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춤] 서피랑을 아시나요

도심의 밤 밝히던 홍등 불 꺼지고

통영 충렬사 인근 서문고개부터 산언덕이 바다를 만나 멈춘 산비탈, 서호천과 서호·명정·문화·항남동 등 옛 시내를 내려보는 곳이 서피랑이다. 통영성의 서쪽 급비탈 지대인 이곳은 현재 정비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통영성의 서쪽 초소이자 기막힌 절경을 더하는 언덕 꼭대기 건물이 서포루인데, 그 오른쪽 아래가 사창가 '야마골'이다.

부산과 여수 중간에 있는 통영은 돈이 넘치던 곳이었다. 일제가 공출을 위해 서피랑 아래 등을 메우던 그 시기 통영 사람들은 선원과 일꾼들을 위해 김밥을 팔았다. 그것이 충무김밥이다. 서피랑 아래에 통영의 첫 꿀빵집 '오미사'는 1960년 문을 열며 명물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통영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으로 포주와 술과 몸을 파는 여자들이 붉은 등을 밝혔다. 사창가는 서피랑 공사에 묻혀 지금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주민들은 "집창촌(성매매 집결지)은 99계단이 끝나는 지점과 위쪽에 20채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했다.

충렬사가 보이고 통영운하가 보이던 경치 좋은 비탈에, 창녀들은 사람을 기다리며 사람과 비켜 살았다. 단속이 심해지고 손님이 없자 10년 전쯤 홍등을 끄고 이들은 서피랑을 떠났다.

사창가로 가던 99계단을 주민들이 단장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김용우 현 명정동장이 활용 아이디어를 낸 이 계단은 현재 1부터 99까지 숫자를 계단마다 페인팅했다. 박경리 선생의 시를 난간에 붙이고, 말뚝박기 인형을 좀 생뚱맞게 가져다 놓고, 동네 아지매들이 '몸뻬 패션쇼'를 지난해 10월 열어 서피랑 계단 개장 홍보를 했다.

서피랑 인근은 경남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보급된 곳, 이런 도심의 옛 영화를 뒤로하고 인구가 줄어드는 등 슬럼화를 겪고 있다. 6·4 지방선거 당시 이곳 서호천 생태하천 사업비인 국비 294억 원을 시가 반납한 것이 선거 기간 논란이 됐던 것 말고, 이 지역은 점점 쇠퇴해 갔고, 중심에서는 멀어졌다.

서피랑 99계단에 그려진 그림들. /김구연 기자

윤이상·박경리…예술가들의 고향

서피랑 인근에, 죽어서도 고향에 오지 못한 불운의 작곡가 윤이상 흔적이 있다. 그가 학교 다녔던 길이 있고, 생가가 있고 음악의 밑천인 파도와 통영이 있다. 표절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 '돌아와요 충무항에' 작사 작곡도 이곳 서피랑 아래 통영항이 원 고향이다.

'한실댁은 코를 풀고 멍멍한 소리로 말하며… 서문고개를 넘는다. 물감는 처녀, 각시들로 밤길은 어수선하였다…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박경리는 한실댁 입을 통해 태어난 곳 서피랑 서문고개를, 아픔을 더하는 기막힌 배경으로 써먹었다. 박경리는 이곳 서피랑 서문고개에서 태어났다.

또한 서피랑은, 일본인 아내를 애타게 그리던 화가 이중섭을 품에 담은 산언덕이기도 했다. '꽃'의 시인 김춘수 생가가 근처고, 시에 나오는 김상옥의 생가는 서피랑 슬하에 있다. 땅끝 통영에서 반도 끝 두만강으로 시집간 누이를 그린 김상옥의 시조 '봉선화'는 그리움을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이라고 표현했다. 저 솜씨 하며, 이 걸작을 쓴 시인의 생가가 서피랑 아래 항남동 64번지에 있다.

통영 서피랑 일대 전경. 충렬사 인근 서문고개부터 산언덕이 바다를 만나 멈춘 산비탈에서 서호천과 서호·명정·문화·항남동 등 옛 시내를 내려보는 곳이 서피랑이다. 오른쪽 위 바다쪽으로는 통영국제음악당이 보인다. /김구연 기자 

핍박받는 자들의 어머니 '공덕귀'

그리고 공덕귀 여사가 있다. 박정희 쿠데타로 물러난 대통령 윤보선 부인이 공 여사다.

그는 '핍박 받는 자의 울타리'로 불렸다. 육영수, 이순자, 김옥숙으로 이어지는 대통령 영부인 스타일이 있지만 공 여사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절해 투옥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피우려 할 즈음 총칼 앞에…"라고 눈물을 흘렸던 그는, 1970년 이후 박정희 군부에 저항하며 인권 강연회를 열고,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를 날마다 들락거린 일화로 유명하다. 여성 노동자들의 처참한 삶을 보다 못해 1977년 방림방적 체불임금 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내가 영부인이었기 때문에…"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민주화 사건에 관여했고 직접 나섰다. 그는 자리가 사람을 귀하게 했던 다른 대통령 영부인들과는 달리, 스스로 낮은 곳으로 갔다. 하지만 세상이 이래선지, 그는 고향 통영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런 말을 들었다. "서피랑 옆 명정골 공덕귀 여사 생가를 둘러보고 99계단을 올라라. 서피랑은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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