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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한 1424명…통곡의 비석만 외로이 남아

[남강 오백리] (11) 함양 마천면 문정리~산청 생초면 상촌리 곱내들

권영란 기자 kyr65@idomin.com 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하천 지명으로는 분명 '임천'으로 표기하고 있다. 마천면에서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물길 구간이다.

"머라꼬? 임천? 그기 아인데. 요기에 엄천사가 있었고, 저게 강이 엄천강 아이가. 지금이사 절터만 있지만 엄천사가 지리산에 있는 절 중에서 제일 큰 절이었다더만. 1000명 밥을 할 수 있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이 골짝 사람들이 다 절밥 먹고 살 정도였다니까."

강 건너 휴천면 운서리에서 남호리 동호마을로 시집와서 평생을 여기서 살았다는 운서댁(78)은 "동네 안쪽에 가면 절터에 부도 같은 게 있다아이가"라고 말했다.

함양군 마천면 휴천면 유림면, 산청군 금서면 등 이 일대 주민들에게는 '임천'이 아니다. '엄천강'이다. 지리산 자락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곳 강을 두고 엄천강이라 말한다.

엄천사(嚴川寺)는 신라(883) 때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후 폐사된 절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이 그 터라고 말한다. 그러니 '엄천'은 신라 때부터 이 일대에 붙여졌던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또 김종직의 <점필재집> '유두류록'을 살펴보면 1472년(성종 3년) 함양관아에서 엄천으로 가서, 고열암에서 1박 후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함양군 휴천면 동호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길. 노랗게 물든 가을 논밭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임천은 언제 어떻게 얘기된 걸까? 한국하천협회 자료에 따르면 임천은 남원시 산내면에서 함양군 마천면 경계를 넘어와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까지다. 1982년 '임천'으로 하천 지정 등록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자국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기 위해 치수정책을 실시하면서 하천 이름을 정리했는데 당시 '엄천'에서 '임천'으로 조정된 것이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도 있다. 또 본지 연재 중인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필자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에 따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에 '운봉현 동천이 인월역을 지나 함양군 임천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하니 '임천'이라는 강 이름도 대략 500년 전부터 표기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천이냐 엄천강이냐 강 이름 하나를 두고도, 대대로 이곳을 터전으로 일궈 사는 백성들과 기록하는 이들이 달리 부르는 연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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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댐(문정댐) 예정지는 온통 가을빛

용유담에서 잠시 쉬었던 물길은 휴천면 문정리 견불동, 고정마을, 백연마을, 문하마을을 차례로 지나온다. 백연마을 앞 다랑논들은 이미 황금빛이다.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는 이쯤에서 물길은 다시 거칠어졌을 법하다. 내려다보는 물길은 까마득하다. 건너편 오른쪽 골짜기로는 겹겹이 쌓이는 다랑논들 뒤로 송전마을이 꽉 들어차 있다. 그 너머 능선으로는 단풍이 점차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리산댐(문정댐)이 들어설 예정지역입니다. 이 일대가 다 수몰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문정리 견불동 꼭대기에 사는 연규현(49·한국화) 화백은 12년째 이곳 일대를 화폭에 담고 있다. 장마나 폭우 때의 엄천강, 비 그친 뒤 드러나는 지리산 능선, 눈 내린 견불동 등 연화백의 그림 속에는 다른 이들이 엿보지 못한 용유담이 있고 엄천강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다.

물길이 굽어오는 곳이 댐 예정지이다.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지요. 날마다 비경을 들여다보니까요."

견불동 아래 백연마을에는 고려말 충신 이억년 묘가 있다. 고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이억년이 그의 형 이백년과 함께 이곳에서 은거했다 한다. 마을 입구 물레방아 옆에는 함양문화원이 2007년에 세운 표지석이 있다. 백연동이라 이름 붙여진 유래와 변천들이 적혀 있다.

때마침 도로 옆 시멘트 주차장에 두 노인네가 경운기에 싣고 온 나락을 널어 말리고 있었다.

"쪼매 하니 수확해서 자식들 보내주고 우리 먹으면 딱 1년치아이요. 요기는 금세 날이 추워지니 가실을 후딱 끝내야 하지예."

한로 지나고 상강 무렵이다. 지나는 곳마다 추수가 한창이다. 갓길마다 콩타작을 하고 나락을 널어놓았다. 차량 왕래가 적은 다리에는 아예 나락을 다 널어놓았다. 꼬부장한 허리로 걸음을 옮기면서 도리깨질을 하고 가마니를 끌고 간다. 때 되면 꽃 피고 잎 지듯 씨앗을 뿌리고 추수한다.

문하마을 앞 송문교에서부터 강폭은 다시 넓어진다. 급하게 여울을 타고 내려오던 물길도 차츰 느긋해진다. 송문교 옆 무너진 옛 다리를 걸어 바위섬 소나무 아래 서면 좌우 골짜기와 물길들이 눈 안에 꽉 들어찬다. 쏟아지는 가을빛이 아리다.

다시 물길이 슬쩍 굽어 흘러드는 곳은 남호리 한남마을 새우섬이다. 한남군 유배지로 알려져 있다. 한남군은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사육신 사건에 연루돼 함양에 유배되고, 다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이곳에 유배됐다. 예전에 섬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지형이 바뀌어 들이 되었다. 원기마을에서 동강교를 건너지 않고 곧장 동호마을에 닿는다. 60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엄천사 터와 '김종직 관영차밭 조성터'가 있다. 비쩍 마른 차나무에서 꽃봉오리가 하얗게 터지고 있었다.

