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동구 밖 생태·역사교실](19) 거창

거창·함양·산청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경쟁이라도 하듯이 저마다 절경을 자랑한다. 제각각 다른 지역이지만 마치 색깔이나 모양이 엇비슷한 풍경화 속 한 마을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세 지역이 마치 커다랗게 한 고을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도 거창은 역사탐방을 떠나는 진해 친구들이 살고 있는 중부 경남에서 보자면 두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가장 먼 곳이다. 지금이야 길이 크게 나고 차편이 좋아 산골 오지라는 말이 거개 사라졌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창은 나들이길이 서울보다 더욱 멀고 험했다.

거창은 절경이 빼어난 산이 많기로 유명하다. 9월 27일 토요 동구밖 역사 탐방을 나선 곳은 문바위와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있는 금원산자연휴양림이다. 아이들에게는 거창이라는 고을도 낯설고 금원산도 낯이 설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낯선 존재는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긴 이름이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물을 찾기 위해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는 설렘과 기대를 안고 진해·다문화지역아동센터 친구들은 길을 나섰다.

한때 들풀이나 들꽃은 그냥 '이름 없는 풀' 또는 '이름 모를 꽃' 아니면 그냥 '잡초'라고 불렸다. 지금은 관심이 높아져 제각각 이름을 찾아 불러주는 사람이 꽤 많이 생겨나 있다. 그런데 때로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냥 꽃을 보고 예쁘구나~ 향기롭구나~ 그렇게 마음으로 느끼면 되지 굳이 까다롭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이 뭔지 찾아 외울 필요가 있느냐."

거창박물관에 있는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 탁본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과연 그럴까? 이렇게 얘기자락을 풀어놓기 시작하면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아 떠나는 일과 들꽃 이름을 아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와 이름을 불렀을 때 생겨나는 기운은 어마어마하다. 시인 김춘수는 작품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무심한 사물이나 사람을 나에게 각별한 의미로 삼는 작업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서 '철수야' '영희야'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면 그 낯섦이 한 순간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냥 이런저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이와 나 사이에 교감이 형성되는 첫 시작이 바로 이름을 알고 불러주는 것이다.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아 떠나는 친구들이 그 이름의 뜻을 제대로 알고 모르고 하는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마애'는 석벽에 불상 같은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다는 뜻이다. '여래'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을 이른다. '삼존'은 불상이 세 개라는 말이다. 그리고 '입상'은 서 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자, 그렇다면 '마애' '여래' '삼존' '입상'을 한꺼번에 붙여보자. 하나하나 뜻을 풀어보자. 길고도 희안한 이름의 정체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돌벽에 새겨져 있는 세 개의 서 있는 불상이 된다.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았을 때 아이들은 탄성을 지른다. 오늘 찾아갈 보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가섭암터 혹은 가섭암지가 뭐예요? 이렇게 물어주면 아주 훌륭한 친구다. 가섭암터는 옛날 가섭암이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는 뜻이니 친구들이 찾아 나선 보물의 정체가 한결 더 분명해진 셈이다.('가섭'은 석가모니의 빼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가을 초입에 들어선 금원산은 청명했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새들의 아름다운 합주가 산을 가득 메웠다. 시끌벅적한 도심에서 한 순간 낯선 세계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경한 풍경이었지만 아이들은 마법처럼 빨려들어갔다. 비탈을 오르는 중간중간에 길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아이들은 감동했다. "너무 좋아요!" "세상에서 본 물 중에 가장 깨끗한 것 같아요." "공기를 봉지에 담아 가서 팔아도 되겠어요!" 여기저기서 저마다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로 찬사를 쏟아냈다.

마애여래삼존입상에 이르기 직전에는 문바위를 만난다. 가섭암터로 보자면 대문 정도에 해당된다. 여느 절간 들머리에 있는 일주문으로 여기면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단일 바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거창에는 바위가 무척 많다. 그래서인지 팽나무바위, 갓돌 입석음각선인상 등등 돌로 만들어진 문화재들이 많다. 그중 으뜸이 바로 가섭암터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입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해가 없이 보면 아이들 눈에는 그저 커다란 돌로밖에 여겨지지 않겠지.

진해·다문화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문바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길지 않은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오르자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는 삼존불!! 때마침 구석까지 비춰주는 햇살이 마애불을 한층 더 빛나게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아이들 탄성이 쏟아진다. "와! 너무 멋져요". 아이들 눈에 그렇게 보이면 진짜 멋진 것이다. 아이들 찬사로도 충분히 짐작되지만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은 그 어떤 마애불과 견줘도 처지지 않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다. 어느 시대 양식이고 모양새가 어떻고 이런저런 설명은 대충 생략한다. 그보다 좋은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일이고 좋은 기운을 듬뿍 담아가는 일이다.

점심은 금원산자연휴양림 가까운 위천면소재지에 있는 밥집 '거창뚝배기'에서 먹었다. 여느 때와 달리 밥이 맛있었다는 느낌글이 쏟아졌다. 글에서까지 밥맛을 말하는 경우는 참 드문 일인데. "땡초를 썰어 넣어서 적당하게 매콤하면서 얼큰한 된장국, 고슬고슬한 밥에 간이 잘 맞은 반찬을 얹어먹는데 맛이 정말 끝내줬다." 얼마나 맛나게 밥을 먹었는지 한눈에 읽히는 글이다.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은 거창박물관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박물관에 특별하게 볼거리가 있을까 싶겠지만 다른 곳이 아닌 거창박물관을 찾아간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둔마리벽화고분 벽화라든지,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따위, 그리고 갖은 농업 관련 유물도 많고 또 볼만하지만, 핵심은 낮에 둘러본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 탁본이 여기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금원산 가섭암터에 가서 마애여래삼존불상을 보지 않고 이 탁본을 마주했다면 아이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된다.

금원산 가섭암터 마애여래삼존입상.

그런데 몸소 다녀온 데에서 본 부처상을 탁본으로 대하니 그 느낌이 한결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겠다.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쓱쓱싹싹 아이들의 손놀림이 자유롭다. 아이들 마음에는 오늘 작은 보물 하나가 뚜렷하게 새겨졌을 것이다. 좋은 기운을 받고 저마다 꿈꾸는 소원 이룩하기를….

이 기획은 두산중공업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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