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蔡鉉國)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1935년생). 약 10여 년 전 이 분에 대한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양산에 가면 지금의 경남대학교가 박종규(전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 씨 소유로 넘어가기 전 이 대학을 운영했던 노인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근·현대 지역사(史)에 관심이 많은 기자에게 지인이 준 정보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잊어버렸다.

그런데 올해 초 이 분의 인터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인터뷰의 울림은 컸다. 7만여 명이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공유하며 그의 어록을 인용했다. 내 게으름 탓에 우리 지역 인물이 서울 매체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지역신문 기자로서 부끄러웠다. 기자사회의 속된 말로 '아끼면 ×된다. 견즉살(見卽殺)하라'는 수칙을 어긴 것이다.

그로 인한 부채의식 때문일까. 채현국이란 인물과 그의 삶을 더 탐구해보고 싶었다. 한 때 24개 기업을 경영하며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으나, 지금은 특별한 소득도 없는 신용불량자. 그 많던 재산은 다 어떻게 했을까?

지난 8월 28일 그를 경남도민일보로 초청해 '쓴 맛이 사는 맛, 그게 함께 사는 길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은 데 이어 양산으로 그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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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나타난 채현국과 아버지의 모습

그를 만나기에 앞서 찾아본 채현국에 대한 기록은 이랬다.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의 50년대 중반 학번으로 채현국이 있었다. 그는 머리를 삭발하고 신발 속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로 학교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학과를 초월해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임재경·이계익·황명걸·김윤수를 비롯해 수많은 친구들을 그러모았다. (…) 그는 유난히 친구들을 좋아했는데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는 친구에게는 "인류의 고민을 함께 나눕시다"하며 악수를 하였다. 이 맨발의 철학도가 발은 시려워도 가슴은 뜨거웠다."(구중서·문학평론가)

"철학과 출신인 채현국 형은 '가두의 철학자'라고 내가 별명으로 부르는데 당대의 기인이라 할 것이다. 옷도 막 입고 말도 막 하고 술도 막 마시고…. 집안에 돈이 있어서 그렇지, 없었으면 천상병(千祥炳) 시인과 비슷해졌을 것이다."(남재희·언론인)

"가정 연료의 주종이 연탄이었던 60년대에 채기엽-채현국 부자의 탄광은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커졌다. 그는 맘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임재경·언론인)

"그 당시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비호해주는 박윤배(朴潤培)라는 분이 있었어요. 강원도에 있는 '흥국탄광'의 현장 책임자였지. 이 광산은 내가 많은 신세를 진 채현국(蔡鉉國)이라는 분의 부친이 운영하던 광산이야.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채현국은, 그 당시 표면에는 일절 나서지 않으면서 군사정권의 지명수배를 받거나 도망다니는 사람들을 그 탄광에 받아서 그들에게 호신처를 제공하고, 또 음으로 양으로 반독재의 노선을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문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준 훌륭한 분이오."(리영희·전 언론인)

그러면 채현국 이사장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을까? 역시 기록을 찾아봤다.

"효암(曉巖) 채기엽(菜基葉). 1907년 융희 정미년 8월20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연경리에서 부(父) 병원(炳元), 모(母) 영천 이씨의 독자로 출생 1888년 8월 18일 나성(로스엔절리스)에서 졸하셨다. (…) 1952년 서울 수복 후 경운동에 연탄공장을 차린 것을 바탕으로 1956년 흥국탄광회사를 건립, 강원도 삼척군 도계 정선군 사북 일대의 탄맥을 개발하여 일약 굴지의 대광업가가 되었다. (…) 공의 사업은 그로부터 무역, 목축, 임산, 조선, 해운 등 다방면으로 발전하였으며, 한편 존재도 희미하던 해인(海印大學)이 경남대학교로 크게 자라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또 양산군 웅산면에 있는 6학급 중학교를 인수하여 오늘날 이천명에 이르는 영재들을 품에 안은 개운중학 및 효암고등학교로 만들어 놓았다."(채기엽 비문)

"채기엽 씨, 상해 당시엔 채종기 씨라는 분이다. 이 분은 현재 서울에 건재하시며 탄광업, 조선업 등을 경영하고 계신다. 상해에서 이 분에게 신세를 진 한국인은 아마 백 수십 인이 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당시의 은혜를 갚는 것 같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계속 누를 끼치고 있기까지 하다. "은혜가 다 뭐냐. 다들 건강하게 일 잘하고 있으면 그로써 만족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부끄럽기 한이 없다. 희귀한 인물임을 특기해두고 싶다."(이병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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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숙소로 사용하는 방./김구연 기자

