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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백결선생, 효충사 그리고 통도사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6) 양산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10월 30일 목요일

◇만고충신 박제상

양산 역사 첫머리에는 박제상(朴堤上)이 나온다. 눌지왕 시절 425년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내져 있던 임금의 동생 둘을 돌아오게 하고 자기는 목숨을 버린 만고충신이다. 삽량주(지금 양산)의 간(干=우두머리)이던 그이는 왕의 청을 받고는 고구려에서 아우 복호(卜好)를 데려오고 곧이어 왜로 들어가 또다른 아우 미사흔(味斯欣)을 신라로 도망치게 하고 본인은 붙잡혀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박제상은 "왜인은 말로써는 깨우칠 수 없으니 마땅히 속이는 꾀로 돌아오게 해야겠습니다. 제가 왜국으로 가거든 제가 나라를 배반했다는 죄를 내려 그들에게 이 소문을 듣게 해주십시오"라 아뢴다. 죽음을 맹세하고 아내와 자식도 보지 않은 채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왜로 가서 둘 다 도망치면 모두 잡혀 죽을 줄 알고 본인은 남는 대신 미사흔만 빼돌렸다. 왜왕은 "제상을 곧바로 목도(木島)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사람을 시켜 나무에 불을 질러 온 몸을 태운 뒤 목을 베었다."

삽량문화축전 중 박제상의 혼불을 기리는 고유제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민족의식이 뚜렷한 <삼국유사>는 박제상 죽는 과정을 자세하게 적었다. 박제상(<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 "나는 계림(신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을 수 없다." 화가 난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게 하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로 달리게 한 다음(그래서 갈댓잎에 있는 피 같은 자취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박제상의 피라고 한다) 불에 태워 죽였다.

박제상은 아내와 자식은 돌보지 않고 나라(임금)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이를 기리려고 1946년 세워진 사당이 효충사(孝忠祠)다. 사당 자리는 박제상 생가터라 전해진다. 박제상과 백결(百結 옷이 낡아 백 번 기워 입었다는 뜻)선생의 초상·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국사기>는 백결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 백결선생은 박제상의 아들이다. 거문고의 달인이고 이름이 박문량(朴文良)인데 섣달 그믐 이웃집 방아 찧는 소리를 부러워하는 아내를 위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냈다. 효충사 있는 마을도 이름이 효충이다.

가까이에 양산향교가 있는 춘추공원 장충단(또는 삼조의열단)에는 박제상을 기리는 빗돌이 모셔져 있다. 삼조의열(三朝義烈)은 이렇다. 박제상은 신라조(朝) 충신이고 고려조(朝) 충신은 양산방어사로 왜적을 무찌른 김원현이며 조선조(朝) 충신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양산군수 조영규다. 임진왜란 의병장 구암 안근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윤현진을 기리는 빗돌도 있다.

박제상의 이런 행적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박혁거세 후손으로 신라 왕족이었기에 이렇게 나라 또는 임금을 위해 목숨조차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지만 망부석으로 남았다는 아내와 찢어지도록 가난해진 아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구성원 가운데 나라를 위해 이렇게 자기 한 몸 내던질 사람은 과연 있기나 할까. 나라 덕을 크게 보지 못하는 일반 국민이야 그렇다 쳐도 지금 체제에서 갖은 지위와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은 어떨까. 나라에 커다란 어려움이 생기면 이들은 오히려 책임을 지지 않고 나라 바깥으로 남먼저 달아나려 하지 않을까.

생각은 볼모에까지도 미친다. 대등한 관계라면 볼모를 서로 주고받아야 마땅한데, 신라는 어째서 볼모를 일방적으로 보내야 했을까. 고구려는 이미 강대국이었다 쳐도 신라는 어째서 왜국에게조차도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존재였을까. 물론, <삼국사기>는 왜왕의 요청대로 볼모를 보낸 배경으로 왕족들 갈등을 얘기하고 있지만 좀은 구차하다. 차라리 건국 이후 500년까지 왜로부터 서른두 차례 침공당했다(<삼국사기>)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바라보는 편이 합당하지 않을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나루 가야진

