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5) 하동

◇쌍계사의 최치원 관련 유적

우리나라에서 관련 유적이 가장 많은 인물을 꼽자면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857~?)이 으뜸이다. 부산 해운대, 양산 명경대, 마산 월영대, 함양 상림, 합천 농산정, 하동 세이암 등등 곳곳에 있다.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열전에서 최치원을 두고 "서쪽에 가서 당나라를 섬기다가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니,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산림 아래와 강가·바닷가에 누정을 짓고 솔과 대를 심었으며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가 모두 그가 거닐던 장소다"라고 적었다.

이렇게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였으니 과연 쌍계사와 하동에는 최치원 자취가 적지 않다. 쌍계사 이르는 길목인 하동 화개면 탑리에는 화개장터가 있다. 해방 이전만 해도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큰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는데 지금은 시골 정취를 많이 잃었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따위를 갖고 나왔고, 구례나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다. 곳곳을 떠도는 장돌뱅이들은 생활용품을 지고 왔고, 여수·광양이나 남해·사천·통영·거제서는 섬진강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를 싣고 왔다.

옛 정취 사라진 화개장터. /김훤주 기자

예서 구례 전라도로 드는 길을 버리고 화개천을 따라 십리벚꽃길을 오르면 끝자락 즈음에 쌍계사가 놓여 있다. 십리벚꽃은 봄 꽃, 여름 그늘, 가을 단풍, 겨울 앙상함으로 스스로를 가꿔 사철 모두 대단하다. 쌍계사는 들머리부터 최치원의 자취가 나와 있다. 쌍계 석문(雙溪石文)이다. 길 왼편과 오른쪽에 따로 놓인 바위에다 제각각 '쌍계'와 '석문'을 새겼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썩 잘 쓴 글씨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절간 서민스러운 풍모와 닮았는지 수수하고 푸근하고 만만하게 보이는데 최치원이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한다.

뜨락에는 최치원의 실물이 있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살짝 비틀어져 놓여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다.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와 함께 최치원 사산비명으로 꼽힌다. 최치원이 몸소 문장을 짓고 글씨도 썼으며 빗돌 머리글까지 적었다. 진감선사(774~850)의 한살이를 적었는데 죄다 한자여서 내용을 알 수 없고 안내문 설명도 풍성하지 못해 좀 길지만 한글 번역문이라도 붙이면 좋겠다 싶다.

드문드문 옮겨보면 이렇다. 쌍계사에서 주로 활동한 때문에 쌍계사 관련이 많다. 830년 당나라서 돌아와 지리산에서 화개 골짜기 삼법화상이 722년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를 꾸렸다. 838년 민애왕이 진감선사에게 혜소(慧昭)라는 이름을 내렸고 선사는 '옥천(玉泉)' 현판을 걸고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웠다. 850년 정월 9일 새벽 '장차 갈 것이다. 형해를 갈무리해 탑을 세우지도 말고 자취를 적어 기록으로 남기지도 말라' 하고는 앉은 채 입적했다.(그런데도 최치원은 왕명을 따라 이 비명을 만들었다.)

탑비를 보면 선사는 불교음악 범패(梵唄)를 잘했다. "목소리가 금옥 같았으며 곡조는 구슬프고 소리는 개운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웠다.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범패를 했던 데가 팔영루(八泳樓)다. 섬진강에서 헤엄치는(泳) 물고기를 보고 팔(八)음률로 불교 음악 어산(魚山)을 지었다는 얘기다. 바라보는 눈맛이 좋고 제대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쓴 듯한 기둥들은 쓰다듬을 때 손맛이 좋은 팔영루다.

경내에서 왼편으로 오솔길을 오르면 불일폭포로 이어진다. 가는 길 가운데 즈음에 환학대(喚鶴臺)가 있다.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간 자리라는데,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여기서 지었다 한다. 최치원 이래 옛 사람들은 여기 가까운 불일평전이나 불일폭포 둘레를 신선이 푸른 학과 더불어 노닌다는 청학동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직도 청학동은 확인되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는, 걱정과 욕심과 잡념이 모조리 사라진 마음자리 그 자체가 바로 청학동인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에서 신선이 된 최치원

최치원이 학을 타고 날아간 데는 어디일까. 지리산 골짜기에 전해지는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냇가에 꽂은 다음 냇물 흐르는 너럭바위에 앉아 귀를 씻은 일이다. 귀 씻기, 세이(洗耳)는 귀뿐 아니라 귀를 통해 들어온 말까지 지우는 것이고 따라서 속세를 등지는 일이기도 하다. 쌍계사를 나와 지리산 쪽으로 더 올라가 마주치는 범왕리의 화개초교 왕성분교 앞에는 아름드리 푸조나무가 높다랗게 솟아 있고 개울 건너편에는 세이암(洗耳岩)이라 적힌 바위가 있다.

