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말 서울 아산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경상대학교병원 경남지역암센터에서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아산병원에서는 닷새 동안 입원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검사만 받았는데 퇴원할 때 몇 백만 원이 나왔다. 네 형제는, 처음엔 대중없이 병원비를 감당하다가, 앞으로 아버지 암 치료를 해나가자면 돈이 많이 들 것이니 돈을 얼마씩 모으기로 했다. 그래서 500만 원씩, 모두 2000만 원을 모았다. 암 환자로 등록되면 진료비 본인 부담은 5%인가 그랬다. 그래도 갈 길이 먼데 발아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하게 들어가는 돈이 많았다.

1년쯤 뒤인 2012년 9월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경황없이 장례를 치르고 다시 네 형제가 모였다. 그 사이 큰형은 사망신고를 하고 아버지 이름으로 된 은행통장을 정리했다. 집, 전화요금, 전기요금, 수도요금 같은 것도 어머니 이름으로 바꾸었다. 큰형은 그동안 정리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우리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있다" 큰형은 농협 통장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 통장에 정확히 2000만 원이 있다. 돌아가시기 한참 전에 '병원비 많이 나올 텐데, 내 통장에 있는 돈을 쓰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큰형은 말했다. "돈은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라며 형은 말끝을 흐렸다. 컥! 울음이 터졌다.

아버지가 일손을 놓은 뒤부터 우리는 다달이 10만 원씩 용돈을 드리기로 했다. 20년 가까이 용돈은 인상되지 않았다. 큰형은 50만 원 이상 드리는 것 같았다. 작은 형은 손에 잡히는 대로 용돈을 드렸다. 하지만 나는 10만 원도 제때 못 드릴 때가 간혹 있었다.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가서 공공근로 신청을 하셨다. '노인일자리' 어쩌고 하는 사업인가 보았다. 한여름 땡볕에도, 찬바람 부는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길거리에서 담배꽁초와 휴지를 주웠다. 주말에 본가에 가면, 공공근로 하는 할매들에게 인기가 최고라며 자랑삼아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나라에서 주는 노인기초연금 같은 것도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버지는 꼭 필요한 곳 이외에는 쓰지 않고 그대로 돈을 모으셨다. 그렇게 모인 게 2000만 원이나 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 돈은 없는 것과 같으니 어머니 용돈으로 드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머니도 일로써 돈 벌 연세는 벌써 지났으니. 하지만 어머니는 "나는 필요 없다. 아버지 말대로 병원비 갚아라"고 하셨다. 형제간에 나눠 가지란 뜻이다. 한참 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 유언이니 제발 말 좀 들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게 되었다. 사십구재 지내는 날 어머니는 500만 원짜리 수표 넉 장을 준비해 오셨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하시며 형제들에게 돈을 나눠 주셨다. 나는 또 울었다. "자식들에게 짐 되고 싶지 않다"고 평소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서 울렁거렸다.

병을 얻기 전에도 그렇고, 투병 중이실 때도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이 많았을 것이며, 얼마나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을 것인가. 경로당 친구들과 모이면 '키마이' 한번 쓰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을까. 옥봉동 집에서 인사동 노인복지회관까지 20분 넘게 걸어가서 300원인가 500원인가 하는 점심을 드실 때, 중앙시장 지나면서 맛난 음식 냄새를 어찌 외면할 수 있었을까. 매주 수요일 옥봉성당에서 무료급식을 얻어먹으며 부끄러움은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당신 저승 가는 길 노잣돈 2000만 원을 그렇게 마련하셨을까.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이우기(이우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iwoo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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