 

양산 효암고등학교 안에는 그가 사무실로 쓰는 교실 반 칸과 숙소로 쓰는 서너 평짜리 방이 있었다. 야간 당직실과 나눠 쓰는 방은 그야말로 침대도 없는 골방이었다. 채현국 이사장은 개운중학교와 효암고 교실, 목공실, 도서관, 강당, 화단 등 학교 곳곳을 보여주었다. 오후 2시에 만나 시작한 이야기는 오후 7시 30분을 넘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인터뷰 내용을 풀어보니 200자 원고지 400매가 넘었다. 이번 <피플파워>에 전문(全文)을 모두 싣기엔 분량이 너무 많았다. 최대한 간추려 2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아버지 채기엽, 상해에서 큰 돈을 벌었으나

-대학 시절 연극반을 만들어 탤런트 이순재 씨와 함께 활동하셨다던데 지금도 서로 연락하나요?

"안 합니다. 한 번 전화를 했는데, '이름 들어봐야 잘 모를끼다. 나 채현국이다.' 했더니 '왜 몰라?' 하데. 그래서 '이 자식, 알면서 전화도 한 번 안 했냐'고 하니 '지금도 욕하는데. 뭐 욕 먹으려고 전화하냐?' 하더군. 2년 선배예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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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사모님은 서울 계시죠? 어떤 분이신가요?

"윤병희 경상대 심리학과 교수. 퇴직했지만 지금도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서울 집은 아파트입니까? 주택입니까?

"주택인데, 오래 됐습니다. 정릉에 있습니다."

-서울엔 얼마나 자주 가십니까?

"전에는 주로 서울에 있었고 여긴 어쩌다 왔는데, 지금은 이제 늙어서 서울에선 별로 할 일이 없고…. 군사독재도 끝나 역적질 할 일 없으니 서울 있을 일 없지. 여기 와 있으면 아이들 보고, 여긴 뭐 정말 노는 거죠 뭐. 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실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도 서울에 지인들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순전히 술 먹으러 가는 거죠."

-그래도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시겠네요."

그렇게 됩디다. 거기 가도 오래 안 있고, 거기서도 또 시골에 돌아다니고."

-선친이 효암 채기엽 선생이죠. 1988년에 돌아가셨더군요. 그런데 무슨 연유로 로스엔젤레스에서 돌아가셨나요?

"아, 제 서(庶)동생들이 있어요. 이들이 거기로 시집가서 살고 있어요. 게다가 아버지 병환이 사막지대에 사는 게 좋다는 말도 있어서 아예 서동생들 유학도 시킬 겸 거기로 갔죠. 중풍에다 당뇨, 그리고 관절염이 심했는데, 관절염은 사막지대에 사는 게 좋거든요. LA 전체가 사막지대니까."

-그러면 이사장님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1988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 해 전 1987년에 돌아가셨거든. 어머니는 서울에 계셨고."

-기록에 보니까 아버지가 일제 때인 1938년에 상하이로 가셨다던데, 그 때도 단신으로 가신 건가요?

"혼자 가셨죠. 사실은 도망 간 겁니다. 1938년에 대구경찰서 폭파 미수사건, 이런 게 어디 연표에 나올 겁니다. 거기 연루되어서 도망 간 겁니다. 큰 주역은 아니어도 있어봤자 붙들려가서 추달 받을 게 뻔하고…. 어머니는 그 때 이미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삯바느질로 먹고 살 때인데, 그러니까 가벼웠지 뭐. 식구들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있는 판에 어머니 삯바느질한 그 돈 가지고 그냥 도망간 겁니다. 그 때 상하이로 간 게 이상정 장군을 만나거니 하고 간 겁니다."

-그러면 이사장님이 35년생이니까 세 살 때 아버지가 떠나신 거네요.

"그런 셈이지."

-그러면 그 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신 거네요.

"어려운 것도 모르고 살았지. 형님도 있었고, 남들도 다 가난한 시절이니까. 물론 어렵긴 했지. 그 때 당시에 삯바느질로 산다는 게, 지금도 바느질만 해가지고 먹고 살기 어려운데…. 그런데 다행히 우리 어머니가 워낙 옷을 잘 지어요. 요즘으로 치면 양장점에 옷 잘 짓는 사람처럼 한복을 워낙 잘 지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만든 옷은) 남보다 좀 비싸요. 일거리도 많았어요. 빠르기도 한데 고급스럽게 잘 지으니까. 그 덕분에 형님이 중학교도 다닐 만큼 형편이 괜찮았어요. 그렇게 어떻게 버텼어요."