왼쪽 너럭바위가 세이암. 최치원의 글이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가면서 지팡이를 꽂았는데 거기서 난 싹이 자라 이 푸조나무가 됐다고 한다. 최치원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자기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자기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푸조나무처럼 고운 또한 지리산 어딘가에 신선으로 살아 있을까?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화개천이 넘쳐흐르는 너럭바위가 세이암이다. 洗耳岩이라는 한자 말고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여러 바위에 새겨져 있지만 모두 최치원이 쓴 것 같지는 않다. 한 나절 머물러 탁족을 하면서 볕바라기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거기서 싹이 자랐다는 화개면 범왕리 푸조나무.

마을 사람들은 세이암 석 자를 최치원이 손가락으로 적었다고 얘기한다. 손가락으로 휘젓기만 했는데도 바위가 움푹 파일 만큼 도력이 세고 신통했다는 말이다. 마을에서 최치원은 어김없는 신선이다. 최치원은 여기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 물론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지리산 아닌 가야산에서 생을 마쳤다고 기록했다. "마지막에는 식구들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다가 늙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인사에는 동복형인 현준 스님이 있었고 도(道)로써 사귀는 정현 스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록 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일세를 뒤흔들만큼 대단한 학문을 갖췄음에도 뜻을 펴지 못한 최치원을 동정하고 또 그렇게 최치원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자기를 그이와 동일시했던 백성들은 지리산에 기대어서도 최치원을 신선으로 만들었고 신선 최치원은 지금도 사람들 마음에 살아 있다.

◇운암영당과 고운 선생 영정

최치원을 이처럼 옛 사람들이 신선으로 여겼음을 알려주는 그림이 있다. 양보면 운암마을에 운암영당이 있다. 원래 '고운 선생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2009년 도둑맞을까봐 걱정한 후손들이 국립진주박물관에다 맡겼다. 여기 있던 영정은 문신상으로 오른쪽 위에 문창후최공지진영(文昌候崔公之眞影)이라 적혀 있다. 오른편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왼편 촛대 받침을 두고 뒤로 구름 속 대나무가 배경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이 X선을 쬐자 그림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나타났다. 탁자와 받침이 있는 왼편과 오른편에 동자승이 한 명씩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했음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화기(畵記)도 발견됐는데 '건륭(乾隆)58년(1793)' '하동 쌍계사', 그린 사람과 시주한 사람 이름 등이었다.

▲ 고운선생 영정.
영정에서 X선으로 동자승을 찾아냈다. /국립진주박물관

지금은 영정을 국립진주박물관에 보내고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는 운암영당은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편에 자리잡은 덕분인지 고즈넉하기만 하다. 들머리 길게 늘어서 있는 나무들도 품새가 늠름하게 잘 자라 있다. 분위기가 그윽해 앉아서 마냥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 영정은 지금껏 여러 곳을 떠돌았다. 쌍계사에 있다가 1825년 화개면 금천사(琴川祠)로 옮겼고, 금천사가 없어지자 1868년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다가 지금은 국립진주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한평생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긴 최치원과 퍽 닮은 행로다.

고운 선생 영정이 있는 양보면 운암영당.

◇배드리 위에 들어선 하동읍성

풍경이 멋들어진 섬진강이 느릿느릿 흐르고 우뚝 솟은 지리산이 줄기를 뻗치는 하동은 오만 군데가 명승이고 절경이다. '역시 하동!'이다. 명승 절경에는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기가 십상인데 그런 것들 되풀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아직 발굴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하동읍성은 따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하동읍성은 하동읍에 있지 않다. 고전면 고하리 149m 높이 양경산 꼭대기를 둘러싸고 있다. 남문이 아래쪽에 있고 동문이 산마루 가까이에, 서문은 그 맞은편에 있다. 물줄기는 남문 아래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데, 아래 고하마을까지 옛적 배가 들어왔다 해서 일대를 배드리라 이른다. 주교천(舟橋川)인데, 섬진강과는 고전면 전도리·금성면 궁항리에서 넓게 습지를 이루며 합류한다. 덕분에 일대 골짜기가 넓고 기름진 들판을 끼게 됐다. 산지와 들판과 물줄기가 어우러지다 보니 읍성이 들어섰지 싶다.

