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은 TV도 안 보고 신문도 읽지 않지만 사람과 책은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지난 8월 말 경남도민일보를 방문했을 때 배낭 안에는 책이 들어 있었고, 9월 초 내가 양산을 방문했을 때도 여러 책을 자랑했다.

그 때 내가 썼던 <토호세력의 뿌리>를 말씀 드렸더니 꼭 구해보고 싶단다. 그래서 9월 23일 세 번째 만날 때 그 책을 드렸더니 역시 기뻐하신다. 된장찌개와 보리밥으로 함께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이 책 읽어봤습니까?"라며 불쑥 건넨다. 그의 친구 박이엽 선생이 번역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비)라는 책이었다. 표지를 열어보니 번역자의 부인 서명이 있다. 그래서 "내가 서명까지 있는 이 책을 가져가면 됩니까"라며 사양하려 하니 "다음에 올 때 가져오면 되지"하며 극구 읽어보라 주신다.

헤어질 땐 또 한 권의 책을 더 주신다. 임락경 목사가 쓴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은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홍성사).

만날 때마다 밥과 술을 사주려 하고 헤어질 땐 다시 만나자고 해주시는 분. 독재치하에서 해직되고 탄압받던 사람들을 남몰래 도왔던 이야기를 꺼내면 "그저 사람을 좋아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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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거처./김구연 기자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채 이사장이 최근 또 한 사람의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이자 언론운동가 성유보(71) 선생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한 것이다. 채 이사장이 1935년생이니 고인보다 여덟 살이나 위지만, 그는 나이로 선후배를 가리지 않는다. 많거나 적거나 좋은 사람이면 그냥 친구다.

채 이사장은 서울에서 친구 성유보의 장례를 치른 후 나흘 만에 양산에 돌아와 있었다.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오랜 친구를 잃어 마음이 좀 안 좋으시겠습니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친했어요. (한겨레) 편집위원장 그만 둔 뒤로 늘 임재경과 함께 어울렸죠. 그래서 '어린 놈이 지 맘대로 먼저 죽는다'며 우리끼리 그랬어요. 사실 4~5년 전에 심장수술을 받고 나선 몸이 안 좋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가버린 게 잘 됐는지도 몰라요. 살아있는 내 마음이 그런 거지, 오래 고생하다 가는 것보다는 다행이지요."

-리영희 선생도 가셨고, 이렇게 가까운 분들이 떠나시면 많이 서운하시죠?

"죽는 사람이 있어야 새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 거요. 모든 생명이 다 그래요. 늙은 별이 폭발하여 새 별이 생기듯이 종말이 있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요."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이사장님에게 죽음이란 뭘까요?

"죽음이 불안과 공포라는데, 사는 것 자체가 불안과 공포 아니요? 죽음이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쉰다는 것이죠. 하긴 게으르게 산 사람도 좀 쉬어야지. 순환, 뭐 그런 게 아니라도 죽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니까. 나이 많은 사람에겐 빨리 못 갈까봐 걱정이죠."

그는 '빨리 못 갈까봐 걱정'이라 했지만, 시대의 어른으로서 세상을 향한 그의 쓴소리를 오래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도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 채현국의 삶과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다시 그의 청년 시절로 돌아 가보자.

아버지와 함께 기업을 일으키다

중앙방송(현 KBS)을 박차고 나온 27세의 청년 채현국은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강원도 탄광에 합류하기로 한다. 그러나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하필 그 때 아버지의 탄광은 부도 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막 오늘 부도나는 것처럼 되어 가더라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했어요. 친구한테 우리 아버지 부도난단다. 돈 좀 꿔다오. 그랬더니 친구가 막 웃어. 너는 이 자슥아, 둘 중에 하나만 말해야지. 돈 좀 달라고 하든지, 부도난다는 말은 안하든지. 부도가 나면 이 새끼야 돈 꿔달란 말은 안해야지. 그래서 내가 너한테는 사실대로 말하지 너를 어찌 속이노 했지. 막 웃으면서 오라고 해 마침. 그래가지고 그날로 조금 모자라지만 난데없이 막았어요."

-그때 제일 큰 도움을 받은 친구가 누구였습니까?

"한 명이 아니라 참 여러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지요. 결국 부도가 나는 건 마지막 가서 몇 푼 안 되는 돈이 걸려들거든. 아예 안 되는 큰돈이라면 그건 안 되는 거죠 뭐. 낙청이 어머니한테 도움을 굉장히 받았어요."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누구라고요?

"백낙청 교수 엄마한테서 도움을 굉장히 받았어. 낙청이 어머니가 나를 아주 좋게 생각했어요. 사실 병원 돈을 빌려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따지고 보면 공금 횡령 아닙니까. 자기네 병원이지만 법인체니까. 그러나 급한데 어떻게 합니까? 수표 안 끊는 사람은 도대체 그 (절박한 상황을) 실감 못합니다. 아버지 감옥 간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것이 360% 이자를, 세상에 3할 이자니까, 월 이자가 30%에요."

-백낙청 어머니한테도 그렇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런 돈을 이자 놓을 사람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그렇게 고리로 빌리고, 마지막 그냥 급한 것 끝을 마감해 준거지."

-그렇게 해서 함께 탄광사업을 하다 73년도에 사업을 정리하기 전까지 아버지 채기엽 선생의 역할과 이사장님의 역할은 어떻게?

"아버지는 사장이라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하는 회장이고, 그냥 노시기만 하면 됐죠. 가끔 탄광에 내려가시기만 하면 돼." 

채현국 이사장의 부친 효암학원 설립자 채기엽 이사장./효암학원 제공

 

-실질적으로는 이사장님이 사장 역할을 다 했네요?

"그럼, (아버지는) 연세도 있고…. 그게 다 내 꾀죠. 철학과 나온 놈이 돈 잘 번다는 게 자랑일 건 없잖아요. 장사꾼으로서 해야 할 일은 야,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잖다 그런 식으로 했지. 사실 (아버지 말이 아니라) 내 말이지 전부. 뭘 아버지가 물어나 보나. 또 실제로 아버지한테 얘기를 해도 당연히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아버지가 하라는데 어떻게 하냐? 그러면서 했지. 왜 (아버지가 탄광에) 안 내려갔느냐면 자꾸 또 새롭게 큰일을 벌였거든." 

-아버지가?

"또 자꾸 (사업체를) 차려요 자꾸. 차리면 또 내가 해야 하고, 또 차리면 해야 되고, 사람 보내야 되고."

-아버지께서 천부적으로 그런 사업가 기질이 있었던 건가요?

"그건 천부적입니다."

-탄광 말고 또 아버지가 차린 것이?

"조선소, 농장, 또 임야에 식목하는 것. 농장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 말고도 대형 묘포장이 있어서 몇 천만 평에다 나무를 심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해운회사 그리고 또 화학공장."

-해운회사나 화학공장은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흥국이에요. 흥국."

-흥국해운?

"흥국해운, 흥국화학 비닐공장 뭐 이런. 또 염전도 했고."