-아버지가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 선생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가셨다는 거죠?

"(아버지가) 그 집 제자거든. 그 집에서 운영한 교남학원 1회 졸업생이라. 그래서 이래저래 독립운동 하는 걸 알고는 거기 찾아가면 된다 하고 갔는데 못 만난 거라. 이미 중경으로 도망가고…. 1938년 이렇게 되면 이미 분위기가 무서워서 못 견딜 때라. 그런 상황에서 이상정을 찾으러 다녔으니 밀정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지. '저 눈치 없는 게 어디에 대고 찾으러 다녀!' 하는 말을 나중에 들었답니다. 아버지야 조심스럽게 물어봤겠지만, 상하이에 일본 밀정이 널려있는 판인데…."

-그래가지고 만나지는 못하고.

"엉뚱한 사람을 만나서 북경으로 올라가요. 그게 말하기 뭐한데, 할아버지를 사기 쳐 먹은 인간을 만난 거예요. 우리 집에도 오고하던 곧잘 알던 인간인데, 할아버지를 완전히 사기 쳐서 거지를 만든 통에 우리가 대구 시내로 들어왔거든요. 그 사람을 상하이에서 만난 거예요. 그 사람이 상하이판에서 성공하여 날리고 있었던가 봐요. 아버지 입장에선 그 사람이 당신 아버지 친구인지 원수인지도 잘 몰랐는데 그 사람에게 들었대요. 듣고 보니 할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먹은 그 사람이라.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를 소개해줘 가지고 다시 북경으로 올라가요. 그래서 북경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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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북경에서 돈을 좀 벌었나요?

"돈을 좀 번 정도가 아니라, 전쟁판이니까 교통 두절되기 예사고, 팔로군에 의해 죽는 것도 예사인 곳에서 트럭을 사가지고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열 배도 받고 스무 배도 받았으니까. 보급이 안 되니까. 장사라는 게 목숨 건 판이니까 절로 돈은 벌게 돼 있는 거라. 정세를 잘 보고 뚫고 들어가고 잘 나오기만 하면. 그렇게 해가지고 공장을…. 북쪽은 전쟁하는 분위기라 안 되고 공장을 하려면 상해 근처에 와야 하는 거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마적이나 마찬가집니다. 뚫고 다닌다 뿐이지. 그런데 이런 얘기는 상당부분 이병주(소설가)에게 들은 겁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는 아닙니다."

중국군에게 재산 빼앗기고 집도 선배 부인에게

-그렇게 번 돈으로 상해로 다시 돌아와 방직공장을 했다는 거죠?

"견직공장에다 견사공장에다 비료공장에다 회사를 여러 개 했다는데, 이병주는 잘 알지 난 잘 몰라요. 이병주가 쓴 관부연락선에 보면 돈 많이 번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나에게만 이야기한 건지, 거기 써놨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창고 안에 또 큰 창고가 들어있는데 그걸 두들겨 부수니까 환해지더라네. 금괴가 쏟아져 나온 거라. 그렇게 많은 금괴는 영화에서도 못 봤다고. (웃음)"

-소설가 이병주가 그렇게 썼다고요?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디다. 너거 아부지 진짜 부자였다면서…."

-그 돈을 다 어떻게 했습니까. 해방될 때.

"빼앗겼지 뭐. 중국군에게 빼앗기는 장면을 이병주가 우연히 본 거야. 압수당하는 꼴을…. 조선은행 발행고만큼 많이 벌었다고 하던데…."

-1946년에 귀국하셨다던데.

"바로 못 왔죠. 그런데 그게 어디 연표에 나옵디까?"

-아, 제가 여기 저기 찾아본 자료에 나오더군요.

"바로 못 나온 게 왜냐하면 내 동생들이 상해에 남아 있었거든."

-그 동생들이 LA로 간 서동생들인가요?

"아니, 중국에서 만난 여자가 낳은…. 그들도 이제 칠십 넘었을 텐데."

