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4) 진주

◇충절의 고장

진주를 두고 다들 충절의 고장이라 한다. 그 으뜸 까닭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두고 벌어진 두 차례 전투에 있다. 첫 전투는 1592년 10월 5~11일 치러졌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병 3만 명을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관군 3800명이 물리쳤다. 진주성 바깥에서는 홍의항군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임계영·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이 기습 공격 같은 유격전을 펼쳤다. 진주대첩은 행주대첩 한산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주역 김시민은 10월 9일 왜적 총알을 이마에 맞아 18일 서른아홉 나이로 순국했다.

두 번째 전투는 이듬해 6월 19~29일 벌어졌다. 조선의 3000 관군과 6만 민간인이 10만에 이르는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숨진 패전이었다. 왜군은 모든 전력을 모아 함안·반성·의령을 점령한 뒤 이렇게 나섰다. 조선은 원래 군사가 많지 않았는데다 명나라는 지원군 투입을 거절했고 조정은 수성(守城) 포기를 명했으며 도원수 권율과 의병장 곽재우도 평지 진주성에서 10만 대군을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와 진주목사 서예원 등이 열흘 넘게 성을 지키며 싸웠다. 살아남은 민·관·군은 아무도 없고, 왜군은 성 안에 있던 살아 있는 생명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그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도 손실이 심각해서 전라도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왜군과 조선의 열하루에 걸친 싸움은 양쪽 모두에게 악전고투였다.

◇진주성과 촉석루

두 차례 전투의 처절한 현장 진주성은 이로써 진주의 성지(聖地)가 됐다. 역사와 문화가 한 군데 모인 진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본래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우왕 5년(1379) 돌로 새로 쌓았다.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 경상감사 김수가 왜군 침략에 대비해 새롭게 고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604년에는 마산 합포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이 옮겨왔으며 1895년 5월부터 진주관찰부, 1896년 8월부터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이 있었다. 일제 강점 이후 경상남도청이 설치돼 있다가 1925년 부산으로 옮겨갔다. 1905년 진주판관 박중양이 일부를 헐었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는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가 헐려나갔다.

이런 탓에 촉석루만 남게 됐었는데 촉석(矗石)은 삐죽삐죽 높이 솟은 돌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10년 (1618) 예전보다 크게 새로 지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됐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다시 불에 탔다.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 성금을 모아 복원했으며 요즘 들어 다시 국보로 지정해야 마땅하다는 운동이 새롭게 일고 있다.

진주성 촉석문.

진주성 전체 복원은 1969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추진돼 1972년 촉석문(동문)을 중건하고 1975년 정문인 공북문(拱北門)을 복원했다. 1979~84년 안에 있던 민가 751채를 철거해 사람이 살지 않고 공원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사람이 그대로 살면서 집안도 가꾸고 농사도 지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전남 순천 낙안읍성과 견주면 무척 아쉽다.) 1992~2000년 둘레 정비 등을 마무리했고 2002년 공북문을 2층 다락루로 다시 지었다. 사적 118호로 둘레는 1.7㎞다.

◇김시민·삼장사·논개

진주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는 첫 전투를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두 번째 전투에서 끝까지 맞서다 목숨을 잃은 세 장수(三壯士), 그리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논개가 꼽힌다. 이들을 기리는 갖은 유적들은 마땅히 진주성 안에 모여 있다.

창렬사는 진주성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1607년 선조에게서 이름을 새긴 액자를 내려받았다. 1868년 같은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같이 모시게 됐다. 맨 윗자리 김시민 신위에 더해 김천일·황진·최경회 등 진주성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 신위도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문화재 1호가 바로 김시민장군전공비다. 첫 전투 전공을 기록한 이 빗돌은 1619년 세워졌다. 경상남도문화재 2호는 이와 나란히 서 있는 진주촉석정충단비(晉州矗石旌忠壇碑)로 두 번째 전투에서 숨진 군·관·민을 기리기 위해 1686년 세워졌다. 비문에는 고종후(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김천일, 최경회, 황진, 장윤 등이 나온다. 1987년 설치된 임진대첩계사순의단도 있다.

진주성 안에 있는 김시민 장군 동상. /김훤주 기자

김시민은 많이 알지만 삼장사는 대부분 모른다. 김시민은 승전한 장군이고 삼장사는 어쨌든 패배한 장수인 탓이 큰 듯 싶다. 게다가 삼장사는 아직까지 누구누구누구라 공식 인증·확정되지도 않은 상태다. 어떤 이는 "1607년 경상순찰사 정사호가 창렬사 사액을 요청하는 장계에서 김천일·최경회·황진을 삼장사라 일렀다"고 얘기하고 다른 이는 김성일·조종도·이로라 주장하며 또 다르게 최경회·김천일·고종후를 거론하는 이도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인 셈인데, 두 번째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음이 분명하다면 3에 매이지 말고 모두 장사로 인정하면 어떨까 싶다.

임진왜란 진주성 관련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의기 논개다. 그이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는 1740년 세웠으며 지금 건물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사당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와 매천 황현 시판, 한말 진주 기생 산홍(을사오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지용이 자기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다)의 시판이 걸려 있다. 앞서 1721년에 세운 의암사적비도 있다.

진주성에는 호국사라는 절간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지휘소가 있었다 하고 의병들 집결 장소였다고도 한다. 또 여기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을 전문으로 전체 양상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의병들의 집결 장소였던 호국사.