-조선소는 이름이 뭐였습니까?

"흥국조선. 흥국흥산이라 그랬어요."

-흥산?

"그게 일본식 말이거든요. 흥산이란 말이 산업처럼."

-조선소는 어디 있었습니까?

"충청남도 제일 끝에 있던 장항. 군산 바로 건너편이고 금강 하구인데, 실제로 진남포도 아니고 인천은 더군다나 아니고, 1000톤 넘는 철선이 진수한 곳은 장항이 최초입니다. 우리가 최초로 1000톤 넘는 배를 두 척이나 한꺼번에 진수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가 배 짓는 개념이 별로 없을 때 1000톤짜리 컨테이너 전용선을 두 척이나 했죠." 

-아버지가 그런 사업을 계속 해나가신 것이 아버지 연세 언제쯤이었습니까?

"뭐 끝까지입니다. 상상력이 끝이 없어요. 내가 (사업을 다 정리하고) 돈 다 돌려준 다음엔 아무 것도 안하셨지만, 그 땐 내가 끊임없이 돈을 만들어 내니까 자꾸 하시는 거죠. 벌여놓으면 또 내가 다 막아야 하고…."

-그러면 사업을 정리한 73년 이후에는?

"아무 것도 안하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내가 자꾸 막아주니까 자꾸 벌인 거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한마디 하면 덜커덕 벌여놓고…."(웃음)

-그러면 이 사업들을 탄광 말고도 조선소, 화학회사 이것을 계속 키워나갔으면 삼성이나 LG처럼 성장했을 수도 있겠네요.

"큰 재벌이죠. 그 정도가 아니고요. 여기만 해도 땅이 30만 평입니다. 그게 평당 100만 원이면 돈이 얼마요?"

젊은 시절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효암학원 제공

 

우연한 기회에 아접(芽椄) 기술을 개발하다

-30만평 그건 농장이었습니까?

"농장이고 산이고 바로 목장입니다. 목장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젖소 목장을 해가지고 400두였던가? 젖만으로 흑자 낸 첫 번째 목장입니다."

-젖? 우유?

"새끼 말고 우유만으로도…. 새끼 낳는 것은 순이익이고, 우유만으로도 적자는 아니고 조금 남았어요."

-그 목장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도 흥국농산인가? 흥국목장인가? 뭐든지 흥국이야."

-흥국은 무슨 뜻입니까.

"나 잘 되라는 소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내 이름이 현국 아닙니까? 현국이라 흥하라는 뜻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붙인 거죠. 큰 아들 자살하고 나니까 아들놈 또 잘못될까봐."(웃음)

-묘포장에선 뭘 했나요?

"어느 해부터 농촌에서 밤도 안 따고 잣도 안 딴다는 기사가 나기 시작했죠? 노임이 안 되어 가지고…. 그 말이 바로 우리 회사가 아접(芽?·가지 대신 눈을 떼어 접을 붙이는 방법)을 개발해서 씨에 눈이 트이자마자 묘목에 접붙이면 그해에 벌써 잣도 맺히고 밤송이도 열립니다. 그게 보급되어서 호두 잣 밤이 많이 열리니까 노임도 안 된다고 안 따기 시작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묘목입니다. 전국에 보급했죠. 그거 3년 지나면 다 열리는 것들이거든. 우리는 산에서 식량문제 해결하자는 게 제가 늘 아버지한테 했던 소리거든. 어떻게든 기본적으로 굶어죽지 않는 것은 산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죠.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덜커덕 용인에다 묘포장을 크게 시작한 겁니다."

-그걸 어떻게 개발한 건가요?

"간단합니다. 물가에 모래밭 황무지로 되어 있는 땅을 둑을 쳐서 저수지를 막았잖아요. 그걸 사가지고 돼지와 닭을 키우는 겁니다. 여기 양산의 30만 평 우유목장도 마찬가집니다. 여기도 소 키우며 그 똥을 밭에 이리저리 자꾸 퍼주는 겁니다. (묘포장도) 돼지와 닭을 키워가지고 거름을 넣어만 주면 됩니다. 이건 순전히 내 상상력과 아버지 상상력을 합친 건데, 그러면 좋은 땅이 됩니다. 거기다 묘포장을 한 겁니다. 그 땅이 물도 더 잘 빠지고 거름 효과도 좋고 제일 잘됩니다. 거기다 비닐 온실 지어 아접 붙이는 작업 하고, 그렇게 해서 대성공을 했는데요. 그것도 또 우연히 일이 잘 될라 하니까, 농업기사가 대학 나온 엔지니어입니다. 농림부에도 있고 묘목장에도 있었던 사람인데, 부모가 초상이 나가지고 간 나흘인가 닷새 사이에 습기 조절을 안 했던 겁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며 난리를 치며 문을 열고 보니까 접붙인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거든? 전혀 배운 것과 다르잖아요. 그래서 저걸 습기를 괜히 뺐구나. 한번 빼지 말아 봅시다. 생생한데 왜 빼요. 또 닫았어. 그렇게 해서 관찰해보니 85%가 살아. 18%밖에 못 살던 것들이…. 그동안 습기 빼는 건 일본에서 하는 걸 그대로 하고 있었거든요. 그 때까지 일본이 18%밖에 성공을 못했다고 그래요. 일본 놈이 잘못한 거야. 이론에만 따라서 하고 실험은 못한 거야. 우리는 실수로 이걸 알게 됐지. 거의 90%가 살았어. 죽은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동안 18% 생존 가격으로 되어 있던 묘목 값이 확 떨어진 거지. 이까짓 거 값 싸져봤자 밑질 게 없어. 원래 이익 보려고 한 것도 아니고. 보급하려고 한 거니까."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재미있는 발견이네요. 그 때가 언제쯤이었나요?

"68년, 69년, 70년 그 때 묘목 값 조사해보면 나옵니다. 호두나무만 대성공한 게 아니라 잣도 아접이고 밤도 아접이거든. 우리가 아접 기술을 상업화 한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묘목 값이 싸진 겁니다. 내가 여기 학교에서도 자꾸 (열대 식물에 대한) 내한성 실험을 하려는 이유도 그겁니다. 됩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내 가설이 이겁니다. 쌀을 가지고 북진하고 동진을 했는데, 쌀은 원래 더운 지방에 있는 건데, 그걸 가지고 양자강까지 도착했다가 양자강에서 황하까지 도착하는 데 한 이천년 걸립니다. 실험이란 걸 모르니까. 그래서 BC 3·4000년 전에 황하 강가에 쌀이 나타나고. 그게 국가의 시작입니다."

실제로 채 이사장은 양산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 교정 곳곳에 열대 식물을 심어 내한성 실험을 하고 있었다. 황실나무, 종려나무, 유자나무, 백년초는 물론 바나나도 있다. 바나나 나무는 탐스런 바나나 열매를 맺었다.

번창하던 기업과 부동산을 모두 정리하다

-용인과 양산에 있던 묘포장과 농장은 지금 어떻게 됐나요?