-그러면 중국에서 낳은 자식 때문에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빼앗겼지만 그래도 건질 수 있는 재산도 좀 있고, 거기서 낳은 자식도 있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데리고 가봤자 고생할 텐데, 아마 그래서 귀국 결심을 못하고 있었던 게지. 그런데 우린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금방 안 오시니까. 그런데 본인은 배를 사서 모든 걸 조선으로 옮겨 오려고 했는데 배를 못 사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전쟁 끝난 뒤 배를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있습니까?"

-해방 후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상해로 몰려든 학병들과 동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던데.

"상해임정요인들은 비행기로 갔지만, 그래도 또 못간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임정요인이나 한독당 아닌 덜 유명한 사람들, 학병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랬다더군요. 재산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래도 안 빼앗긴 게 좀 있었던가 봐요."

-그럼 귀국을 하실 땐 돈을 좀 갖고 오셨습니까?

"어휴, 거진 뭐 하잘 것 없는 돈밖에…. 큰돈은 다 빼앗겼고, 남은 돈은 다 써버렸고…. 상해에서 살던 큰 집도 권기옥 선생한테 줘버리고 왔다는데 뭐."

-권기옥 선생이 누굽니까?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 중화민국군 중좌, 중령을 지낸 분인데, 이상정 선생의 부인입니다. 이미 장가를 들어놓고 총각이라고, 마누라 없다고 하여 다시 결혼했죠. 그래서 나중에 신익희 선생이 권기옥 선생한테 '거, 남자들이 치사하게 어린 처녀 속여먹으려고 본처가 없다고 거짓말 하느냐'고 했다는 뒷얘기가 있죠. (웃음)"

-그러면 권기옥 선생이 이상정 선생의 둘째부인인가요? 중국에서 결혼한?

"그렇죠. 정식으로 결혼한 둘째부인입니다.(웃음) 그런데 이상정 선생이 우리 아버지 오시기 전에 죽어버렸어요. 45년에 벌써 죽어요. 그래서 권기옥 선생이 돌아올 수도 없고, 중국 쪽에 늘 활동한 사람이고 하니까 그 분에게 집을 준 거죠."

-귀국해서는 바로 대구로 왔나요?

"우리가 대구에 있으니 대구로 왔죠. 그런데 또 우리 형님이 문제가 되니까…."

-그 때 이사장님은?

"2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지만 2학년 말인가 3학년인가 그랬지. 아, 3학년이 되었어요. 여름인가 그랬어요."

-오셔서는 아버지가 뭘 하셨나요? 또 사업을 했나요?

"또 무역하고, 카펫 짜는 것도 하시고…. 아무 기술도 없는데, 기술자가 돌아온 사람이 있는 걸 알고….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했는데, 그러다가 우리를 놔두고 금방 서울로 갔습니다. 카펫 공장 시작해놓고 서울로 가서 무역회사를 시작하는데,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자기 돈이 꼭 있어야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기가 있으면 돈은 꾸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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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죽음, 부모님의 충격

-그렇게 빨리 서울로 가신 까닭은?

"그런 우리 형님이 좌익에 끼여 가지고 죽게 생겼거든. 뭘 우물우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두 달 사이에 형님 데리고 서울로 가버린 겁니다."

-형님이 대구에서 좌익에 연루가 되신 건가요?

"당연히 좌익에 연루되죠. 45년에 이미 공군 입대영장을 쥐고 있었거든요. 가미가제 그걸로 가는…. 그런 상황에서 해방이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죽기로 되어 있는데 해방되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귀국해서 보니 형님이 그 쪽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그동안 아버지가 없으니 우리 집이 총 본부가 되어 있었지."

-형님이 이사장님과는 열 살 차입니까, 여덟 살 차이입니까?

"열 살 차이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여덟 살 차이더군요. 아버지 없는 동안에도 외롭지 않았어요. 나이 드신 형님이 늘 있으니까."

-형님이 다닌 고등학교가 어딘가요?

"계성학교죠. 그 당시에는 중고등학교 통합 중학교였으니까. 해방 직후 대구 청년문제 일어난 것은 대구 계성학교 나온 사람들이었지."

-그러면 서울 가서 형님은 어느 학교로?

"해방 후에 아직 대학 문이 안 열렸으니 잠깐 배재중학교에서 럭비 선수, 축구 선수 하다가 곧바로 서울대 상과대학에 우 밀려들어가요. 그런데 서울상대가 고려대학을 이깁니다. 47년인가에. 그 때문에 서울대가 다 부서집니다. 이철승 이노무새끼가 고대 학생이었는데, 서울상대한테 졌다고 다 때려 부수고 다 두들겨 패고…."

