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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이 지은 진주성 옛 이름 촉석성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76) 통영별로 42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지난 여정은 유곡동에서 남동쪽으로 길을 잡아 진주성 서쪽에서 성의 북성벽 외연으로 난 인사동 길을 따라 진주성에 다다르면서 마감하였습니다. 오늘은 진주성을 둘러보고 남강을 건너 사천으로 이르는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다.

고지도에 묘사된 옛길과 대사지

옛 지도에는 지금은 없어진 중안동의 대사지(大寺池) 남쪽으로 열린 길이 진주성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대사지는 <삼국유사> 권제2 기이 제2 혜공왕에도 나오는 오래된 못인데, "대력(大曆 : 당 태종의 연호, 766~799) 초년에 강주(康州 지금 진주) 관청의 큰 건물 동쪽에서 땅이 점점 꺼져 못이 되니(어떤 책에는 큰 절 동쪽의 작은 못이라고 한다) 세로가 13자, 가로가 7자였다. 갑자기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이어서 점차 커지고 못도 따라서 커졌다"고 생성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혜공왕 2년(766) 2월 기사에는 "강주의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가로세로가 50여 자이고, 물빛이 청흑(靑黑)이었다"고 나옵니다.

진주성이 유지될 때는 성의 북쪽 해자(垓字)로도 기능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못을 메워 지금의 진주초등학교와 진주경찰서를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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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원래 이름은 촉석성(矗石城)이었습니다. 이름이 비롯한 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 누정 촉석루에 실린 하륜(河崙 1347~1416)의 기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담암(淡庵) 백 선생(백문보 白文寶, 1303~1374)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고 한 바에서 남강 공격사면의 촉석에 의지하여 쌓았으므로 그리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을 처음 쌓은 때는 잘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의 '성문기(城門記)'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습니다. "… 총각 적에 여기서 유학하며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 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 정사년(우왕 3년, 1377)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고 나옵니다. 이어지는 기사는 이태 뒤인 1379년 지밀직 배공(배극렴, 1325~1392)이 강주(康州 진주의 당시 이름)에 진장으로 와서 목사에게 공문을 내어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던 중 왜구에게 함락되었다가 고려군이 이듬해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에 목사 김중광이 수축을 마무리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하륜이 공민왕 13년(1365)에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던 유학 시절에도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성을 쌓은 때를 노인들도 알지 못했다고 하니 최초의 성은 그 시기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외 이중으로 된 큰 성으로, 내성은 둘레 1.7㎞, 외성은 약 4㎞에 이릅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크게 쳐부순 임진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지이고, 1593년 6월 29일의 재침 때는 군관민 7만 명이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論介)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역사적 사실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창원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영성이 이곳으로 옮겨와 우병영으로 기능하였고, 당시 이곳으로 병영을 옮긴 우병사 이수일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쌍충사적비, 정충단,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문루, 창렬사, 호국사 등의 유적과 임진왜란이 전문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어 연중 답사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다시 남강을 건너다

남강은 진주의 남쪽을 흐른다고 해서 비롯한 이름이지만, 달리 남강의 대표적 명승에서 이름을 취해 촉석강이라고도 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 산천에 "남강(南江)은 주 남쪽 1리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 경계에서 정암진이 된다"고 나옵니다. 지리산 남쪽을 남강의 두 발원지 중 하나로 본 것에 근거하여 지금도 그곳에 발원지 표석을 세워 두었습니다. 발원지를 물줄기가 비롯한 곳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맞지만, 그 가운데서 하구에서 가장 먼 곳을 이른다고 규정한다면, 바로 그곳은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은 함양 서상면의 남덕유산 남쪽 기슭이 됩니다.

▲ 진주교에서 본 진주성과 촉석루.

같은 책 산천 신증에는 달리 촉석강(矗石江)이란 이름도 나오는데, 이곳에 누선(樓船)이 있다 했으니 책이 간행된 1530년 무렵에는 강심이 꽤 깊었나 봅니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진주성지도>를 보면, 남강을 건너는 배를 대어둔 나루는 지금은 없어진 성의 외성과 내성 동문 사이에 있었습니다. 대체로 지금 진주교 즈음이라 우리는 이 다리를 통해 남강을 건너 섭천(涉川)에 이릅니다. 섭천은 진주성 드나들던 길목이라 전하는데, 내를 건너는 곳이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즈음에서 남서쪽으로 망진산(172m)이 한 눈에 드는데, 진주의 안산이면서 북쪽 봉우리에는 고려 때부터 봉수를 두어 통신시설 기능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한국방송공사 진주 송신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섭천으로 건너온 길은 남강 앞이라 예전에 천전(川前)으로 불렀던 칠암동을 거쳐 석류공원 들머리에서 연암공대 쪽으로 이어집니다. <조선오만분일도> 거제도 14호 진주 지도에는 망경동과 칠암동 일대가 충적지로 묘사되어 있고 마을은 망진산 아래에 자그마하게 있습니다. 옛길은 대체로 지금의 2·3·33번 국도와 비슷하게 나 있고, 석류공원 들머리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를 따라 연암공대를 거쳐 남쪽 새터마을을 지나 경상대학교가 있는 개양동으로 향합니다. 망경동 남쪽 주약동은 약을 많이 심어서 약골 또는 약동이라 불렸으며, 이곳과 망경동 사이의 골짜기는 예전에 기와를 구운 곳이라 전합니다.

새비리

석류공원으로 이르기 전 남강의 공격사면에는 바위 벼랑에 길을 낸 비리길이 있었던 듯 새비리라 불리며, 지금도 그곳에는 같은 이름을 딴 농원이 있습니다. 진주에는 이곳 말고도 두 비리길이 있었는데, 옛 진주 팔경의 하나였던 옥봉 아래의 뒤벼리와 그 남쪽의 개비리입니다. 지금은 도로를 넓히면서 옛 자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새비리 길가의 전주이씨 시혜불망비와 형평운동가 강상호 무덤.

새비리가 있었던 강가를 따라 걷다보면,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 예스러운 빗돌이 있습니다. 통정대부 강재순의 처숙부인 전주 이씨가 베푼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1917년에 세운 것입니다. 진주에서 형평운동을 주도한 백촌 강상호(姜相鎬) 선생의 어머니로 뒤에는 강상호의 무덤이 있습니다. 길을 걷던 때 한창 봄나물이 돋아나고 있어서 동행한 세 여인은 먼 채집경제시대에 자신들이 행했던 역할에 빠져 있어서 덕분에 저는 빗돌을 찬찬히 살피고 다리품도 적잖이 쉴 수 있었습니다.

진주를 나서다

새비리에서 고개를 넘어 들게 되는 가호동과 가좌동 일대에는 먼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남긴 자취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남강가의 가호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취락과 무덤을 비롯하여 마을을 보호하는 환호와 함정 등이 조사되었고, 가좌동에는 경상대학교를 중심으로 그 앞뒤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유적 위치를 눈어림으로 살피고 대학촌을 지나니 이제 진주를 벗어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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