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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서 남강 건너 진주성 가는 길엔 애민정신이

[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75)통영별로 41회차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webmaster@idomin.com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남강을 건너다 = 이제 한로(寒露)를 지나서인지 아침 기온은 꽤 쌀쌀해져 있습니다. 오늘은 단성향교에서 남강을 건너 진주로 이르는 길을 걷겠습니다.

지난주 소남역 있던 관정리 관정마을에 들었습니다. 요즘 지도에는 옛 소남리가 관정리로 표기되어 있고, 소남리는 그 동북쪽에 있어 두 마을이 별개이지만, <조선오만분일지도> 순천1호 단성지도에는 관정마을에 소남이라 적어두었습니다. 그 사이에 소남리와 관정리로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역터를 향해 가다보면 관정리 길가에서 오정용(吳鼎龍)의 청덕비와 송덕비가 나란히 서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역은 지방도 1001번과 1049번이 만나는 즈음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이 교통 결절지이기도 하거니와, 북동쪽 강가에 있는 송객정 유허 등에 근거할 때 이를 통해 단성으로 오갔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다면 소남역은 사거리에 자리했던 것이 되며, 남쪽으로는 소남나루에서 배를 띄워 남강을 건너 진주로 드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소남역은 고려시대 산남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근도에 배속·운영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 역원에 '소남역은 소남진 서쪽에 있다' 했고, 같은 책 산천에는 '소남진은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의 하류'라 나옵니다. <여지도서> 진주목 역원에는 소남역의 말과 인원에 대해 '중마 1마리, 복마(卜馬=짐말) 3마리, 역리 90명, 역노 14명, 역비 3명'이라 하였고, 또한 소남원이 역 곁에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적었습니다.

소남리는 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입니다. 1995∼98년 남강댐 높이는 사업과 관련한 문화재발굴조사에서 신석기·청동기·철기·가야시대의 마을과 딸린 무덤 등이 집중 확인되었습니다. 유적은 남강이 크게 휘어 흐르면서 만들어진 활주사면에 있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다종다양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취락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때는 철기시대인데, 161동의 집터를 중심으로 모두 171기가 조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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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 = 옛 나루 자리는 다리로 대체되어 일행은 그 길을 걸어 건너편 진주시 대평면에 듭니다. 대평리 일대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모여 산 곳인데, 소남리 유적과 함께 남강댐 높이는 과정에서 문화재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신석기∼가야시대 갖은 유적과 함께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청동기시대 밭이 확인되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유적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75∼80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소가 움집터 4기와 돌널무덤 9기, 고인돌 7기를 발굴하면서입니다.

대평리유적은 남강이 넘쳐흐르면서 발달한 범람원의 자연제방을 입지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 발굴은 대체로 자연제방이 대상이어서 선사시대 이래의 집터·무덤·밭·환호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배후 습지에는 어떤 자료가 잠들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조사 내용을 토대로 살피면, 이곳 유적은 많은 지역의 문화가 복합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이런 다종다양한 문화를 쉽게 찾아 살필 수 있는 청동기시대 전문박물관을 열어 여러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날 나루가 있던 자리에 놓인 다리를 통해 남강을 건너는 모습. /최헌섭

◇용산치를 넘다 = 대평리 지나는 길은 진양호 물가를 따라 열려 있습니다. 시원한 눈맛을 즐기며 걷다보면 명석면 오미리를 지나 3번 국도와 만나는 네거리에 듭니다. 예부터 교통 결절지대였음을 마을 이름 '네거리'가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요, <조선오만분일지도> 거제도13호 안간지도에도 '사가(四街)'라 적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점심을 먹고 동남쪽으로 용산치(龍山峙)를 넘습니다. 근처에서는 규모가 제법 큰 고개라 지금도 차들이 갓길에서 쉬어가고, 장사치들도 노점을 펴고 길손을 맞습니다. 고개 내려서는 서쪽 길가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집단 매장한 발굴 장소가 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용산리와 우수리가 만나는 길가에 빗돌이 두 기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김상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08년에 세웠습니다.