나루터와 줄배 이야기

함양군 휴천면 유림면과 산청군 금서면을 좌우로 낀 물길에는 나루터가 있었고 줄배가 있었다. 이 구간에서는 강폭이 너르고 수량이 제법 많다. 마을들이 서로 맞바라기를 하고 있는 곳이라면 대부분 나루가 있음직하다.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와 운서리를 잇는 동강교에서 산청군 생초면 고읍교까지는 줄잡아 서너 군데 나루터가 있었다 한다.

"금서면 자혜마을과 강 건너 함양 유림쪽 지곡 모실마을로 가는 줄배가 있었어요. 80년대 초중반까지는 있었나 봐요. 그때 사공이 우리 마을에 아직 살아 계실 건데…."

김덕희(48·서울시) 씨는 산청군 금서면 주상마을이 고향이다.

"나루에서 좀 더 아래는 엄천강물로 발전기를 돌려 이 일대 전기공급을 담당했던 방앗간이 있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집집마다 돌며 전기세를 거뒀으니까요."

방앗간이 있었다는 주상마을 근처에는 최근 수로를 넓힌 뒤 '전기를 생산 발전하는 목적'이라고 경고판을 세운 소수력발전소가 있다.

유림교는 함양군 유림면과 금서면 화계리를 잇는 다리로 2005년에 들어섰다. 유림교 옆에서 2대째 어탕국수집을 하고 있다는 노길환(48·주암식당) 씨는 지금은 면소재지를 옮겨가버렸지만 예전에는 화계가 금서면 소재지였다고 말한다.

"유림면은 거기 중학교가 없으니 여기 경호중학교로 왔는데 그때 학생 수가 1000명이 됐던 기라예. 철구다리 같은 것도 있었고…. 그 전에는 주암마을에서도 유림으로 가는 줄배가 있었지예."

그렇다면 1951년 2월 7일 민간인학살을 자행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어느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을까. 어렴풋이 자혜마을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지곡 모실마을로 들어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강을 따라 이어지는 60번 도로를 따라 손곡마을을 지나고 서주마을 강변에 닿았을 것이다. '산청·함양사건' 당시 국군의 이동 경로를 잠시 그려본다.

민간인학살 아픔 서린 4개 마을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인 작전명 제5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민간인을 통비 분자로 간주해 골짜기에서 내려오면서 차례차례로 3개면 4개 마을 705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산청군 금서면 가현·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이 그 해당지역이다. 이들 국군은 9일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 11일까지 719명을 또 학살했다. 이로써 산청·함양·거창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모두 1424명. 하나의 사건이지만 현재는 '산청·함양사건'과 '거창사건'으로 분리해 추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추모공원도 따로 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의 묘비를 세우고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유골은 남녀 합동묘에 안치해 놓았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에 있다. 2004년에 묘역이 만들어지고 2008년에 공원 조성을 완료했다. 이곳을 찾았을 무렵에는 '제27회 합동추모제'를 며칠 앞두고 있어 새로이 정비하느라 트럭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풀을 뽑고 있는 서너 명의 아지매들에게 다가가다가 먼저 눈이 간 곳은 '미등록 희생자들의 묘'다. 남녀 두 기의 묘로 이뤄져있는데 일가족이 다 희생됐거나 해방 이후 주민등록 없이 이곳 골짜기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온 동네가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이면 다 제삿날 아이가. 아침에는 차례 지내고 밤에는 제사 지내는 기제. 여게는 제사 지내 줄 사람이 없으니 동네 사람들이 같이 지내주기도 하제. 제사상에 젯밥 한 그릇 더 올리면 되니까."

방곡마을에서 품일 하러 온 아지매는 "믄 좋은 일이라꼬 자꾸 말하게 하노"라며 말문을 닫았다.

마을 끝자락으로 가면 '가현희생장소 보존지역'이 있다. 검은 비석에는 '산청·함양사건 그 첫 번째 희생 장소'라고 밝혀놓았다. 비의 뒷면에는 123명의 희생자 명단, 옆면에는 '희생당한 영혼이여 영원한 안식 이루시고 이 나라를 길이 지켜주소서'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두 번째 희생 장소인 방곡마을, 세 번째 희생 장소인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앞에도 검은 비석이 차례차례 세워져 있다.

유골 발굴 시 이곳 방곡마을에서는 80kg들이 여섯 가마니가 쏟아졌다고 한다. 마을은 전부 불타고 어른들은 죽어갔는데, 그곳에서도 총알 3발을 맞고도 살아난 아이도 있었고 요행히 빗나간 총알 덕분에 시신더미를 헤집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군인들이 사람들을 새끼줄로 엮고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가게 한 후 사살했다"고 말한다. 또 이들은 6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네 번째 희생 장소는 강 건너 유림면 서주마을이다. 오봉천을 따라 내려온 3대대는 자혜마을 아래 나루에서 배를 타고 지곡 모실마을로 건넜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모실, 손곡 등 주민들을 서주마을 강변 논바닥에 모아놓고 학살을 한 것이다.

이제 물길은 유림교를 지나 산청군 생초면 곱내들로 흐른다. 그곳에서 남강 물길을 만나 오래도록 숨을 죽이고 있다. 아무리 토해도 가시지 않는 '붉은속울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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