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간 땀으로 일군 황금빛 인생…봄~가을 새벽 4시 일어나 하루 시작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암하삼거리에서 77번 국도를 따라 고성군 동해면 방향으로 향하면 창포만이 나온다. 철새들 터전인 갯벌을 마주하고 황금색 물결로 출렁이는 들녘에는 가을걷이에 분주한 농기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아내는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고 남편은 경운기로 노동의 결실, 쌀을 나른다. 

전점도(67·창원 마산합포구 진전면 이명리) 씨가 28살에 시작해 39년을 함께 해온 진전면 이명리 논에도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봄에 모내기를 시작으로 장마 이후 강수량이 유독 많았던 여름을 거쳐 추수의 계절인 가을까지 그의 일과는 변함이 없다. 

새벽 4시 일어나 밤새 안녕한 소들과 인사를 나누고 논으로 나간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밭에서 고추와 이야기를 나누고 창포만에 저녁노을이 떨어질 때 농기계를 만지며 하루를 마감한다. 2만 평(100마지기) 논과 30마리 소, 집 앞 고추밭과 포도나무, 집 뒷산 감나무밭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농부 전 씨는 5시간 잠자리도 호사라고 생각한다.

이명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전 씨도 젊은 날 성공을 꿈꾸며 도회지로 떠난 적이 있었다. 4남 2녀의 장남 전 씨는 댓 마지기의 논농사로 학업은커녕 집안 살림살이도 꾸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렵게 졸업한 진전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산으로 향한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되던 1966년이었다.

"친척이 부산진구에서 막걸리 도매업을 했어요. 자전거에 막걸리를 싣고 배달일을 6년 하고 24살에 군대에 갔습니다. 제대 후 막걸리 소매업을 할 요량으로 돈벌이하러 군대에 간 거죠."

수확한 벼를 나르는 전점도 씨.

그에게 베트남 전쟁은 새로운 돌파구였다. 무늬만 농사꾼이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 학업과 생계를 꾸려오던 전 씨는 마지막 월남 파병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1972년 비둘기부대 건설공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이다. 생활력 강한 그는 패배한 전쟁에서 무사히 제대를 했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막걸리 소매업을 부산에 차리려 할 때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장가도 가야하고 고향도 지켜야하니 진전면 이명리로 돌아오라'는 것.

28살, 그가 도회지 성공을 꿈꾸며 집을 떠난 지 10년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 생계 수단은 여전히 댓 마지기 논이 전부였다. 그는 귀향을 하며 두 가지 결심을 했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는다.' 

전 씨가 두 가지 약속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은 부지런함과 성실함뿐이 없었다. 전업농부가 된 그는 소작농을 마다치 않고 농사를 지었다. 그에게 결혼은 집안을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아내 김말란(59) 씨는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은 '참 농군'이었다. 

시댁의 어려운 가정형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 씨는 한국 현대 농업사를 그대로 관통하며 살아왔다. 농업을 주업으로 돼지가 소득원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돈사를 짓고 돼지 파동을 겪었다. 과수가 전망이 밝다는 말에 토마토 농사도 지었다. 시행착오도 겪고, 실패도 맛보았지만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새마을 운동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변신시켰고 마을에 신작로도 놓아주었다고 강조한다. 전 씨는 올바른 농부는 땅과 하늘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변명하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농사꾼 전 씨 철학은 도전하는 삶에 근간이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창포만에 굴을 양식하고 뒷산에 감나무도 심었다. 한미FTA가 발효되던 날에도 논에 물을 대었다는 그는 '농사지 천하대본(農事之天下大本)'이라는 글귀를 가장 좋아한다며 농사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치하시는 분들이 논에 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분들이 모른다고 따지거나 항의하지 않아요. 정부 탓도 하지 않아요. 농사도 짓는 사람이 경쟁력을 갖추면 됩니다. 농산물 품질을 좋게 만들면 도시 소비자는 알아줍니다. 저도 부산에 쌀 300가마 정도 직거래합니다. 앞으로 농업도 어떻게 대처하고 무엇으로 도전하느냐가 관건이죠."

하루 24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39년을 달려온 그에겐 '가족 행복'이라는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전 씨는 지금 먹고살 만한 이유가 함께 농사 지으며 고생한 아내 김말란 씨 덕분이라고 한다.

"제 나이 또래와 똑같아요.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 가르치고 자식 키우려면 몸이 조금 힘들어야죠. 농한기에 공사판도 많이 돌았죠. 지금 먹고살 만한 것은 다 집사람 덕입니다. 아내는 자전거부터 오토바이, 경운기, 자동차, 콤바인 등 5종 세트 면허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농업을 둘이서 같이 하니 이 정도 농사가 가능하죠. 내 인생의 보배입니다."

그가 1년 365일 중, 들녘에 나가지 않는 날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계모임, 동기회, 산악회, 전업농 회의 때도 우선순위는 농사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만 하는 것 같죠. 그래도 아내와 갈 곳은 다 갑니다. 어제는 논 일 조금 일찍 마치고 오후 4시에 마산국화축제장에 다녀왔어요. 요즘은 자식에게 손 안 벌리고 손자 녀석들에게 용돈 주려고 농사짓습니다. 허허."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이명리를 지키는 전점도 씨는 손자에게 약속한 올겨울 제주도 가족 여행을 위해 힘차게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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