원동면 용당리에 있던 나루 가야진(伽倻津)도 양산 역사가 오래됐음을 말해준다. 낙동강은 김해와 양산을 가르는 지경으로 들면서 황산강(黃山江)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사기>는 탈해이사금 21년(77)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와 황산진 어귀에서 싸워 1000명 남짓을 베고 잡았다고 했다. 또 지마이사금 4년(115)에는 가을 7월에는 가야를 치기 위해 임금이 몸소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와 신라가 경계를 맞대고 영토를 다투던 역사의 현장이다. 황산은 지금 양산시 물금읍 일대(가야진 동남쪽)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은 1421년 4월 13일 치 기사에서 "용이 경상도 가야진에 나타났다"고 했고 <세종실록 지리지>는 "가야진은 속칭 옥지연(玉池淵)인데 신룡(神龍)이 있다고 해서 해마다 봄·가을에 향촉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고 적었다.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중요한 자리라는 얘기다. 가야진사(伽耶津祠)는 황룡 하나와 청룡 둘을 모시는 사당이다. 전설을 따르면 황룡은 남편이고 청룡은 그 본처와 첩실이다. 가야진사 재실에는 용산재(龍山齋) 현판이 있고 사당으로 드는 내삼문에는 삼룡문(三龍門)이라 적혀 있다.

가야진사.

가야진 앞 낙동강은 깊고 조용하다. 맞은편 김해 땅에서는 용산이 튀어나와 있다. 요즘은 3월에만 하지만 전에는 2월과 8월에 춘추제향을 올리고 가물면 따로 기우제를 지냈다. <성종실록> 1494년 12월 23일 치에는 종기로 몸져누운 임금의 쾌차를 위해 가야진을 포함한 명산대천에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그런데 임금은 이튿날 세상을 떴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4대강 사업 때문에 이뤄진 가야진사 일대 발굴에서는 사당 등 건물터 둘과 제사에 썼던 소대가리 모양 그릇을 비롯해 여러 분청사기와 기와가 나왔다.

가야진이 예로부터 중요한 나루였음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신라가 가야를 치러 가는 길목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얘기가 엇갈린다. 쉽게 갈 수 있는 경로가 따로 있는데 일부러 산악지대를 거쳐 가야진까지 올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35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는 경주에서 양산을 거쳐 곧장 부산(김해)으로 이어진다. 북동에서 남서로 기울어져 있는 양산단층구조곡을 타기에 꽤 평탄한 편인데, 물금에서 낙동강을 건넌다. 그러니 옛날에도 이 평탄한 경로를 썼을 테고 더욱이 군사가 대규모로 오간다면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다.

◇작원잔도로 이어지는 황산잔도와 용화사

물금에서 원동면 화제리 토교마을에 이르는 낙동강변 험한 비탈길을 황산잔도라 한다. 이런 벼랑길로는 밀양에 작원잔도가 있고 경북 문경에 토끼비리가 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는 떨어져 있지 않다. 용화사 또는 물문화전시관 있는 데로 들면 황산잔도 자취를 만난다. 옛적 서울과 동래를 잇는 유일한 육로로 동래로(東來路)라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도 이리로 북진했다. 길이 험하고 좁기 때문에 여기를 틀어막아 물리칠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리하지 못했다. 밀양 작원잔도 일대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으나 결국 이기지는 못했다.

쥐꼬리만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살아남은 황산잔도. 빗돌에는 동래부사 정현덕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김훤주 기자

원래 황산잔도는 일제가 경부선 철도로 덮어쓰는 바람에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옛 황산잔도를 따라 낙동강 위로 덱이 놓여 있다. 덱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 아래에 빗돌이 하나 눈에 띈다. '행동래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行東萊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인데 1871년 세워졌다. 이런 빗돌은 사람들한테 많이 보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길가에 세우기 마련이다. 용화사에도 황산잔도 관련 유적이 있다. 마당 한편에 빗돌이 둘 있는데 눈길을 끄는 쪽은 당연히 연꽃도 새겨져 있고 크기도 더한 오른쪽 나모대원지장보살(南無大願地藏菩薩)이다. 왼편 빗돌은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제목이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라 한다. 원래는 황산잔로 시작 지점에 있었겠는데 1694년 양산군수 권성구가 스님 탄해와 별장 김효의에게 시켜 깊은 데는 메우고 험한 데는 깎아 평탄한 도로를 만들었음을 기리고 있다.

용화사 뜨락에 있는 황산잔로비(왼쪽).