◇농민도 기념할만한 진주

<동국여지승람>은 진주를 두고 '동방의 육해(陸海=산물이 풍부한 지역)'라며 "나라에 바치는 수산물과 토산물이 영남 여러 주의 절반"이라 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는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고 적었다. 충절의 고장을 풍성한 물산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충절은 당시 양반의 전유물이다시피 했고 그런 양반들을 위해 땀흘려 농사짓는 이들이 진주에는 많고 또 부지런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진주 풍속이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고 하나 늘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1862년 일어난 진주민란(진주농민항쟁)이 그것이다. 단성민란에 이어 두 번째 농민 봉기였는데, 진주민란을 시발점삼아 1862년 한 해만도 전국 71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통틀어 임술민란(임술농민항쟁)이라 하는데 진주에서 시작해 전라·충청도로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이른바 '삼정'(전정·군정·환곡)이 매우 문란해져 있는데다 새로 부임한 백낙신 경상우병사의 학정까지 더해져 백성들은 더욱 고달파졌다. 류계춘·이계열·김수만·이귀재 등이 함께 일을 꾸미는 와중에 2월 4일 단성에서 먼저 농민이 일어났고 진주서는 2월 14일 첫 봉기를 한 데 이어 18일 수만으로 불어난 농민들이 수곡장터(수곡면 창촌마을)를 떠나 진주성으로 갔다. 이튿날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에게서 부정부패 혁파 약속을 받아냈으며, 관리도 불태워 죽이고 부호들까지 습격했다. 조정은 경상우병사와 진주목사를 파직함으로써 군중을 달래는 한편 민란을 일으킨 주동 류계춘 등을 체포했으며 향리들은 곧바로 목을 잘라 효시했다.

진주민란은 곧바로 제압됐지만 파급력은 매우 컸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에도 나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기릴만한 상징이라든지는 오랫동안 없었다. 목숨을 빼앗긴 지 144년 만인 2006년 4월 5일 대평면 당촌리 산중턱에 있는 한 무덤 옆에 '진주농민항쟁을 이끄신 류계춘 선생의 묘'라 새긴 묘비가 들어섰고 진주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지 150년 되던 2012년 6월 24일 진주성 습격하는 농민들 발걸음이 시작됐던 수곡장터 현장에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진주상무사와 형평운동

진주는 상인 또는 상공인에게도 기념이 될만한 고을이다. 상공회의소에 해당하는 상무사(商務社)가 가장 먼저 만들어진 데 가운데 하나가 진주기 때문이다. 진주상무사는 보부상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진주·하동·남해·고성·함안·산청·함양·거창·합천·의령 등 17개 지역을 대상으로 1895년 상무회의소 규례가 제정된 이후 상무회의소에서 상무사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 있던 건물은 1936년 8월 27일 병자년 대홍수로 유실됐고 이태 뒤인 1938년 지역 대표 부자였던 정상진을 비롯한 123명이 1417원50전을 모아 지금 자리(옥봉동 447-46)에 다시 세웠다. 전통목조기와집에 재실처럼 지어진 진주상무사는 성격이 같은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상징성이 높다고 한다.

형평운동기념탑.

근대사에서 도드라지는 인권운동인 '형평운동'도 진주에서 일어났다. 1894년 신분제도가 혁파돼 백정도 평민이 됐지만 차별은 그대로였다. 기와집에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은 입을 수 없었으며 초상이 나도 상여를 쓰지 못했다. 1923년 4월 25일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호칭을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으로 진주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고 5월 13일에는 '백정은 인간이 아니더냐'로 시작되는 주지문도 나왔다. 가좌동 석류공원 들머리에는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강상호의 무덤이 있고 진주성 촉석문 앞에는 1996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형평운동기념탑이 놓여 있다.

◇향교·경로당·절간·성당·교회당

진주에는 이 밖에도 기릴만한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교육계는 진주향교를 기념할만하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옥봉경로당을 기릴만하며 불교계는 청곡사, 천주교계는 문산성당, 개신교 쪽은 진주교회를 기념물로 삼을만하다.

청곡사 괘불탱.

진주향교는 987년 고려 성종 때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돼 1011년 고쳐 지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는 1398년 문묘가 세워졌으며 1558년 지금 자리(옥봉북동 232-1)로 옮겼다. 우리나라를 통틀어 봐도 이른 시기에 지어진 향교로 경남만 두고 따져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겠다. 이는 1934년 지어져 지금껏 원래 용도대로 쓰이고 있는 옥봉경로당(玉峰敬老堂)도 마찬가지다.

월아산 기슭에 자리잡은 청곡사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절간이다. 통일신라 879년 도선국사가 세웠다는데 고려 말기 1380년 고쳐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2~12년 새롭게 들이세웠다. 채색이 잘 돼 있고 표현이 당당하며 필치가 섬세하다는 평가와 함께 국보로 지정된 청곡사영산회괘불탱은 길이가 10m 3층 건물보다 높다. 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삼층석탑, 대웅전, 영산회상도, 업경전 같은 문화재가 여럿이며 진양 출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아내가 된 신덕왕후 강씨의 원찰이기도 했다.

문산성당은 천주교마산교구 안에서 1900년 설립된 마산본당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됐다. 1899년 진주본당이 들어설 때 24개 공소(학교로 치면 분교) 가운데 가장 신자가 많았던 소촌공소가 전신인데 1905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1923년 건축된 한옥 옛 성당과 1937년 지어진 고딕 양식 현재 성당은 동양과 서양 건축 양식이 한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는 보기로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문산성당.

개신교에서는 진주교회(의병로 250번길 16)를 내세울만한다. 1905년 호주에서 온 휴 커렐(Hugh Currel) 선교사가 같은해 10월 22일 성내동 개인 초가집에서 처음 예배를 올린 것을 시초로 삼는데 처음 이름은 '진주읍 옥봉리교회'였다. 1909년 5월 9일~8월 1일 일반 신자들이 예배볼 때 백정 신자들과 동석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 형평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했으며 1919년 3월 18일 3·1만세운동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냈던 '진주기미독립만세의거기념종탑'도 있다.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