 주고 사수현 서낭당의 남쪽 귀룡동(歸龍洞=니구산 남쪽 사남면 구룡리 일원)에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종 15년(996) 왕욱이 귀양지에서 죽자 당시 여섯 살 현종은 유언대로 장사지내고 이듬해 개성으로 돌아갑니다. 목종에 이어 왕이 된 현종은 8년 뒤인 1017년 4월에 무덤을 건릉으로 이장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때 왕욱을 장사 지낸 곳이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인데, 제대로 발복을 하였는지 훗날 아들은 고려 8대 임금 현종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태 전부터 사천시 후원으로 정동면 소곡리 소곡유원지에서 '고려 현종 부자상봉 기념 음악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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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을 나서다

사천읍성을 나서 읍내로를 따라 동쪽으로 길을 잡아 조금 걸으니 도로 확장으로 드러난 비탈에 돌로 쌓은 시설이 있어서 살펴보니 성벽이 잘린 흔적입니다. 사천읍성의 동성벽으로 여겨지는데, 그러하다면 읍성은 현재까지 파악된 것보다 규모가 더 크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난봄에는 성벽이 잘린 채로 비탈이 드러나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았을 때는 아래로 옹벽을 쳐서 더 이상 붕괴를 막을 조치는 했지만 성벽은 어떻게 마감할지 걱정입니다.

성벽 마감을 고심하며 길을 재촉하니 멀지 않은 곳에서 사천중학교와 자영고등학교를 지나 동남쪽으로 고성으로 이르는 33번 국도와 만납니다. 여기서부터는 외길인데, 옛길은 산자락을 등지고 자리 잡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습니다. 이름도 정겨운 옥새미(옥정玉井) 마을 들머리에는 건포구나무라 부르는 300살 넘은 팽나무가 우뚝하니 서 있습니다. 예전에는 화암리 여옥 옥정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던 당산나무였지만, 지금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옥정 다음 마을도 같은 정자 돌림인 풍정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풍정숲

<한국지명총람>9(경남편 Ⅱ)에는 물이 풍부한 우물이 있어 풍정(豊井)이라 했다는 마을 서남쪽에 경관 좋은 마을숲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아무리 살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삼성아파트가 들어선 곳으로 여겨지는데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12살 소년 최두남(崔斗南)의 출천지효(出天之孝)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풍정숲에 피란해 있다 왜적에게 사로잡혀 선진리의 둔진으로 끌려갑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그들이 술 취해 잠든 틈에 도망쳐 풍정숲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버지를 구완한 효행으로 15살 되던 해에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숲이 사라지면서 효행도 살필 수 없게 되었지만, 맞은 편 길가에는 최효범의 처 강릉 김씨의 열행비가 세워져 있어 옛길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뒤에 단기 4255년에 세웠다고 적었는데 그때가 일제강점기인 1922년이니 빗돌을 세운 분들의 강단이 여간 아닙니다.

한실마을숲

열행비에서 옛길은 산기슭과 충적지의 접촉지대를 따라 신기마을을 거쳐 한실마을숲을 지나 대곡리의 중심 마을인 한실(대곡大谷)마을로 듭니다. 간간이 참나무류 활엽수가 섞여 있긴 하지만 거의 소나무 단일 수종입니다. <마을숲>에 주민의 제보를 토대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풍수상 마을과 숲이 '키 형국'이라 마을 앞을 막아야 한다" 해서 조성했습니다. 마을의 부가 키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막기 위한 비보림으로 조성된 셈입니다. 실제 마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뒤로 길고 큰 골짜기가 있어서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내가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바깥으로 나가므로 골안 기운이 빠져 나간다고 여긴 것이지요. 약 300년 전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 마을인데 한동안 갖가지 재난이 잇따르자 약 200년 전에 풍수적 비보책으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했다고 전합니다. 숲을 구성하는 소나무는 껍질과 속살이 붉은 적송(赤松)인데, 곰솔조경 박정기 대표는 중부 지역에서는 조선솔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일러줍니다. 솔이 벽사와 정화의 의미로 금줄에 사용되는 데 견줘보면 예전 한실분들 그야말로 비보 한 번 제대로 했다 하겠습니다.

사이사이 덩치 큰 소나무에는 몸통에 볼썽사나운 흉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던 1940년대 초반 송유(松油) 추출을 위해 송진을 받아낸 자원수탈의 흔적입니다. 1941년 8월 미국이 자국에서 수출하는 석유가 전쟁 연료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석유 대체 원료를 우리나라 곳곳에서 강제 수탈했는데 그 대표가 바로 송진이었습니다. 채취한 송진으로 만든 송유(테레빈유)는 가솔린을 대신해 항공기 연료로 쓰였습니다. 송진은 우거진 솔숲이면 어디서든 채취하였는데, 대개 송림이 잘 보호된 사찰 부근 소나무에 그런 흔적이 많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언양의 가지산 석남사가 대표적이고, 같은 산자락에 들어선 청도 운문사도 그러합니다. 김천 직지사나 해인사 소리길에서도 송진을 채취한 'V'자 홈을 볼 수 있고, 2007년 함양 안의면 신안리 거함대로 용추입체교차로 공사에 앞선 문화재발굴조사에서는 송탄유굴(松炭油窟=송유를 뽑아내던 가마) 8기가 확인되어 일제가 자행한 다양한 자원수탈을 증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숲을 거닐며 숲을 조성한 이들의 지혜와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자원수탈의 자취를 살피고, 한실마을을 돌아나온 길은 다시 33번 국도와 겹치며 감곡리에서 뻗어나온 구릉 부웅더미를 안고 돕니다. 사천천의 공격사면에 형성된 바위벼랑에 혹여 비리길이라도 있을까 살피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모롱이를 돌아 처음 드는 마을이 장산리 건점인데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예전에 주막이라도 있었을 듯 싶어 자료를 뒤져보지만 그다지 신통한 정보가 없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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