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이야기 탐방대] (2) 의령 망우당 곽재우 유적

경남도민일보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운영하는 경남이야기탐방대(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주관)는 청소년·예술인·블로거 셋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세 탐방대는 저마다 세 차례씩 지역 유적·명물을 찾아 거기 있는 '꺼리'를 엮고 묶고 맞춰 이야기로 풀어내는 일을 한다.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사진이나 그림일 수도 있다. 사실로만 이뤄질 수도 있고 상상력을 더해 전혀 새롭게 될 수도 있다. '숨어 있는' 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연들을 좀더 널리 알리고 재미있게 만들자는 취지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로 말미암아 지역이 더욱 풍성하고 빛나도록 이끄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곳곳에 마련하자는 것이다.

합천 남명 조식 유적을 둘러본 데 이은 두 번째는 의령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자취를 찾아나섰다. 예술인탐방대는 9월 22일 찾았고 SNS탐방대는 9월 30일 둘러봤다.(청소년탐방대는 학교 시험 일정 때문에 11월 2일로 멀찌감치 날짜를 잡았다.)

길라잡이는 지역 시인이면서 '의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화·관광 분야에서 여러 일을 기획·추진해온 윤재환 씨가 맡았다. 부탁하기 전에는 손사래라도 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하면서 단박에 승낙했다. 윤 씨는 농담·재담도 섞고 추임새도 발라 가면서 '사랑하는' 의령과 '존경하는' 곽재우에 대해 조곤조곤 일러줬다. 이런 인물을 두고 이야기를 엮어 봐도 매우 그럴듯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보덕불망비 비각과 쌍절각을 알리는 빗돌을 살펴보는 SNS탐방대.

괵재우는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침략을 위해 왜군이 대마도를 떠난 날이 4월 13일이었고 곽재우 의병은 아흐레 뒤인 4월 22일 처음 꾸려졌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찾아가는 의령 탐방은 의령읍 들머리 정암진에서 시작했다. 정암진(솥바위나루)은 곽재우와 그 의병이 두 번째 승전을 일궈낸 장소다.

육지길이 발달한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물길이 가장 손쉽고 안전했다. 왜군은 낙동강 지류 남강을 거슬러 의령~진주~산청~함양을 거쳐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갈 참이었는데, 곽재우 의병이 이를 막아냈다. 왜군은 강을 건너기 앞서 안전한 지대를 골라 깃발을 꽂았다. 깃발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곽재우 의병이 이 깃발을 늪지대로 들어가도록 바꿔 꽂았다. 이런 줄 전혀 몰랐던 왜군은 허우적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건너편 언덕에서 활을 쏘아댔다. "의령 사람들은 대첩(大捷)이라 합니다. 2000명 적군을 물리쳤지요." 윤재환 씨 얘기다. 곽재우는 이렇게 유격전에 능했다.

탐방대는 이어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에 들렀다. 생가는 마을에서 조금 북쪽에 있다. 원래 자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을 한가운데 현고수(懸鼓樹) 자리일 수도 있다. "의병박물관에 있는 '의병창의도'에는 곽재우 머물던 집 바로 옆에 현고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원래 모습이 남아 있지도 않은 생가를 거기다 새로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면서 북을 매단 느티나무가 현고수다. 550살 정도로 짐작되는데, 'ㄱ'자와 'ㄴ'자를 붙여 놓은 것처럼 휘어져 있어 과연 매달만했겠구나 여겨진다. 곽재우 생가는 본가가 아니라 외가였다. 본가는 현풍현(대구 달성군 현풍면)에 있다. 곽재우는 본가 재산은 물론 외가 재산까지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렇게 한 뜻은 입신양명에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을 멀리하고 가난을 가까이 했던 삶이 이를 증명한다. 다만 무엇이 옳은지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실천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따랐다. 스승 남명 조식(1501~72)이 평생을 두고 일러준 내용이기도 했다. 곽재우말고도 남명 제자 출신 의병장이 서른을 넘었다 하니 그 가르침의 강렬함, 사제지간의 돈독함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겠다.