"그것도 다 팔아가지고 광부들한테 다 줬죠. 그걸 안 팔고 뒀으면 치사하게 내가 거기에 묶여가지고 또 돈을 벌게 돼요. 놔두면 백번 이득이 되는 줄 알아도 그냥 팔았어."

-아니 그런데, 흥국탄광하고 다른 기업들은 법인이 엄연히 다른데 그런 것까지 다 팔아서?

"다르거나 말거나 다 탄광에서 벌어서 나온 건데. 그런 이치를 따지면 남 못 돌려줘요. 몫도 한 몫만 먹고 두 몫 안 먹는 이유가 그랬어요. 나도 따로 한 몫하고 싶었지만, 그러다보면 못주게 됩니다."(하하)

-조선소나 화학회사나 해운회사 그런 것도 다 그런 식으로 정리하신 겁니까?

"뭐든지 다 팔았어. 염전이든 뭐든지 다 팔았어요."

-그것도 탄광 정리하는 것처럼 거기도 각각 종업원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거기 종업원도 줄 거 다 주고. 사실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씩 다 줄여온 겁니다. 왜냐면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 내린 것 때문에 스트라이크 하려고. 그냥 나눠주는 것만 목적이 아니고…. 그 때 상황에서 돈을 더 벌려고 하면 박정희 하고 사실은 동업을 해야 할 판이야.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깬 겁니다."

이 대목은 이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하려 한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박정희 정권과 유착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래서 미련 없이 사업을 접었고, 정리한 재산은 모두 종업원들과 나눴다.

앞서 "한 몫만 먹고 두 몫 안 먹는…나도 따로 한 몫하고 싶었지만, 그러다보면 못주게 됩니다"라는 말은 자신 몫의 재산을 따로 떼지 않고 모두 아버지 몫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탄광에 가장 종업원이 많을 때 몇 명이나 됐습니까?

"한 2000명? 탄광이 두 군데, 세 군데였거든."

-그런데 조선소나 해운회사나 이런 데도 종업원이 많았을 것 아닙니까?

"거기도 넘길 사람을 다 구해가지고 (고용 승계하여) 종업원 다 데리고 일하라고 줬습니다. 종업원한테 대접할 것 다 하고 (회사) 끌고 가라고 했죠. 상무한테…."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그렇게 다 정리하고 나니, 이사장님 몫으로는 전혀?

"아무 것도 없지. 아버지 줘버렸으니까. 서(庶)동생들하고 살아야 하니까. 내 몫이라 하고 다 줬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흥국탄광, 흥국흥산, 흥국화학 같은 큰 기업이 어느 날 없어졌는데, 그걸 주목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보도하는 언론은 없었나요?

"정리하는데 한두 달 걸렸지. 소리 소문 없이 그냥. 남들은 내가 부잣집 아들이라서 친구 잘 못 사겨 망했는가 보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겠지." 

-그 당시엔 망했나보다 정도?

"그 정도로 생각하겠지. 나눠준 줄은 잘 모르지. 사실 나눠준 게 아니라 주인한테 돌려준 거니까. 나눠줬다 말도 안하니까."

-그때 그렇게 정리하자고 했을 때 아버지 채기엽 선생은 뭐라고 하셨나요?

"아버지는 내가 못하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내가 안 할랍니다 하는데 더 할 말이 없지."

흥국탄광과 박윤배,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

-근데 탄광에서 도계광업소장을 박윤배 씨가 오랫동안 하셨죠?

"뭐 오래했죠. 그럼요. 그 중간에 (학교 다닐 때) 우리 선생님 했던 양반이 못 먹고 살아가지고 탄광에 가 계시라고 했거든. 밥만 자시라고 보냈는데, (박윤배가 그 선생님을 보니) 자기도 제자거든. 선생님이 (탄광에) 오니까 선생님께 소장을 하시라고 한 거야. '제가 이렇게 말하면 생각해 보겠다 하고, 제가 또 이렇다고 보고하면, 아이고 고맙다고 잘됐다고 그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이러면서 소장 자리를 선생님에게 준 거야. 그래서 한동안은 박윤배가 소장이 아닌 것처럼 됐지만 실제로는 박윤배가 소장이야. 오래한 거지."

-박윤배 소장도 이사장님이 처음 탄광에 합류하던 62년부터 하신 겁니까?

"아니요. 좀 늦게 내려갔습니다. 66년? 65년쯤부터…. 가서 얼마 안 있어서 소장을 했죠."

-정리할 때까지 같이 계셨습니까?

"그럼요. 끝까지 같이 있었지. 그 친구가 돈 벌어주는 주역을 했는데…."

-당시 탄광에 시국사건으로 숨어든 사람도 많았다면서요?

"난 안 물어봤어요. 내가 이름을 몰라야 안 불지. 그래서 그랬어요. 나에게 이름 말하지 마라. 이 다음에 내가 이름 불었다고 후회할 놈은 아예 이름 말하지 마라. 나 알면 분다 그랬지. 김정남이 알죠? 김영삼 밑에서 민정수석한 정남이를 정남인줄 몰랐어요.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다음에 김정남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았네요?

"후배고, 얼굴은 잘 알죠. 이름은 몰라요. 이름 몰라야 못 불지. 이름 알면 어떻게 안 불어. 그건 거짓말이에요. 맞아 죽더라도 모르니까 못 부는 거지."(웃음)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탄광에 직접 와서 취직을 하거나 탄광에 있었던 사람도 좀 있었다면서요?

"좀 아니고 여러 놈."

-혹시 그때, 탄광에 와 있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중에 이것저것 한 놈들 많죠. 가령 손학규만 해도 지 친구들을 우리 탄광에 보내요. 나하고는 만난 적이 없고…. 그래서 지금도 손학규는 내가 흥국탄광 주인인지 모를 지도 몰라요. 딴 사람으로 알고 있을 수 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장일순 하고도 그렇게 만나도 내가 흥국탄광 주인입니다 라고 말한 적은 없으니까."

-장 누구요?

"무위당 장일순."

찾아보니 장일순(張壹淳, 1928-1994년)은 사회운동가이며 한살림 운동을 창시한 생명운동가였다. 

-손학규가 직접 온 건 아니고, 손학규 친구를 탄광에 보냈다고요?

"지 동창들, 지 친구들하고. 박윤배가 경기고 출신이고 이종찬이 경기고 아닙니까. 손학규도 거기 출신이고 그러니까 그리로 자꾸 보내요."

-박윤배를 통해서?

"박윤배도 안 통해요. 그냥 오면 이선휘라고 우리 노무과장이 있었어. 나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나온…. 그 새끼한테 오면 (누가 왔는지 그런 건) 안 물어봐 물어보면 골 아프니까."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그 노무과장을 통해서?

"노무과장을 통해서 그냥 들어오니까. 노무과장이 사람 뽑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임재경 선생이 쓴 글을 보니까 70년대 말에 박윤배와 종로1가에서 흥국통상이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했다고 하던데….

