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동구 밖 생태·역사교실] (21) 마산

10월 11일 진해 웅동·동부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한 '토요 동구밖 역사탐방 교실'은 의림사~진전 거락숲~창동·오동동을 차례로 찾았다. 맨 처음 둘러본 곳이 의림사이다. 통합 창원시에 있는 절을 꼽으라면 진해 성흥사, 창원 성주사 그리고 마산 의림사 정도. 살고 있는 데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우리나라 3대 사찰 양산 통도사(불보사찰),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순천 송광사(승보사찰)가 있어서 그런지 경남 사람들은 절에 대한 눈높이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절간은 그냥 예사로도 여기지 않기 십상이다.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의림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없다. 아이들뿐 아니라 함께하는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이나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명색이 2010년 통합 이전에 마산팔경에 드는 절인데….

예전 탐방과는 달리 이번 역사 탐방은 험난할 것 같은 예상이 들었다. 고학년 친구들이 다른 행사로 빠졌고 참여한 친구들은 거개가 초등학교 3학년 2학년 1학년이다. 여기에 일곱살 꼬마 친구들도 있다. 탐방하기 전에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시작했다. "선생님은 여러분 나이 때는 신동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왜요?" "왜요?" 한다.

요즈음은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은 물론 영어까지 익히는 세상이지만,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했던 70년대 그 무렵에는 입학할 때 한글을 아는 아이가 드물었다. 간혹 자기 이름 정도를 쓰는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시절에 이름뿐 아니라 사는 주소를 칠판에다 줄줄 써내렸더니 신동이라 부르더라 했다. 아이들이 모두 가소로운 듯이 웃는다. 겨우 10살 안팎 친구들을 데리고 거창하게 역사 탐방은 무슨, '의림사'라는 절 이름 하나만 알아도 큰 수확이니 그냥 열심히 신나게 놀자는 얘기를 그렇게 끄집어낸 것이다.

의림사는 원래 이름이 봉국사였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이름난 사명대사가 머물자 의병들이 숲처럼 모였다 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천년고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금 물감을 칠한 단청이 선명하다. 이제는 어디 가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절간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절간에는 어느 하나라도 아무 의미없이 있는 것들이 없다.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절 공부의 기본 자세다. 아주 쉬운 몇 문제를 뽑아 미션으로 줬다. 의림사 석탑이 몇 층인지? 기단은 몇 개인지 물었더니 무척 헷갈려 한다. 뭐든 그렇지만,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다. 기단이 한 개인 것도 있고 두 개인 것도 있고 해서 몇 층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염불당 앞에 있는 큰 식물을 알아맞히는 문제는 어려울까봐 객관식으로 냈다. 1번 파초, 2번 수국, 3번 바나나, 4번 보리수. 그런데 파초라는 것을 단 한 팀도 맞히지 못했다. 간혹 수국이라고 적은 팀도 있었지만 대부분 보리수라고 적었다. 부처님 하면 당연히 보리수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냥 그렇게 적은 모양이다.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정각(正覺)을 이뤘다는 그 보리수나무는 아열대에서 자라기에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자생할 수 없다고 한다. 의림사 염불당 앞 파초는 불교 경전에 많이 나온다. 줄기가 양파처럼 껍질이 겹겹이어서 하나씩 벗겨나가면 결국은 아무 것도 없기에 불교에서는 이를 무아(無我)에 견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대웅전 처마에 달려 있는 종이 풍경임을 아는 아이도 없었으니 파초를 알아맞히는 문제는 아주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풍경에 왜 물고기가 달려 있는지, 산 속 절간에 목탁이나 목어처럼 물고기가 왜 많은지, 까닭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고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늘 깨어 정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설명을 곁들이며 거락숲으로 옮겨갔다.

역사 탐방에 나선 진해 웅동·동부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의림사 대웅전 창살이 어떤 무늬인지 살피고 있다.

거락숲은 진전천을 따라 아름드리 나무가 이어져 있는 마을숲이다. 전남 담양에 있는 관방제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규모로 치자면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근사하다. 나무나 숲도 잘 가꾸고 자라면 훌륭한 문화재가 되고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런 좋은 숲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뜻밖에도 주변 사람들이 많이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가을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선 거락숲은 한여름 푸른 녹음이 한결 누그러져 부드러운 빛깔로 바뀌고 있었다. 아래로 햇살에 젖은 냇물이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다. 발을 담그기에는 조금은 차가운 기운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너도 나도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준비한 수건으로 발을 닦은 뒤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과 숲 사이로 이어지는 도랑을 걸었다. 하나둘, 셋넷, 참새, 짹짹, 아이들 즐거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점심을 먹고 창동으로 달리는 버스에서는 아이들 말고 함께 나선 선생님들에게 물었다. 박물관이나 문화재가 있지도 않은 도심 한가운데 창동·오동동으로 역사탐방을 가는 까닭을 잘 모르겠는 분 솔직하게 손을 들어 보실래요? 그랬더니 몇 분이 손을 들었다. 아마 손을 들지 않았어도 창동·오동동으로 역사탐방을 떠나는 까닭을 잘 모르시는 분이 있지 않았을까!

의림사 염불당 앞에서 석탑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에 파초가 보인다.

창동에 조창이 있었다는 설명을 하기 앞서 조창이 무엇인지부터 끄집어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돈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 살림을 꾸리려면 세금을 걷어야 한다. 지금은 돈으로 받지만 예전에는 쌀이나 물건으로 세금을 냈다. 곳곳에서 거둔 물건을 대부분 바다 물길로 옮겼는데 그때 물건을 쌓아두던 창고가 바로 조창이다. 창동에는 8개가 있었는데 지금 창동이라는 지명과도 관련돼 있다.

이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도 유명한 지역 최초 주식회사이자 무역회사인 원동무역 건물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며, 6·25전쟁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명령으로 보도연맹과 관련해 구산 마을과 거제도 사이 괭이바다에 수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뒀던 옛 시민극장(당시 이름 공락관)에 대한 설명과 마산을 두고 민주성지라고 일컫는 계기가 된 3·15의거 발원지가 창동에 있다는 설명도 재미있게 곁들였다.

창동·오동동 미션은 학년이 어린 만큼 되도록 쉽게 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분식점·떡볶이집, 3·15의거 발원지, 시민극장 자리 등을 사진에 담은 다음 아고라광장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대부분 진해 친구들이라 창동이 처음이었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찾아야 한다는 아이들 열정 때문에 선생님들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다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열심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무엇을 하더라도 즐기는 것이 최고다. 즐겁게 놀면서 단 하나라도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다. 다음에 진해 친구들이 다시 창동을 찾게 될 때 훨씬 새롭게 마산이 다가서지 않을까 싶다.

※이 기획은 두산중공업과 함께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