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신도 없이/개발시대의 표본이 된 땅/마산."

부마항쟁을 소재로 한 우무석 시인의 시집 <10월의 구름들>(2014)에 실린 시 '마산' 일부다. 시인은 수출자유지역 후문을 어정거리거나, 어시장 횟집에서 혼혼한 취기만 늘어놓고는 마산을 다 안 것처럼 떠드는 작금의 분위기를 그렇게 개탄한다.

저항의 도시, 민주성지로서 마산의 옛 영광이 사라져 감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마음 공감하고도 남지만 기자는 이 시에서 지역 예술인·지식인들이 갇혀 있는 '한계' 또한 본다. 항쟁 정신을 잃어버리고 개발시대 표본으로 전락한 마산만이 지금 마산의 전부일까. 시인이 언급한 현재의 수출자유지역이나 어시장에 또 다른 변화의 '정신'이 솟아나지 않고 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시대 현실을 예리하게, 창조적으로 포착하는 시인이라면 부마항쟁과 현재의 단절에 그저 가슴 아파하고 냉소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새로운 접점, 단초를 찾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문득 지난 시 한 편을 떠올린 건 경남도 내 대학들의 시민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이 준 실망 때문이다.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와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가 비슷한 성격의 강좌를 최근 열었는데 대부분 주제가 역시 경남의 '과거'에 머물러 있다. 창원대는 '가야 그리고 사람들', '옛 시로 읽는 경남', '경남의 전통건축' 등을, 경남대는 '마산의 민족 교육자들', '마산의 산업화와 이선관 문학', '월영대 전설과 최치원' 등을 강의한다. 경남대의 경우 올해는 '마산의 과거와 현재'를, 내년에는 '현재와 미래'를 다룬다지만 말뿐이다. '장지연과 지역언론', '3·15와 이은상', '결핵문학과 치유도시 마산', '마산의 미술가 문신' 등 절반 이상을 과거 이야기로 채웠다.

여영국 도의원이 펴낸 <상남동 사람들> 표지.

지난날을 돌아보고 되새겨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것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경남 인문학계, 지식인 사회 움직임에 주목해온 이라면 위 강좌 내용이 얼마나 식상한지 잘 알 것이다. 왜 지금 경남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을 둔 연구나 예술 작품은 만나기 어려운 걸까. 이를테면 옛 시가 아닌 최근 지역 문인들 작품을 토대로 경남을 읽어 본다거나, 일제시대가 아닌 오늘날 경남 언론의 실태를 다른 지역과 비교·분석해 본다거나, 만날 최치원·문신·이선관이 아닌 도전적인 실험을 하는 예술가를 조명해 본다거나, 박근혜 정권 등장 이후 경남 노동자 삶과 의식 변화를 추적해 본다거나 하는 시도들 말이다.

참조할 만한 사례가 있다. 여영국(노동당) 경남도의원이 창원 상남동 자영업자 1500여 명을 설문·면접 조사해 펴낸 보고서와 단행본 <상남동 사람들>(2014)이 그것이다. 왜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떠밀려가는지, 왜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지, 대안은 없는지 탐구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여 의원은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전국 유일의 진보정당 소속 지역구 광역의원이 되었다.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앞서 한 시인이 저항 정신을 잃었다고 개탄한 바로 그 땅에서,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 힘으로 새 희망의 단초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물론 당연하다. 기자가 속한 <경남도민일보>, <경남도민일보>에 속한 기자 역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다. 좀 더 좋은 세상,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이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 글이 그 작은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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