"어 했지. 그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3년 4년 지나고 가만히 있던 중 내가 또 돈을 어디 감춰둔 걸로 알고, 다 먹고 살라고 준 건데, 이것들 세 개가 모여가지고 날 또 회장해달라고 합니다. 회사 셋이 뭉쳐가지고…. 화학회사 하나, 탄광 하나, 무역회사 하나, 이 세 개가 한데 합쳐서 날 또 회장하라고. 나 돈 없다 임마! 너희들이 해결해라고 했지만, 이제 병이 좀 나앗으니…."

-그때 무슨 병을?

"아주 허리가 꼬부라질 만큼 위궤양을 심하게 앓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보니 폐에 이만한 게 두 개나 있대요. 난 남도 다 그렇게 괴로운 줄 알았지. 폐결핵을 그렇게 오래 앓았으니까 밤낮 진땀나고 미열 나고, 죽을 지경인데. 난 실제 남도 그냥 일 좀 하면 그렇게 괴로운 줄 알았습니다. 폐결핵 때문인지 모르고. 그러니까 밤낮 골골했죠. 남도 그런 줄 알고 일한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또 안 죽고 나았어요. 위궤양 때문에 알았어요. 약도 안 먹었는데 잘 나았어. 이런 사람은 나중에 늙어 죽을 때 또 폐결핵이 생길 수 있다고 하거든요."

-어쨌든 그 세 개 회사를 통합해서….

"통합해가지고 또 내가 회장이야. 화학, 탄광, 돈 주고도 또 광업권도 줘서 너희들 해 먹고 살아라 했는데. 거기 인수한 회사에 간부들이 있기 싫어하니까. 내가 심지어 거기 소장으로도 가줬는데?" 

-아, 전에 흥국탄광에 있던 간부들이 또 탄광을 새로 설립해가지고?

"예 탄광에 있던."

-그래가지고 흥국통상을 76년 정도에 설립했겠네요?

"그렇죠. 75년인가 76년인가? 회사는 다 그전에 있던 건데, 세 개를 합쳐가지고."

-그게 종로1가에 있었습니까?

"예예. 그니까 임재경이는 유학댕기고 영국도 댕기고 그래가지고 그런 과정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지나간 거 얘기 잘 안하니까. 전부 그게 뭐 군사독재 미워가지고 한 일들이 있어서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되니까."

-그건 언제까지 운영하셨습니까, 흥국통상은?

"그게 또 내가 병이 났어요. 79년까지 가는가 그래요. 병이 나가지고 100% 다 물려줘버리고."

-누구한테?

"아까 노무과장했던 친구. 말만 노무과장이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다 동기입니다."

-임재경 선생이 쓴 글에 보니까 이계익, 이종구, 황명걸 같은 해직기자들한테 이사장님이 술을 자주 사주고 했다던데….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니까."(웃음)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실제 언론인 임재경은 2008년 <한겨레>에 쓴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긴급조치 말기) '창비' 말고 근방에 내가 자주 들르던 곳은 종로 1가에 무역회사(흥국통상)를 차린 '파격' 채현국-'호협' 박윤배의 사무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셋, 이계익(동아일보 해직, 교통부장관 역임), 이종구(조선일보 해직, 무역협회 상임이사 역임), 황명걸(동아일보 해직, 시인)의 딱한 사정을 잘 아는 터라 해직 기자라면 누굴 만나도 으레 밥과 술을 사주었다. '동아' 해직 기자 양한수는 몇 해, '조선' 해직 기자 문창석은 몇 달 그 무역회사에서 일도 했다."

임재경의 글에는 <창작과 비평>을 도운 일이나 친구들에게 집을 사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가깝게 지내는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 백낙청이 미국에 가 있을 때 <창작과 비평>의 제작비는 발행을 맡았던 신동문(시인·전 신구문화사 상무·작고)이 꾸렸으나 편집책 염무웅은 원고료를 조변할 방법이 막막하여 자주 채현국을 찾아가 급한 불을 껐다. 채현국은 김상기와 서울대학 철학과 동기이며 한때 문학과 연극에 뜻을 두어 공채 1기로 KBS에 입사할 만큼 예능 열정이 대단했다. 그러나 부친(채기엽·흥국탄광 창설자)을 돕기 위해 사업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정 연료의 주종이 연탄이었던 60년대에 채기업-채현국 부자의 탄광은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커졌다. 그는 맘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 모두 어려운 시절의 미담이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채현국의 도움으로 내 집을 처음 마련한 언론 종사자 넷의 이름을 들겠다. 황명걸(<동아> 해직기자·시인), 이계익(<동아> 해직기자·전 교통부장관), 한남철(소설가·전 <월간중앙> 기자·작고), 이종구(<조선> 해직)가 곧 그들이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흥국탄광에서 일했던 친구들 중 집 장만 하는데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은 숫자가 훨씬 여럿이다. 남 집 사주는 이야기를 하다 빠뜨릴 뻔했는데 집은 아니더라도 부지기수로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이 바로 나다."

-흥국탄광을 운영하고 있을 때 입니까?

"예. 다 그때 일이지요. 그런데 (임재경이가) 리영희도 같이 술 먹은 건 빼놨네. 남이 뭐라 할까봐 자기 친구만 적은 거야. 허허허."

-그리고 집 사준 사람이 황명걸, 그리고….

"(정색을 하며) 그건 쓰면 안 돼."

-이건 임재경 선생이 다 써놓은 겁니다.

"그래도 쓰면 안 돼. 남이 헛소리 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또 나오면 안 돼."

-그리고 백낙청 씨가 미국에 가 있을 때 가 있는 동안, 창작과 비평 제작비를 이사장님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던데?

"그런 말도 나가면 안 돼."

-이후 1988년 박윤배 씨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88년 그해 3월에 돌아가시고….

"희한하게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그해 (박윤배가) 죽었다고…."

-선친 묘소는 서울에 어머니하고 같이 모셨습니까?

"그럼요. 거기 비석에 내 서(庶)동생들 이름 다 넣어줬지."

대학 동기생에게 청혼 "나에게 시집 오이소"

-이사장님은 사모님(윤병희 경상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과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까?

"동기생인데 뭘."

-서울대 철학과?

"심리학과. 그런데 왜정 때는 서로 같은 과입니다."

-그럼 대학에서 서로 캠퍼스 커플이셨네요.

"대학에서 알아가지고 시집오라고 했지. 나 장가가야 하니까 시집 좀 오이소 했지. 지금 귀싸대기 때려도 할 수 없지만 나 장가가야 합니다 그랬어. (웃음) 연애도 안하고 서로 알기만 아는데, 내가 장가갈 판이 돼 가지고…. 장가 안 갈까봐 아버지가…."

-몇 살 때였나요?

"마누라는 대학원 들어가고, 난 졸업하기 전이었죠. 장가가야 한다는 소리는 벌써 나왔죠. 자꾸 (아버지가) 선보라 하고 그래가지고…. 실제 결혼식보다 근 1년 전에 시집 좀 와주소 나 장가가야 하니까, 말을 그렇게 했지 뭐."