세간마을에는 현고수 말고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곽재우 생가 앞에 우뚝 솟은 600년 넘은 은행나무다. 곽재우 장군의 출생과 창의는 물론 갖은 개인사와 가정사와 나랏일을 내려도보고 들여다봤을 나무들이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건너온 나무들인데도, 대부분은 감탄사 한 번 던지고 무심하게 지나간다.

곽재우 장군 생가 앞 600년 된 은행나무.

점심을 먹은 다음 곽재우 첫 전승지로 간다. 가는 길에 지정면 돈지마을 앞을 지난다. "곽재우 장군이 서른넷 되던 1585년에 과거에 급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문장이 선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방(罷榜)을 당합니다. 그 뒤 돈지 어딘가에 강사(江舍)를 짓고 임진왜란 때까지 3년가량 지냅니다. 돈지 시절에 왜군 침략을 예견하고 일대 지형지물을 세밀하게 익혔으리라 봅니다. 남명 조식이 자기 외손녀와 혼인하게 한 다음 유일하게 병법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곽재우였으니까요."

윤 씨의 설명을 들으며 기강(거름강)나루에 닿았다. 임진년 5월 4일과 6일, 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여기서 왜적을 무찔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선 최초 승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컸다. 이미 서울조차 5월 2일 왜군 손에 일찌감치 떨어진 상태였고 나름 준비가 있었던 수군조차 깨지고 있었다.(이순신장군의 첫 승리는 5월 7일 옥포해전이었다.)

곽재우는 물 밑에 나무막대를 박아놓고 거기에 걸린 왜선에다 화살을 집중해 쏘아 열네 척을 깨뜨렸다. 일대 지형지물에 밝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전술이었다. 기강나루에서 일군 임진왜란 최초 승리는 어떤 효과를 냈을까? 당시 조선 사람들한테 어떤 울림을 안겼을까? 칠흑처럼 캄캄한 절망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 아니었을까? '야, 이겼단다! 관군도 아닌 의병이. 죽는 줄만 알았더니 살 수도 있겠네. 싸우다 죽으나 붙잡혀 죽으나 매한가지니 한 번 나서볼까?' 실제로 이 최초 전투에 나섯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두 번째 정암진전투에서는 의병이 크게 불어나 있었다고 한다.

예술인탐방대가 남강가에 내려가 강 가운데 정암(솥바위)을 살펴보고 있다.

기강나루에는 보덕불망비가 있다. 곽재우 숨지고 나서 100년도 더 지난 1739년 영조 임금이 세웠다. '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有明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 글자는 적으나 뜻은 크다. 더 크게 이긴 정암진이 아닌 여기에 굳이 빗돌을 세운 애틋함도 나름 읽힌다. 기강나루전투 승리가 비록 작지만 당시 백성과 조정에 끼친 사회심리적인 영향을 제대로 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기강나루에는 쌍절각도 있다. 초계 마수진 전투에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의병장 손인갑과 아들 손약해를 기리는 빗돌을 품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닌데, 어쨌거나 이처럼 한 곳에 임진왜란 의병장을 기리는 빗돌이 둘이나 있는 경우를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예술인탐방대가 창녕 우강리 망우정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김훤주 기자

이제 곽재우 장군이 마지막 숨을 거둔, 낙동강 건너 창녕 도천 우강리 망우정이다. 곽재우는 1602년부터 대부분을 여기서 가난하게 지냈다. 모든 재산을 털어 왜적을 맞아 싸웠기에 가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했을까? '나라가 어려울 때는 부르지 않아도 마땅히 나가고, 할일을 다한 뒤에는 남아라 붙잡아도 마땅히 물러난다.' 임금이 불러도 때로는 나가고 때로는 나가지 않았다. 나가지 않았다고 1599년부터 이태 동안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도 살았다. 탐방대 구성원 대부분은 "이러구러 지내다 종신(終身)이나 제대로 하면 그만이라 여겼으리라" 짐작했다. 윤재환 씨는 "곽재우 장군은 이 망우정조차 자손한테 남기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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