-때려 부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학교를 다 때려 부숴요. 몽둥이 가져가서 럭비에서 졌다고…. 고려대학이 서울대학에 진 게 말이 안 되거든.(웃음) 책상, 의자 다 부수고 창문 다 깨버리고. 고대와 서울상대가 가까이 있습니다. 럭비 진 그날 바로."

-그러면 형님이 대학 다닐 때도 계속 럭비 선수를 했네요?

"예. 럭비 선숩니다."

-대학 가서는 학생운동은 안 했고요?

"안 했을 리가 있습니까? 대구와는 연이 끊어졌지만, 47년이면 완전히 좌익은 불법이었고. 대구 있을 때는 불법 합법 이런 말이 없었으니까. 학생운동을 심하게는 못했겠지만 했겠죠."

-형님이 1927년생이죠? 대학을 졸업한 뒤에 자살하신 겁니까?

"아니죠. 상대 4학년 때 전쟁이 났으니 졸업이고 나발이고 대구로 피난 갔으니 졸업장은 못 받았죠."

-1953년 휴전협정일 바로 그날 돌아가신 겁니까?

"그렇죠. 7월 27일 바로 그날. 그런데 이런 부분이 사실은 보안법이라는 게 시한이 없는 거니까 뭔지 몰라요. 그런데 내가 볼 때 활발한 좌익학생운동에 끼지는 않았어요. 우익단체에도 안 끼였지만, 보도연맹에도 우리 형님은 가입 안 했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대구에서 온 형 친구들은 잡혀 댕겼거든.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협박도 당하고, 가입한 사람도 많고. 그런데 형님은 분명히 안 끼였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자살까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참 별일이죠."

-그 때 형님이 자살 직전 이사장님에게 '이제는 영구분단이다'는 말을 하셨다고요?

"분명히 그 말을 했습니다. 개인이 (분단에 대한) 책임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는데, 아주 비관적이긴 했어. 대구에서부터 쭉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대부분 죽었거든."

-아버지는 그 사이에 1952년 서울 수복 후 서울 경운동에서 연탄공장을 차리셨다고?

"꽤 상세하게 아네? 내 기억보다 더 정확한데, 내 젊을 때 얘길 들었나?"

-(웃음) 그리고 흥국탄광은 1956년에 시작하셨다는 기록도 있고, 1953년이란 말도 있던데.

"1953년이지. 형님 자살하자마다 거기로 가셨어요. 이게 참 기구한데, 아들이 그렇게 되니 아버지 절망, 엄마 절망, 할매 절망, 다 절망적이니까 (연탄공장) 인부들은 어떻게 해요? 인부들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요? 마침 여름인데, 연탄공장은 어차피 연탄이 안 팔리고 그 당시엔 연탄 때는 집도 많지 않고, 그래서 초여름에 이미 연탄공장 안에 얼음 창고를 지었거든요. 그래서 아이스크림 장사라도 해야죠."

-그러니까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사장님과 인부들이 얼음과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단 말입니까?

"바로 낙원시장 옆이었는데, 일곱 여덟 명이 원래 있던 리어카 가지고 장사를 했지. 그걸로 먹고 살았지. 아버지는 나중에 알고 보니 탄광으로 갔어."

-그게 1953년 몇 월쯤?

"8월에 이미 간 거지. 7월 27일 형님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나는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데 1956년이라는 것은 내가 대학 간 해니까. 그 때 입학금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수표를 한 장 갖고 오셨더라고."

-이사장님이 대구에서 전시 연합 중학교는 몇 학년까지 다녔습니까?

"중학과정은 마치고 고등 1학년 반까지 다녔지. 그게 53년 7월까지였죠. 7월초에 갔는데 가자마자 형님이 그렇게…."

-그러면 최종 고등학교 졸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서울사대부고에서 졸업했죠. 53년 겨울에 시커먼 흙이라도 갖고 연탄 찍는데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학교에서 낙제할 것 같아서, 12월까지 지나버리면 낙제가 되니까 12월 20일쯤 되어 학교로 갔죠. 선생님이 '넌 입학금을 안 냈기 때문에 입학이 안 된다' 하는 거야. '선생님 저는 원래 부중 입학생입니다. 시험도 쳤고요. 지금이라도 학제가 바뀌어서 입학금 내라면 내면 안 됩니까' 했더니 다시 시험을 치라고 해. 그래서 시험을 쳤는데 운이 좋아서 그런지 모두 백 점이야. 전쟁판이라 대구 연합중학교보다 서울이 진도가 늦었던가 봐. 나는 다 배운 게 나왔더라고."