-하하하. 그러니 어떻게 하시던가요?

"그것도 일이라는 게…. 아침부터 우리 마누라 될 사람 찾으려고 어디 있나 싶어서 일부러 문간(대학 정문) 근처에서 내내 보고 있는데 들어가는 걸 못 봤어요. 그리고 낮에도 심리학과 강의실 쪽에 안 보여. 오후가 되어서도 안 보여. 그래서 네 시 다섯 시 됐는데 벌써 문간 밖으로 나갔어."

-정문 밖으로 나갈 때 봤나요?

"우리 대학에 개울이 있고 다리가 있었어요. 보니까 다리 건너서 벌써 나가고 있어. 쫓아 나갔지. 에이~, 긴요한 말을 해야 하는데 쫓아갔으니까 꼬라지가 아주 잘못됐지. '죄송합니다, 내가 뛰어 와서,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서 귀싸대기 때려도 내 할 수 없이 바삐 얘기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올라오고 있었어요. 선보라고 온다는 말 듣고 여자친구 있다는 말을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녀에게) 이 말을 해야 아버지에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나가서 그 말을 한 겁니다. (내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있기에 '아 죄송합니다. 가던 길 가시라'고."

-당황했겠죠?

"당황하고말고. 난데없이 겨우 인사나 있는 정도지 말도 별로 한 처지가 아닌데. 단지 내가 믿고 그런 말 한 이유는 친구와 함께였던가? 자기 친구 집에 같이 간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이계익(전 교통부 장관, 동아일보 해직기자) 마누랍니다. 내가 좀 해달라고 해서 중신해줬으니까."

-그렇게 결혼 하자고 얘길 하고 그 이후에….

"그러니까 내 처남이 생물학과였는데 나보다 2년 위야. 이순재하고 서울고등학교 동기야. 그기 순재한테 물어봤더라도 그 말은 안 갔을 건데, 다른 놈한테 (채현국에 대해) 물어본 거야. 그놈이 깡패라고 말한 거지. 그놈이 학생회장할 때 내가 입학했는데 신입생 환영회 때 나에게 혼났거든. 학생회장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술 좀 적게 먹어 달라'고 하는 거야. 그 때까진 그런가보다 했지. 두 번 또 그래. 철학과 맞나? 저 자식 바보 아니야? 세 번째 또 그래. 술 좀 적게 먹으라고. 그래서 반말로 '돈 자기가 낼 거야? 왜 그래? 좀 노는 판에 더 먹기도 하고 덜 먹기도 하고 그런 거지. 토하더라도 먹어라 ××' ".

-뭐라고요?

"토하더라도 먹으라고. 그리고 내가 막 먹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깡패지. 1학년 막 들어온 자식이 토하더라도 먹으라고 반말하며 소주 막 먹으니 아주 깡패로 본 거야. 사실 깡패 맞지. 그만하면.(웃음) 서울대학에서. 처남도 또 등신이지. 친구가 깡패라 하면 '왜 깡팬데?'라고 물어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장인에게 그냥 그렇게 전한 거야."

-그 말을 들은 장인은?

"큰 아들놈이 깡패래요 하니까 가만히 있다가 '서울대학에도 깡패가 있냐?'라고 물은 거야. 우리 마누라 될 사람은 깡패라니까 암말도 못하고…. 왜냐면 자기 친구도 '그 사람이 깡패라는데' 하는 소리를 들었대. 들었는데 철학과 오빠 친구까지 그랬다 하니까 진짜 깡패인가보다 했겠지. 그런데 아버지가 외려 '서울대에 깡패가 있냐?' 하니까 처남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니까 내가 머리는 빡빡 깎았지, 바지는 찢어졌지, 군사훈련복 그것도 고등학교 훈련복 입고다니고 다니고, 천상 거지 아니면 불량 노숙자 비슷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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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현국 이사장과 김주완 출판미디어국장./김구연 기자

 

-빡빡 깎고 다녔습니까? 머리를? 왜요?

"기분이 더러워 가지고. 일부러 실제 미국에서 히피라는 게 나오기도 전에 나는 55년 56년에 이미 히피입니다. 땅굴방에서 자고, 밤새도록 거기서 책 읽고…."

-어디서 자고요?

"땅굴방, 연탄 공장에 있는 땅굴방. 연탄불도 안 때는 곳에서 자고. 저쪽 건너편에 우리 연탄공장 한구석에 거지들, 쓰레기 모으는 청소년들도 있고 노인들도 있고…. 경찰이 범죄자가 필요하면 거기 와서 하나씩 잡아갑니다. 도둑질 했다 해라 하고, 또 내보내주고…. 어차피 쓰레기 줍는 사람들이 잘 훔치기도 하니까. 어떤 사람은 알고 봤더니 고정간첩이라고. 그 후에 딴 데 가서 살다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납디다. 끈 떨어진 고정간첩이지. 그것도 또 잡았다고 지랄하고…." 

-그 사람이 어디서 잤다고요?

"우리가 그 연탄공장을 인수하기 전에 이미 거기 붙어있던 쓰레기 오야붕이라."

-쓰레기 줍는 아이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그런 방에서, 인근에서 잤습니까?

"인근이 아니고, 한 울타리 천막 안에…."

-그럼 그 사람들도 아버지가 넣어 준 겁니까?

"인수하기 전부터 있는 것을 내쫓지 않은 거죠."

이(齒)가 없어도 임플란트를 하지 않는 까닭

-73년에 탄광하고 사업을 정리하고 79년 정도까지 친구들 강권에 못 이겨서 또 흥국통상을 하다가 넘겨주고 나온 뒤로는 아무런 사업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겁니까?

"그럼요. 그때는 할 수 없이…. 그런데 내가 병이 났어요."

-그 때도 위궤양이었나요?

"위궤양이 나았다고 하는데 미열이 또 나더라고요. 내가 감기, 독감을 굉장히 잘 앓습니다. 내 친구 의사는 심지어 장질부사 같은 병으로도 의심을 해요. 그렇게 열병이 잘나고 하니까. 잇몸도 나쁘답니다. 축농증도 잘 생기고…. 35살에 당뇨란 소리가 나오면서 그 때 이가 다 빠졌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음식을 씹고 하는 데 불편하지 않나요?

"그만 처먹으라고 이 빠진 건데 그걸 또 해 넣을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뇨라는 게 많이 먹어서 나는 병인데…. 이를 안 해 넣었기 때문에 적게 먹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이를 해 넣었으면 훨씬 빨리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잇몸으로 먹으니까 불편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이렇게 배 나오고 했는데. 허허허,"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혹 노무현 대통령과는 인연이 좀 있습니까?

