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고추방앗간 운영하는 김상윤 씨

22년째 고추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김상윤(71·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 씨는 동네에서 '털보 아저씨'로 통한다. 남들보다 몸에 털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고, 운영하고 있는 고추방앗간 이름이 '털보상회'여서 그렇게 불린다.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에서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김 씨는 가난한 살림에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참 가난했어.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못 마쳤지. 동생들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어. 그때가 내가 군대 가기 전이었는데, 옛날엔 집 안에 나락 포대를 뒀단 말이야. 어느 날 집에 와봤더니 나락 포대가 홀쭉해. 어머니한테 이게 다냐 물어보니 그렇다 그래. 식구가 몇인데 그걸로는 당장 전부 굶게 생긴 거야. 그래서 함안 대산까지 걸어가서 나락을 구해 짊어지고 다시 걸어오는데 이미 사방이 컴컴해. 그땐 뭐 전봇대도 없었으니까. 의령에 있는 집까지 오려면 강 하나를 건너야 했거든. 강에 서서 뱃사공을 부르는데 아무리 불러도 안 와.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그랬던 거겠지. 근데 그 강을 못 넘으면 집에 못 가니까 목이 터져라 불렀어. 늦게나마 사공이 와서 강을 건넜고 집에 오니까 한밤중이었어. 몸은 이미 땀에 푹 절어있었지. 끝도 안 보이는 컴컴한 길을 나락 가마니 짊어지고 걷는 그 기분은 정말 말도 못해. 그렇게 살았어."

군대를 다녀온 김 씨는 부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가 1968년이었다.

"부산 동국제강에 들어갔어. 나 말고 10명인가 더 왔었는데 운 좋게 합격했지. 그렇게 몇 년 앞만 보고 일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부산 집으로 오셨더라고. 연락도 없이 말이지.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려니까 아버지가 그래, 오늘 출근 안 하면 안 되겠느냐고. 어째서 그러느냐 여쭤보니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러는 거야. 얼른 회사에 전화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지. 그런데 가다 보니 아버지의 낌새가 이상한 거야. 그래서 다시 여쭤봤더니 선보러 가자고,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안 따라나설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그땐 일하는 게 바빠서 결혼할 생각도 없고 그랬거든. 그렇게 선봐서 만난 사람이랑 지금까지 잘살고 있지."

▲고춧가루, 참깨 등을 취급하는 김 씨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참기름이었다.

이후 보험회사와 삼미특수강에서 일했던 김 씨는 22년 전 지금 가게 자리에 가게를 얻었다. 밤낮없이 기계를 다루는 법을 익힌 덕에 일은 금세 손에 익었다.

"얼마 전에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때문에 난리였잖아. 그건 다루는 사람이 기계를 잘못 다뤄서 그래. 제대로 알고 만들면 그런 일은 없지."

고춧가루, 젓갈, 참깨 등을 취급하는 김 씨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참기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맛이 더 좋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연구를 많이 했어. 깨를 씻어서 짜고, 안 씻어서도 짜보고, 볶는 방법을 달리해서 짜보기도 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 만든 김 씨의 참기름은 인근 지역은 물론 대구에서도 사러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어느덧 일흔아홉의 나이. 살아온 과정을 더듬던 김 씨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먼저 아들을 보냈어. 둘째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먼저 저세상에 갔지. 그때 걔 나이가 21살이었어.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있었던 모양인데 운전했던 사람은 끝내 못 찾았어.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냐고 물으니 김 씨가 할 말을 고르는 듯 천천히 가게 안 기계들을 눈동자로 좇는다.

"우선은 건강했으면 좋겠지. 다행히 이젠 다 나았지만 아내가 2005년에 직장암에 걸렸었거든. 그래서 건강이 제일이다 싶어. 그래야 죽을 때까지 이 가게도 지킬 수 있을 거고. 그리고 우리 손주들도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고. 할아버지, 할머니 잘 따라줄 때마다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몰라. 그거 말고는 바라는 거 없어. 남은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