-그렇게 해서 사대부고를 마치고 56년 3월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는군요. 서울대 철학과도 시험을 쳤죠? 공부를 잘 하셨군요.

"공부를 잘 한 게 아니라 시험을 잘 쳤죠. 공부 잘 하는 것과 시험 치는 것은 별개입니다. (웃음)"

-이후 탄광에서 소장으로 함께 있었던 박윤배 씨도 대구 전시 연합중학교 동기였나요?

"그럼요. 대건중학교 1학년부터 동기입니다. 전쟁으로 수업일수가 모자랄까봐 아예 1월부터 소집을 했어요. 아, 박윤배 이야기도 나옵디까?"

-재미 철학자 김상기 선생과 이후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던 이종찬 씨도 연합중학교를 나왔다던데.

"김상기와 재일 친하지. 대학 철학과까지 동기지. 이종찬도 대건중학교부터 동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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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을 안내해 주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김구연 기자

 

-연합중학교라는 게 어떤 개념입니까? 여러 학교 학생들을 합친 겁니까?

"전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구에서 피난 연합중학교를 만들어 공부시킨 거죠. 아마 대전에도 있었을 겁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현 서울대 명예교수)도 거기 출신이라던데.

"바로 거기서 만났죠. 김상기와 백낙청이와 초등학교 동기거든. 같은 초등학교에서 함께 월반을 했던 동기지. 백낙청이 학년은 한 해 위였어."

-그런데 백낙청 선생은 1938년생으로 나와 있던데요.

"그렇게 어려? 음력으로는 37년생인데, 월반을 했으니까."

-거기서 만난 분들이 많군요. 그 분들 외에도 있나요?

"음, 꽤 많은데 누가 있지?"

-선친의 비문을 찾아보니 '아들 현국의 죽마지구 박이엽 지어 민병산 쓰다'라고 되어 있는데, 박이엽은 누굽니까?

"본명은 박은국이란 사람인데, 여명 200년이라는 한국 기독교 전래사를 씀으로서 기독교방송에서 7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고 방송을 한 친구지. 입체낭독에 해당하는 라디오 방송극이었는데, 그걸 지문으로 해가지고 스물네 권인가 책으로 냈지. 카톨릭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 묵상 시간에 그걸 틀었을 정도였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처음 복자도 될 수 있었던 것이지."

-중요한 기록물이 되었군요.

"기독교방송이 정부의 괘씸죄에 걸려가지고 광고도 못 받게 해서 어렵게 되었는데, 그것도 박이엽이가 '재치부인 아차부인'을 해가지고. 정부를 해학적으로 비판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게 크게 걸려가지고 기독교방송이 정부의 미움을 사서 자금난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루터란 교단에서 루터란아워라는 그 시간에 돈을 대줘가지고 견딜 수 있었지."

경남대학교를 인수하다

-다시 선친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존재도 희미하던 해인(海印大學)이 경남대학교로 크게 자라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이건 무슨 말입니까? 선친과 경남대가 무슨 관계인가요?

"해인대학이 마산대학으로 바뀌고, 그 마산대학에 이사장을 했고, 나도 이사입니다. 그 때 보니 교수들끼리 파벌 싸움을 해요. 이건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데 장돌뱅이가 아무리 옳아도 대학교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필요한 돈만 대줄게. 이렇게 선언을 했더니 교수들끼리 싸움을 하고 그러면서 자꾸 (서울로) 올라와요. 판사가 죄수에게 재판해달라고 묻는 것처럼 장돌뱅이한테 대학교수들이 와서 시비를 가려달라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든 당신들끼리 논의를 하고 협의를 하시고 화합을 하셔야지. 이렇게 하시면 개구리한테 학 보내듯이 그런 꼴이 벌어진다고 했지.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왕학수 교수를 학장으로 보내기로 결정이 됐는데, 왕학수가 갔는지 안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왕학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죠? 박정희와 사범학교 동기동창인데 유명한 교육학자입니다. 사람은 점잖고 괜찮죠. 가기로 다 해놓고 교수들끼리 싸우는데 가지마라 하여 아직 안 보낸 상태로 문홍주 문교부장관한테 이야기를 했죠. '국립으로 만들어라' 하며 줬어요. 거기에도 말 못할 일이 있는데, 뭔가 자꾸 탄광에 융자를 안 주고 애를 먹여요. 그래서 우리가 왜 그러는지 알아볼 것 아닙니까? 그래서 문홍주 장관에게 국립이나 공립으로 하라고 줬는데, 박종규가 가져가버렸어요. 문홍주가 박종규한테 주더라고."