"우리 이내길 교장이라고, 간디학교 교장 하고 여기 11년 동안 교장 했던 사람 있습니다. 그 이내길 교장이 노무현 떨어진 뒤 사기앙양하자고 모이는 자리에 가자고 해. 가서 딱 보니까 아, 이거 대통령 해보자는 소리 하려고 모였다는 걸 딱 알겠어. 기왕 떨어진 것 나가보자 하는 판이라. 내가 그랬지. '그 골 아픈 대통령 뭐 하려고 할라 카요.' 사기앙양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그랬어. 사회운동가로나 그냥 하지. 거기 모인 아이들은 결국은 출세주의자들이고 결국은 권력추구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아이들인데, 입으론 사회운동가라고 떠들지만 내가 4·19나 해방공간에서부터 인간들 변하는 걸 봤거든, 진심으로 사회운동가로 나선 사람들은 실천이 다릅니다. 학교나 댕기고 선거운동판에 끼는 놈은, 지는 절대로 그렇게 인정 안 해도 자기합리화지 결국은 권력추구 내지는 출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거거든."

-그 후 노 대통령과 직접 인연이 이어졌나요?

"난 그런 데(선거판, 정치판) 안 간다니까. 나는 친구가 해도 안 가요. 고형곤 선생 아들이 고건이라고 총리했습니다. 또 대학동기생으로 곧잘 친한 서울대 총장했던 이수성도 총리했는데 근처에도 안 가요. 그 자리에 있을 땐 전화 한 통화도 안 했어요."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어쨌든 앞의 이명박 정부라든지 박근혜 정부보다는 나름대로 민주정부였다는 것은.

"아, 그럼요. 그런데 권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아니라 정말 권력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시면서 후회스러운 일은 없습니까?

"어떻게 없겠소. 후회할 일이야 해야 할 일, 안한 일 천지지. 비틀거리고 산 것이지. 쉽게 이야기해서 나이 육십 대여섯 되어서 사명감 상관없어지게 되니까 그 빌어먹을 어느 놈이 명령한 것도 아니고 빚진 것도 아닌데 왜 그놈의 사명감 때문에 살아온 게 왜 그 모양인지, 제일 후회스러운 게 사명감이에요. 그냥 솔직한, 순박한 마음으로 한 게 아니라 그래도 배운 놈으로 나라 덕으로 학교도 많이 다니고 했으니 해야지 왜 이 따위 마음이 드는 거요 인간이. 거 좀 잘 먹고 잘 살면 잘 먹고 잘 살아서 고맙다 생각하면 될 건데, 잘 먹고 잘 사는 새끼가 이럴 수는 없지 싶은 게, 인생이라는 게 잘하는 일이 하나면 못하는 일은 아흔 아홉 가지인데, 밤낮 비틀거리고 사는데, 술 먹기 좋아하고 친구들 좋아하고 개소리는 밤낮 하고, 큰 소리 친 죄로라도 해야지 이런 마음이 자꾸 드니까."

-그런데 그런 사명감의 족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언제까지였습니까?

"그게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그런 마음이 자꾸 들어가지고 결국 육십 한 서너 살까지는 영 이게 이제 늙었는데 그만 해야지 그만 해야지 하면서도, 연대도 벌써 그 때면 구십 몇 년 아닙니까. 김영삼이 때 전에는 여기(효암학원) 급료 보조도 안 받았습니다. 돈도 없는데, 돈 다 주고 돈이 없는데 아주 죽을 고생했습니다."

효암학원에는 전교조 해직교사가 없었다

-이사장님이 취임한 88년 이전까지는 이 학교 운영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니까."

-88년도에 이사장으로 취임하시고 89년도에 당장 전교조가 결성되었잖아요. 그 당시 문교부에서 전교조 가입 교사들을 해직시키라고 했잖아요. 심지어 사립학교까지 지침을 보냈잖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그 때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간단하죠. 내가 미리 그쪽 선생들한테 너희는 체면이 깎일 테니까 내가 마음대로 전교조 탈퇴서를 냈다고 내가 보고할게. 학교에서 그렇게 보내놓으면 위조니까 이 다음에 소송하면 당연히 위조로 나만 걸린다. 걱정하지 마라. 하여튼 내가 탈퇴서는 보낸다. 그리 알고 있거라. 날 감옥 안 가게 하려면 너희가 탈퇴서 내주면 좋고 나는 무조건 너희 해임은 안 할 거고 탈퇴서 낼 거다."

-당시 전교조 조합원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우선 둘이야. 딴 것은 중요하지 않고 하자고 주동한 게 두 명이야. 자존심이나 그런 게 있으면 안 내도 돼. 내가 마음대로 탈퇴서를 전교조에 보내고 문교부 보고를 할 테니. 단 문교부에 보고는 질질 끌다가 보낼 거다. 그것도 (정부) 애 먹이는 것 아니가."

-해직 대상이 두 명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실제 전교조 조합원은 몇 명이나 되었나요?

"더 있었지. 정부가 해직시키라고 한 주모자가 두 명이었다는 거지. 그 중에 하나가 여태전이라고 태봉고 교장하다가 남해로 간 그 선생이고, 하나는 박계혜라고."

-여태전 선생을 그 때 이사장님이 이 학교로 부르신 겁니까?

"여기 서무과로 들어와 가지고 있다가 박사학위도 하고 뭐 그랬지. 박노정이라고 진주에 있는 그 친구가 추천한 거예요. 이내길 교장도 박노정이한테 물어보니까. 친해요. 노정이와."

-박노정 시인과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길바닥에서 알았지."

-어떻게요?

"진주에 다방이 있는데, 반야로인가 되어 있어. 어느 놈이 불교깨나 아는 놈인갑다 하고 그 다방에 들어갔어. 그 때 박노정이가 마침 장가 가서 마누라하고 찻집을 차렸는데 거길 들어간 거야. 난 그걸 거꾸로 웬 떠꺼머리 총각놈이 여자 하나 꼬실라고 다방 차렸는 줄 알았어. 그런데 막 결혼한 내외간이야. 금방 그렇게 해서 친해졌어."

리영희·임재경과 친하지만 언론인은 쓰레기다

-임재경 선생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대학교에서 친해졌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군산고등학교에서 서울대 가는 대표선수로 서울 가서 학원 다녀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왔는데 학원 옆에 우리 연탄공장이 있었던 거야. 그 때 내가 학교도 못 가고 연탄난로 옆에서 책을 보고 앉아 있더래. 지는 서울대학 가려고 학원까지 얻어 다니는데 저놈은 학교도 못가고 연탄공장에 앉아 있으니 마음에 안 됐던 거라. 나는 몰랐지. 바깥에 지나가는 놈을 알 리가 없지. 그런데 그놈이 보기에 오늘도 앉아 있고 내일도 앉아 있고 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웬 놈이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찾더래. 그게 버나드 쇼의 맨 앤드 슈퍼맨이란 짧은 극본이었는데, 그 책이 혹시 있느냐고 재경이도 물어봤대. 그런데 없다고 해서 다른 책을 보고 있는데 금방 웬 놈이 들어오더니 같은 책을 물어보더라는 거야. 그래서 누군지 봤더니 연탄공장에 앉아서 학교도 못 가고 있던 놈인 거라. 나는 그 때까지도 전혀 몰랐지. 그런데 나중 대학에 붙어서 갔더니 노교수가, 어린 교수도 아닌 40대 중반 내지 50은 되었을 교수가 '나 당신 안다'고 그래.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뵈어서 했는데, 아니 아니, 그 연탄공장 맞잖아 그래. 그러면서 나 학생이오 그러는 거야. 완전히 늙은 교수로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옷이 좀 남루해. 문리대는 남루한 교수도 있나 보다 했더니 영문과 학생이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인가 보죠?

