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임에 불구하고 군항도시 진해는 한적하다 못해 태풍 전야의 고요함이었습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도시답지 않게 조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진해의 장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동차 경적음, 호객행위를 위해 인도 방향으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도 진해만은 비켜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을 붙잡고 흑백다방을 물어보니 곧바로 진해에 다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을 붙잡고 '흑백다방' 을 물었습니다. 아, 예 저쪽에 보이는 곳이라며 알려 주었습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건물이 들어선 것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흑백다방' 이름을 가진 간판은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말 그대로 흑백 사진속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내가 알고 찾아간 '흑백다방'은 '시민 문화공간 흑백'이라는 간판으로 바꿔 달고 있었습니다. 간판 위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since 1955 흑백'이라는 글자가 세월을 대신 말해주었습니다.

'흑백'으로 바뀐 간판

'흑백다방' 나이는 무려 59살입니다. 환갑이 가까워 오면서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면면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그룹은 있었습니다. 6·25전쟁 기간 전국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흑백다방'이었습니다. 한때 예술인들로 넘쳐났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습니다.

'흑백다방' 건물은 이웃한 진해우체국과 연령이 비슷합니다. 진해우체국이 1912년에 건립되었기에 이곳도 100년이 넘었습니다. 다방으로 문을 연 시기를 살펴보아도 '흑백다방'은 전국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전주시 경원동 한옥마을 주변에 위치한 '삼양다방'은 1952년 한국전쟁통에 문을 열었고, 진해 '흑백다방'(1955년), 서울 대학로의 학림다방(1956년)이 오래된 다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일요일 점심시간에 찾아갔지만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손 팻말에 적힌 곳으로 전화를 거니 곧장 주인이 내려왔는데, '시민 문화공간 흑백'을 운영하고 있는 여류 피아니스트 유경하 씨였습니다. '흑백다방' 들어서는 순간 이곳의 나이를 코 구멍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흑백다방의 내부 모습

야릇한 인조 향과는 거리가 먼, 오래된 나무 집에서 풍겨 나오는 어릴적 줄곧 맡아왔던 냄새였습니다. 앉는 의자는 언제 구입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1인용 가죽 의자는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실내 공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둥근 테이블까지 모두가 반백년 가까운 물건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최근의 것은 커피포트와 에어컨이 유일할 정도였습니다.

이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흑백다방'이 아니라 '흑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실 평수 40평에 불과한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내렸던 간판을 다시금 올리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환갑에 가까운 '흑백다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 보았지만 제 능력으로는 한계였습니다. 다행히 한편의 시구로 '흑백다방'을 적절하게 잘 표현된 작품이 있어 잠시 소개합니다.

"진해의 봄 흑백다방에 앉아

가버린 시대의 흑백 사진을 생각한다.

빛바랜 사진첩의 낡은 음계를 딛고

그 무렵의 바람같이 오는 길손

잠시 멍한 시간의 귀퉁이를 돌다

바람벽 해묵은 아픔으로 걸렸다가

빛과 색채와 음악이 함께 과거가 되는

그런 주술적 공간에 앉았노라면 시대를 헛돌려 온 바람개비

아무것도 떠나간 것이라곤 없구나…"

(김창근의 '흑백시대' 중에서)

2008년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다방이란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시청공무원의 말에 '흑백다방' 간판을 2년동안 일시적으로 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다방을 지우고 '흑백'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화려하고 남들이 탐을 내는 공간이었다면 아마 '흑백'의 주인은 오래전에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은 작고한 '서양화가 유택렬 화백'은 함경도 북청 출신이지만, 평생을 진해에서 예술 활동을 한 예술가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그의 둘째 딸인 유경아 씨가 홀로 이 공간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진해라는 삭막한 군사도시에 예술이란 단어를 만들어 냈고 오랫동안 함께 호흡한 결과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각종 공연이 줄을 지어 기다립니다.

흑백다방의 풍금.

지난 5월 22일 '흑백다방'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는데 5개월째 기다리는 중입니다. 흑백다방은 이 건물을 스쳐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을 스토리텔링으로 재탄생시킨다면 또 다른 진주를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강창덕(세상과 소통하기· http://blog.daum.net/gnccd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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