하동읍성은 특징이 여럿이다. 첫째, 읍성은 보통 평지성이나 평산성(앞은 평지 뒤는 산지)인데 하동읍성은 산성이다. 둘째, 성곽 기본 양식을 규정한 <축성신도(築城新圖)>를 세종 임금이 발표(1438년)하기 전인 1417년 만들어졌다. 셋째, 공격하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무찌르는데 쓰이는 치성과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제대로 남아 있다. 넷째는 평지성에서나 보이는 해자가 산성인데도 뚜렷하게 파여 있다. 또 학계에서는 문자로만 알려져 왔던 양마장(羊馬墻 급할 때 임시로 피할 수 있도록 성곽 바깥에 두른 흙두둑)이 실물로 확인됐음도 꼽는다.

여기에 더해 읍성 마루는 빼어난 전망을 안겨준다. 이런 전망이 옛날에는 성을 지키는 데에 필수였겠는데, 금오산을 비롯해 빙 둘러선 산과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하동을 다스리는 읍치(邑治)는 고려시대부터 줄곧 여기였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1593년 관아·향교 따위가 불탄 이후 1661년부터 다른 데로 옮겼으며, 하동읍에는 1703년 자리를 잡았다.

읍성 안에는 사람 사는 민가가 드문드문 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이 살지 않는 진주성 공원처럼이 아니고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낙안읍성처럼 복원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남문 왼쪽으로는 비탈을 따라 석성을 새로 쌓았는데 위로 옛 모습 그대로인 성곽이 이어지는 데 견주면 많이 낯이 설다. 성안에는 이 밖에 연못 자리도 발견됐고 관아터·향교터는 지금도 발굴이 되고 있다. 마을을 지나 오르는 길은 비록 콘크리트로 포장됐어도 괜찮은 편이고 읍성 들머리 올라 있는 멋진 나무들이 풍경을 더욱 멋지게 해준다. 반면 성곽 안쪽 탐방로에 깔린 붉은 우레탄은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전통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

하동은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 차나무를 심은 데로 알려져 있다. 물론 뚜렷하게 받쳐주는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는 828년 당나라에서 김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갖고 오자 신라 흥덕왕이 명령해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적었다. 사람들은 이 '지리산'을 두고 여러 갈래로 알아본 결과 '쌍계사 일대'라 규정하고 있다. 쌍계사 들머리에 이 차나무 시배지(경상남도 기념물 제61호, 1987년 지정)가 있는데 어쨌든 하동 화개·악양 일대는 오래전부터 차나무를 가꾸며 여러 가지 차를 만들어 마셔왔다.

쌍계사 들머리에 있는 차나무 시배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61호.

전통 차로 하동보다 더 이름이 나 있는 데가 전남 보성이다. 그래도 야생 차는 하동이 으뜸이다. 화개·악양 일대에서 차나무를 기르는 이들의 애정과 애씀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2006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264호로 지정된 정금리차나무가 이런 사실을 일러준다. 나이가 100살 안팎이라는데, 지금처럼 차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대나무·참나무 수풀 속에서 살아왔고, 그러면서도 원래 모습을 지켰고 크게 자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문화재가 되도록 만든 노력이다. 차나무가 가만있는데도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 문화재로 지정했을 리는 없다. 차와 차나무를 아끼는 이들이 나무를 찾아내고 널리 알려 결국에는 이렇게 문화재가 되게 하지 않았을까. 단감으로 유명한 창원·김해랑 견주면 이런 차이를 바로 알 수 있다. 창원에도 김해에도 심은 지 100년가량 되는 단감나무가 여태껏 생존해 있지만 이렇게 문화재로 삼아 지역 특산물을 알리는 상징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박경리 선생이 쓴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참판댁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모티브가 됐던 조씨고가(조부자집)도 있다. 소설 <토지>를 따라 만든 최참판댁이 자리잡은 데서 한참 뒤쪽인 악양면 정서마을에 있다. 사랑채 둘과 사당을 비롯해 여섯 채가 없어지고 안채와 연못만 남았다. 가운데 더운 여름에 밥 지을 때 썼던 건물과 부엌 뒤쪽 기와를 둘러쓴 측간이 이채롭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악양 너른 들판이 눈에 든다. 이 집 조씨 어른은 사방 십리 안쪽에 조씨 집안 말고도 천석지기가 다섯 더 있었다고 일러준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