"왕창 들어 보여요. 우리가 어떤 장난까지 했냐면 아버지에게 돈 얻어내려고 교수님 대접해야 한다고, (웃음) 거기서 이 놈은 가만히 있으면 돼. 그렇게 돈 얻어 나와 같이 술 먹고. (웃음) 그런 장난이 가능했으니까. 누가 봐도 교수지."

-나이는 같습니까?

"나보다 한 살 적어. 학년은 한 살 위고."

-그 분은 처음부터 기자 지망생이었나요?

"아주 얌전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불문과 가려고 마음먹었던 문학청년이야. 그런데 엄마가 거기 가면 취직도 안 되고 출세도 못하고 밥 못 먹는다고 영문과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영문과를 간 거야. 이게 또 사명감과 관계가 있어. 결국 붙어먹고 얻어먹고 출세해먹으려고 엄마 핑계대고 못이기는 채 하고 슬그머니 영문과로 갔으니, 그게 화가 난 거야. 자기 배반한 거거든. 그 길로 술만 처먹고 있는 새끼를 이런 개귀신이 하나 들어가니까 잘 됐지. 만나자 마자 술만 퍼먹고 개소리하고 욕하고 악동노릇은 완전 단짝패지 뭐. 나는 이미 연탄공장에서 아이스크림 장사까지 했던 인간이라 어디 가서 돈 좀 못 뜯겠어. 어디 가서 외상 못하고. 매일 술 퍼먹는 거지 뭐."

-그래서 임재경 선생이 돈을 벌거나 출세하는 쪽으로 안 가고 글 쓰는 언론 쪽으로?

"그럼. 처음 시험 치기를 조선일보로. 그런데 저게 문학공부만 했지 경제학 공부는 안 했는데 하필 경제부 기자야. 영문과 나왔답시고. 영어로 읽어야 하는 자료 천지니까 그 때는. 그래갖고 할 수 없이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거야. 남들은 경제부 기자로 촌지 많이 생기는 데로 다녔다고 알지만, 임재경이 이야기는 나밖에 잘 모르는데, 출입처 두 군데에서나 촌지 받지 말아라 나 이거 기사 쓴다고 먼저 선언을 했어요. 간사한테. 그런데 임재경이가 안 받으니 사장, 편집국장, 경제부장, 편집부장에게 갖다 주고 했죠. 그런데 기사를 써도 안 나가죠."

-그랬는데 출입처에서 기자는 제쳐놓고 사장, 편집국장, 부장 갖다 주니 기자는 바보 돼버린 거네요.

"바보 정도가 아니고 저 놈 언제고 쫓겨날 거라고 다 알죠. 상공부나 경제기획원 다 돈이 클 때 아닙니까?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임재경이를 뇌물 많이 먹은 놈으로 소문을 내야 자기들이 마음이 편한 겁니다. 그 새끼도 받을 건 다 받은 새끼가. 뭐 이러면서 은연중에 소문을 내는 거야. 신문사 쫓겨나고 난 후에 마누라가 미장원 해서 먹고 살았어요."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언론인 중에서 임재경 선생도 있고, 리영희 선생도 있고, 성유보도 있고 여러 분들이 계신데, 이사장님이 최고의 언론인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누군가요?

"나는 첫째 언론인 된 놈들은 전부 다 쓰레기다. 지 똑똑하고 지 잘하는 걸로 먹고 살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밑지는 데로 가서 살아야지. 지 잘하는 걸로 먹고 산다니 그 판이 어떤 판인데. 언론사 사장부터 죽일래? 살인범 할래? 그들이 사실은 자유당 때 기자로 갑니다. 자유당 때가 어떨 땐데 어딜 언론기관엘 가?"

-그래도 그 분들이 그런 언론계에서 '엇질'로 나가서 그만큼 했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이만큼이라도 된 것 아닙니까?

"아니죠. 한 놈도 안 그랬으면 폭동이 났을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안전판이 된 겁니다. 가스, 김을 뺍니다. 터질 압력을 빼주거든. 이렇게 내가 악질입니다.(웃음) 지는 안 해놓고 지가 욕하는 악질. 너희가 안전판이 됐다는 걸 내가 아니라 너희가 얘길 해야 해. 폭발할 것을 너희 때문에 폭발 안 했다는 책임도 있다고. 임재경, 리영희하고도 그렇게 친한데 내가 이렇게 악질입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나이가 위였죠?

"한참 많죠. 열 살인가 여덟 살인가 많은데.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하다가도 술 취하면 욕하는 사이였지.(웃음)"

-하하하.(함께 웃음)

"내가 리영희 선생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는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순박하고 정이 많아서지."

신용불량자로 살아도 불편하지 않다

-남은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정말 남 기죽이거나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그것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 하지."

-그런 너무 소박한데요?

"아뇨. 당연하죠. 나는 여기서도 아이들 하고 노는 게 좋고, 젊은 사람이 같이 붙어(어울려)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지금 신용불량자라고 들었는데, 그건 왜 그런가요? 보증을 잘못 서줬다든지 그런 건가요?

"보증 서 가지고…. 내가 회사를 주면서 사실은 주식까지 다 줬어. 남들은 모르지. 앞서 다른 회사 나눠줬듯이…. 내가 아파서 더 이상 도저히 못할 상황에서 누가 사장 할래 물었지. 전부 안 한다고 그래. 안 할 것 같은 놈부터 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겠다 싶은 놈에게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다고 하데? 이게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우리 노무과장 하던 친구야. 이 놈을 내가 잘 아니까, 할 놈이야. 주식 준다고 했으면 처음 물었던 놈부터 준다고 했겠지. 고생만 할 줄 알고 전부 안 한다 하는 걸 이놈은 한다고 한 거야. 그놈도 주식 준다는 건 꿈도 안 꿨어. 그렇게 한다고 하기에 주식 100% 주고, 사실은 공로주식을 이미 15%, 5%, 3% 이렇게 줘서 내가 줄 수 없는 지분이 있었거든. 그것도 지분 갖고 있는 친구들에게 '소유권은 그대로 너희가 갖고 있되 결의권은 양도해'라고 했지. 이건 법률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개념이야."

-결의권은 누구에게?

"지금 사장 할 놈한테."

-아, 그렇군요.