-국공립을 하라고 국가에 헌납을 했는데? 문교부장관이 박종규한테…?

"줘버린 거지."

-대학 재산도 상당했을 텐데.

"아무렴. 신익희 선생이 하던 대학인데?"

-소설가 이병주 선생도 거기서 교수생활을 했잖아요.

"그럼요. 이병주가 다 나서가지고…. 원래 아버지 돈 쓰는 일은 이병주가 끌어들인 일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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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원래 해인대학·마산대학 시절에 효암 선생이 이사장이었네요?

"그래 가지고 해인대학 때문에 동국대학까지도 불교계에서 인수하라 하는 걸 우리 아버지가 장사꾼은 돈만 대야지 해서…."

 

-그러면 선친은 누구로부터 인수받은 겁니까?

"이미 말썽이 난 상태에서 이사회에서…."

-그 때 인수를 한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생각을 해보면…. 음. 그게 60년대 중후반쯤이었나? 박종규가 가져간 것보다 1년이나 1년 몇 개월, 또는 2년이나 앞이었으니까."

경남대학교 연혁을 보면 1968년 3월 삼양학원 이사장 이명조 취임, 1970년 2월 삼양학원 이사장 박종규 취임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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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엽-채현국 부자의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인수를 보도한 <마산대학보> 1966년 9월 12일 자 기사.

 

이에 앞서 <경남대학보>에는 1966년 7월 20일 흥국재단이 문교당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았고, 9월 5일 채기엽 이사장이 취임식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학보는 흥국재단에 대해 '국내 유수의 재단으로서 서울의 흥국탄광, 충남 장항의 조선회사, 천안의 흥국금광을 경영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이날 취임식에서 채기엽 이사장은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데 전념하고, 학생은 면학에만, 그리고 재단은 교수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위한 뒷받침에 전심하여 각자의 본분을 지켜줄 것"을 강력히 당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단 이사 명단으로는 채현국, 김상기, 김종신, 한태일, 정성량, 윤병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선친과 이종률, 유석현 이런 분들과는 친분에 어떻게 형성된 건가요?

"이 얘기하기가 더럽지만 대구의 서상일 선생이 원래 민족주의자였는데 일제 때 곤란에 못 견뎌 일본한테 그냥 투항한 꼬라지입니다. 그래 가지고 서상일 선생을 미워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대구에 많이 생겼습니다. 서상일 선생이 해방 공간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 쪽으로만 안 들어갔어도 좀 분위기가 달랐을 텐데, 그렇게 되니까 대구에서 민족주의자였다가 친일행위를 했다고 보이는 사람들이 한민당 쪽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초기 대구의 한민당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가지고 한민당이 심지어는 김구 선생에게까지 정치자금을 준다는 걸 안 받았느니 받았으니 논란이 있습니다. 

한민당이 친일로 몰리기 싫어가지고 김구 선생도, 이승만에게도 정치자금을 댄 겁니다. 그 짓을 했기 때문에 대구의 민족주의자들이 아주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자꾸 빨갱이로 모는 겁니다. 장택상이도 집안 모두가 친일을 했는데 미국에 붙어가지고 그 사람들을 빨갱이로 슬슬 몰고…. 그런 분위기가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 아버지는 교남학원 출신이고 이상정 선생이 있고 이상화가 있고 그러니까. 나이는 차이 나도 다 친구라. 이상화도 친구로 술도 같이 먹고. 아버지 열일곱 살에 할아버지가 사실은 동경 지진 끝에 그냥 칼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가 칼 맞아 죽었는데 어느 놈이 일본을 좋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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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돌아가셨습니까? 할아버지가?

"나고야에서. 일본에서 지진이 난 줄도 모르고 일본으로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날이 지진이 난 날인가 그래요. 도착해서도 지진 난 분위기인줄도 몰랐겠지. 그 때 신문을 본 것도 아니고 일본말을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객지 물깨나 잡쉈다고 간 사람이 일본놈이 뭐라 뭐라 하니까 나섰을 것 아니요? 한 칼에 그냥 칼 맞아 돌아가셨던 거지. 조선 사람이면 막 때려 죽이는 분위기라는 걸 몰랐던 거지. 나중에 안 거에요. 그래서 우리 집 식구들은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말도 잘 안 해. 나도 이 이야길 아버지한테 들은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어. 제사 날짜를 보니 동경 지진 난 그 때라."