◇용호정원(龍湖庭園)과 박헌경 = 이곳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눈여겨볼 만한 정원이 있습니다. <한국정원답사수첩>에 경남 대표로 소개된 용산리 조비마을 들머리 용호정원인데요, 1922년 박헌경(朴憲慶·1872∼1937)이 주도하여 만들었습니다.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지금의 취로사업 같은 방식으로 만든 용호정원. /문화재청

정원을 둔 뜻이 참 가상한데요. 당시 진주에 자연재해가 거듭되는 바람에 여기로 이주해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박헌경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을 배후에 용산사 건립을 위한 노역을 일으켰고, 곧이어 이곳에 못을 파고 무산(巫山) 12봉을 상징하는 가산을 만드는 데 이들을 동원했다고 전합니다. 처음부터 누구의 소유로 두려던 것이 아니었고 모두에게 공개할 양이었으니 울타리를 두르지 않고 개방해 두었습니다. 이런 마음 씀씀이가 빼어난 경관보다 더 아름답게 와 닿습니다.

정원을 나와 노루목이라는 작은 재를 넘으면, 길가에 박헌경을 기리는 빗돌이 여덟 개나 있는 특이한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약 100년 전 그이가 지역에 베푼 바와 어려움을 구휼해준 은혜를 잊지 않고자 수혜자들이 세운 것이지요. 고개 서쪽 작은 구릉 노루목산에는 가야시대의 무덤이 떼지어 있는데, 국도 3호선 확장공사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고성 소가야 양식 토기가 집중 출토된 바 있습니다.

◇진주에 들다 = 옛길은 노루목 동남쪽에서 갈라져 본선은 3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으로 진주로 향하고 곧장 남쪽으로 가는 길은 판문동을 거쳐 평거역이 있던 평거동에 이릅니다.

명석면 소재지를 지난 길은 동남쪽에서 나불천(羅佛川)을 건너 나불이마을에서 나불천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 버드골(유곡동)과 두고개(이현동) 사이로 대밭골(죽전동)을 지납니다. <조선오만분일도> 거제도14호 진주지도에 진주성 서북쪽에 죽전하(竹田下)라 표기된 곳입니다.

그곳 이현동 북부주유소 곁에는 숙부인해주정씨시혜불망비를 비롯한 빗돌 셋이 옛길의 자취를 전합니다. 예서 나불천가로 난 길을 따라 인사동으로 향합니다. 남강으로 합류하는 나불천의 다른 이름은 진주의 다른 옛 이름인 청주(菁州)에서 딴 청천(菁川)입니다. 진주가 관향인 하륜이 쓴 <촉석성 성문기(城門記)>에 '…성문 위에는 모두 누각을 지었다. 위에 올라 사방을 보니 청천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으로 흐르며 품(品)자 모양 해자가 동쪽에 죽 파져 있고, 세 연못의 물이 성의 북쪽으로 돌아 모인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금의 나불천을 청천이라 불렀고, 성을 에운 하천과 강이 천연 해자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옛길은 인사동 골동품거리를 지나 진주성에 이른다. /최헌섭

조선시대 후기에 그린 <진주성도>에도 예서 다리를 건너 진주성 북쪽으로 난 길이 있는데, 지금 인사동 골동품거리와 진주성 사이에 있는 길입니다. 위 지도에 묘사된 바와 같이 다리를 건너 진주성 쪽으로 길을 잡아 서문에 이르면 시혜비 두 기를 모신 작은 빗집이 눈에 듭니다. 고종 때 대제학을 지낸 김상현의 처 연안 차씨와 그 아들 김정식이 지역민들에게 베푼 은혜를 기리기 위해 1905년과 1907년에 세운 것이랍니다.

빗집을 둘러보고 곳곳에 있는 골동품가게를 살피며 한가로이 걸으니 어느새 진주성에 이르렀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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