"작은 회사라도 사장이 감옥 갈 일을 열 개도 결정하고 스무 개도 결정해야 하는데, 그 결의권을 사장에게 100% 줘야 한다는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가진 주식 전부와 사장 자리 다 넘겨줬는데 이놈이 나를 이사만 면하게 하고 이사장은 남겨놓은 거야. 대표이사 권한이 아직까지 나에게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변호사나 법정에서는 내가 또 돈을 감춰두고 있는 듯이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런데 그놈이 법과대학 나왔는데 그렇게 부실한 놈이야. 그놈 마음속에는 내가 남아 있기를 바랐을 수도 있어. 은행에서 내 이름 있으면 잘 꾸어주니까. 내 사인도 안 받고 돈을 막 꾸어줬어요. 그런데 부도가 나서 이놈이 도망을 갔어. 그래서 가보니까 내 이름은 있는데 내 사인도 없이 융자를 해줬으니까 이 사람들 다 서류 미비에 부정대출로 감옥 가야돼."

-그게 80년대였겠네요?

"음, 그게 박정희 총 맞아 죽고 난 뒤였으니까 79년이나 80년 그렇게 되었겠네요. 박정희 총 맞아 죽는 그해 융자가 나갈 걸 안 해준 겁니다. 얼마나 야비한지. 그리고 부도가 나고 보니 막상 내가 사인도 안 했는데 융자가 나간 게 있었던 거지."

-그러면 그 때부터 신용불량이 되어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꽤 질긴 영감쟁이인 건 틀림없잖아요."

-신용불량이 되면 당장 은행 거래가 안 되잖아요.

"안 되죠. 통장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면 현금 아니면 쓸 수가 없는데.

"그것도 삥땅으로 하죠. 지금도 삥땅이 돼요. 너 돈 있냐 하고 물어봐요. 제일 만만했던 삥땅 대상이 조규하라고 전라남도지사를 했던 선배가 있는데 만나면 지갑 달라고 해서 들어있는 돈 다 빼서 몇 푼 돌려주고 내가 다 가져버려.(웃음) 칼 안 든 노상강도지 뭐."

-학교에서는 용돈 좀 안 주나요?

"내가 안 가져가는데, (옆에 앉아 있던 박종현 개운중학교 교장을 가리키며) 니 돈 있나 하고 물어보고 교장 월급에서 뜯어가는 거지."

-운전면허는 있습니까?

"술 먹기 때문에 면허도 안 땄어요."(웃음)

-사실은 저도 면허가 없습니다.

"허허허. (정색을 하면서) 진짜 따이소. 자격은 무엇이든 따 놔야 해. 아무리 웃기는 자격이라도 자격은 따 놔야 합니다. 만일 술 먹는 자격이 있다면 그것도 따 놔야 해. 자기 일 다 하려고 그러면…. 여기 사진기자는 사진작가로 살면 그런대로 돈이 생겨요. 돈 있는 사람들이 찍어달라고 하니까. 그런데 이런 글 쓰는 사람은 시 쓰거나 책 많이 안 내면 결국 가난합니다. 본인은 설마 내가 그러랴 하겠지만, 치사한 글 써야 돈이 생기지, 자기 쓰고 싶은 글 써가지고 돈 생긴 사람 없어요. 벽초 홍명희가 그렇게 좋은 소설 써도 거기서 돈 안 생겼어요."

-그래도 북한 가서 한 자리 하지 않았나요?

"부수상이란 자리. 김일성 그 자식이 딸년 데리고 살았어요. 그놈 개자식이요. 독립운동한 건 사실이지만, 이 나라에서 나처럼 그놈을 개새끼라고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요."

-누굴 데리고 살았다고요?

"홍명희 선생 딸. 개새끼요. 못된 놈의 새끼.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똑 같은 놈이요."

평생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해온 이유

-전에 경남도민일보 강연에서 들으니 요즘 고조선 시대를 연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한평생이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해방 된지 만 2년이 다 되어오는데, 아직도 조선이란 나라이름밖에 없어? 일제 때도 조선인데? 단군 조선 때부터. 늘 찜찜해하다가 담임선생님한테 물었지. 어찌 나라 이름이라는 게 우리 말로 없고, 한문으로만 조선이냐고. 한문을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는 학설이 있느냐고. 아니면 우리말로 된 우리나라 이름을 모르는 거냐고. 한문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자기 나라 이름도 자기 말로 없느냐고. 한글이야 나중에 만들었다지만."

-조선이란 국호 말고 우리 고유의 말로 된 나라 이름이 있었을 거란 말씀이죠?

"당연히 있어야지. 한자를 우리 조상이 만들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우리말로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선생님이 한참을 가만히 계시다가 나가시더라고. 그리고 하루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어. 내가 마침 반장이었으니 따로 가서 다시 물었지. 엊그제 물어본 것 그거 어찌 된 겁니까? 그게 말이다. 아무리 조사하고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가 궁금해 할 문제가 아니라 저만한 선생이 몰라? 이거 진짜 문제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냥 모르는 줄로만 알았지, 세상이 모르는 줄은 몰랐네. 그 때부터 2년 후 나는 졸업하고 그 선생님은 그해 공립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으로 갔어요.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마 그 질문 때문에 계속 조사하다가 아마 아예 역사 선생으로 지원을 한 것 같아.(웃음) 나는 그 때부터 걸려든 거야. 한문을 우리 조상이 만들었거나 우리나라 이름이 우리말로 있는데 우리가 모르거나. 두 가지 다 맞는 질문이었어. 한문은 분명히 우리말을 하고 있는 족속이 만들었고, 또 우리말로 나라 이름이 있어. 주몽의 나라가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고, '고려' 또한 김해 가까이 있었다는 '가라'라고 쓴 거야. 조선은 망한 나라여서 싫고, '가라'라고 써놓고는, '가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망한 나라니까 '고마'라고 읽었어."

-그런 걸 공부하셔가지고 세상에 널리 알리거나 하실 생각은 없나요.

"나는 그게 기자분들하고 생각이 달라요. 내가 아는 지식도 진리도 다 가설이야. 아는 것 전부가 고정관념이야. 나는 그걸 알리고 싶긴 해도 마음이 급하진 않아. 내가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뭐 그게 대수야. 단지 민족이 분단이 되어가지고 이 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거기 관심을 가지는 거고. 자존심이 상해 있고, 그래서 다 인간들이 유병언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여기 권력 있고 돈 있는 놈 중에 유병언이 아닌 놈, 나를 포함해서 단 한 놈도 모르겠거든. 권력 있었던 놈 치고 유병언 아닌 놈은 김수환(전 추기경) 하나밖에 모르겠어. 우리가 술 먹고 비틀거리는 놈 보잖아요? 이런 시절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술 먹고 기는 놈보다 더 비겁하고 더 치사하고 더 더러웠기 때문에 목숨을 이어온 겁니다."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여기서 인터뷰는 끝났다. 채현국 이사장은 마지막에 "세상에 정답은 없다. 틀리다는 말도 없다. 다른 게 있을 뿐이다. 정답은 없다. 해답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밖에도 그의 어록은 수없이 많다. 인터뷰 내용도 지면 사정으로 대폭 줄인 것이다. 첫 인터뷰와 보충 인터뷰까지 모두 풀었더니 200자 원고지 500장에 이르렀다. 이 지면에 다 싣지 못한 내용은 따로 기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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