조그마한 용화사는 낙동강을 앞에 두고 있어 풍경이 아주 좋다. 그 바로 앞 철도로 기차가 자주 지나다니지만 아주 시끄럽지는 않다. 절간은 대웅전과 산신각이 전부인데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뒤를 받치는 광배와 깔고 앉은 자리 대좌까지 모두 갖췄는데 몸통이 두툼하고 얼굴은 네모진 편이다. 허리를 곧게 세우기는 했지만 살짝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공양 바치는 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양산을 압도하는 통도사

문화재청 인터넷 누리집을 열어보면 양산에 있는 문화재가 모두 219라 나온다(220이라 돼 있으나 하나는 문화재 등급이 조정되면서 중복). 이 가운데 통도사 차지가 무려 139로 전체의 63.5%, 3분의 2에 이른다. 양산에서 통도사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으뜸 불보(佛寶)사찰이니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으로 보면 인터넷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면 알 수 있는 얘기들도 많다 보니 여기서까지 같은 얘기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통도사를 처음 마련한 자장율사는 석가모니 정수리 뼈와 몸소 걸쳤던 사리를 가져와 금강계단을 꾸렸는데 이는 신라 불교가 자립할 역량을 갖췄음을 안팎에 표방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이 되려면 수계(授戒)를 해야 하는데, 그런 의식을 행하는 우리나라 최초 건축물이 바로 통도사 금강계단이다.

통도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국장생석표.

통도사 대웅전은 들어가면서 보는 현판에 적힌 글자고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서 보면 금강계단이며 다시 왼쪽으로 돌면 대방광전이며 금강계단 쪽에 달려 있는 현판에는 적멸보궁이라 적혀 있다. 그런데 이 현세불 석가모니불을 미래불 미륵불과 이어주는 장치가 통도사에 있다. 용화전 앞 봉발탑(奉鉢塔)인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다. 통도사 절간에서는 석조봉발(石造奉鉢)이라 한다. "석가모니 발우(鉢盂=나무로 만든 스님들 밥그릇)와 가사를 미래에 출현할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가섭이 인도 계족산에서 멸진정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에서 비롯됐다고 여긴다.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억조창생을 제도할 미륵불이 탄생하는 자리가 용화수(龍華樹) 아래이고 또 그 설법을 일러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한다.

35번 국도에 붙어 있는 통도사 국장생석표(하북면 백록리 718-1)는 통도사 위상이 옛적에도 어마어마했음을 일러준다. 고려 1085년 나라 명령으로 세운 돌기둥인데 통도사에서 직선거리로 2km 남짓이다. 당시 통도사를 중심삼아 둘레에 국장생석표 12개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 석표와 상천리 국장생석표(울산 울주군 삼남면) 둘만 남았다.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잘 보이지는 않는다. 12개 석표를 잇는 울타리 안쪽 모두가 아니라 개별 석표가 놓인 둘레 얼마만 통도사 소유였다지만 어쨌거나 옛적에도 지금처럼 대단한 절간이었음을 일러주고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 부도가 보인다.

◇북정동고분군과 양산시립박물관

양산 대표 고대 유적에서 북정동 고분군은 빠지지 않는다. 5~6세기 조성된 크고 작은 고분이 언덕배기에 들어서 있다. 이들 고분은 형식은 가야이고 내용은 신라라는 특징이 있다. 신라 고분은 평지에 있지만 북정동고분은 산기슭에 있다. 가야 고분에서는 토기가 많이 나오지만 북정동고분에서는 경주 대형 고분에서 주로 보는 금동제 장식품이 많이 나왔다. 말하자면 신라에 일찌감치 포섭된 가야세력이다.

북정동에 있는 고분들 가운데 부부총과 금조총이 이름나 있다. 부부총은 일제강점기 1920년 발굴당했는데 관련 유물은 일본으로 약탈돼 도쿄국립박물관에 많이 옮겨가 있다. 부부가 함께 묻힌 이 무덤은 5세기 중반 남편이 먼저 숨지자 무덤을 만들어 묻었고 그 뒤 아내가 숨지자 함께 묻었는데 순장도 있었다. 금조총은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1990년 부부총을 재조사하다가 발견했다. 금으로 만든 새다리 장식품이 나와서 금조총(金鳥塚)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양산시립박물관.

북정동고분군 바로 아래 양산시립박물관이 있다. 양산 사람들은 그동안 한 번씩 일본으로 약탈된 문화재들 환수하는 운동 등으로 사람들 눈길을 끌어왔다. 2013년 4월 11일 양산유물전시관으로 문을 열고 올해 들어 지금 이름으로 바꾼 양산시립박물관도 문화재 환수운동에 힘을 보태왔다. 2013년 10월 15일~2014년 1월 12일 열린 양산 지명 600주년 기념 특별전 '백년만의 귀환, 양산 부부총'이 그랬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갖고 있는 부부총 출토 유물 68개를 대여 형식으로나마 친정 나들이를 시켰고 이를 통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 관심을 한 번 더 높였다. 양산시립박물관은 대단하다. 문을 연 지 일곱 달도 되지 않은 2013년 11월 5일 통산 관람객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열성으로 활동하지 않는 박물관은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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