-그렇군요. 할아버지 장례는?

"아버지가 가서 직접 초상 다 치고 그랬지. 열일곱 살에…."

-아버지가 그런 말은 안 해도 '담(膽)을 크게 가져라, 간(肝)은 작아야 한다'는 말은 자주 하셨나요?

"아, 그건 나한테 주로 한 말씀이에요. 심지어 간 큰 새끼는 살아남고 담 큰 새끼는 다 뒤졌다는 말씀도 했죠. (웃음) 늘 하시는 말씀이 조선놈은 어쩌다 보니까 담 큰 놈은 다 뒤져버리고 없네? 그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참으로 하기 어려워도 해야 할 일 하는 놈은 담 큰 놈이고, 간 큰 새끼는 잘난 척 하고 아무 거나 하는 놈 아닙니까? 그게 우리 민중 지혜라."

-그러면 1953년에 형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렸는데, 알고 보니 강원도 삼척군에 가서 탄광을 하고 있었던 거로군요.

"탄광을 하고 있는 중에도 집에는 왔지만 그 말을 한동안 안 했어요. 형님이 그렇게 되기 전에도 아버지는 사업이 안 되면 식구들과 궁상부리고 집에 있지 않았어요. 그냥 사라져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굶어요. 어머니도 나이 들어 삯바느질도 안 하니까. 그런데 자존심 때문에 이웃에 손을 벌리지도 않았어요. 바로 이웃에 오촌 조카가 살았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니 굶는 줄 몰랐어. 나중에야 알고 '말도 안 해가지고 우리를 나쁜 사람 만들었다'고 원망을 들었지."

-1953년에는 어머니도 함께 서울로 가신 거죠?

"다 갔지. 그런데 아버지가 사라진 건 일제 때만 사라진 게 아니라 난감해지기만 하면 사라져버렸다는 거지. 쫄쫄 굶었는데 뭐.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면 고생하는 거고, 계시면 부자로 사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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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개운중학교 개교 및 인수 비화

-연표를 보니까 양산 개운중학교가 1953년에 개교했던데요. 그 때는 아버지와 상관 없는 학교였던 거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종률 선생 땜에 이걸 한 겁니다."

-초대 교장이 임상수라는 분이던데.

"임상수 선생이 많지도 않던 자기 재산 다 내놓고…. 그런데 이협우라는 놈이 있었는데, 특히 경상도 사람은 이협우라는 사람을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인데, 임상수 선생 젊은 나이 때 재산 좀 있는 걸로 취급되어서 (그 놈에게) 잡혀갑니다. 이협우가 돈 빼앗으려고. 이협우는 해방 공간에서도 (죄 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남 재산 빼앗는 게 으레히 하던 일입니다. 그래서 4·19 나니까 그 놈 죽여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이협우가 대구 쪽 사람입니까? 들어본 것 같은데.

"경주 놈이에요. 이(李)가니까 경주 양반이고 교육 받았으니까 고등계 형사를 했죠. 고등계 형사라는 게 일제 때 날리던 놈 아닙니까?"

-이협우가 형인가 동생인가도 있는 걸로 아는데, 6·25 때 그 형제가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는 데도 앞장섰다는.

"바로 그 놈이 이협우 본인입니다. 그 자식이 그렇게 악질입니다. 그 놈이 원흉입니다. 이협우 같은 놈은 그냥 묻으면 안 됩니다. 저게 그냥 평화롭게 뒤졌습니다. 안 맞아죽고…. 악행을 한두 가지 한 자식이 아닙니다."

그랬다. 이협우는 경주 내남면 출신으로 1960년 4·19혁명 이후 그의 동생 이한우와 함께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61년 5·16군사 정변 직후에 풀려났다. 최종 형은 1963년 5월 대법원에서 받았는데, 살인과 방화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풀려난 이후 경주에서 사기도박을 알선하는 등 폐인처럼 살다가 1987년 사망했다.

-네. 민간인학살 가해자 명단에 나온 그 놈이 분명하군요.

"그 사람을 미워하자는 게 아니라 이런 역사적인 의식을 못 가짐으로 해서 그런 사람이 남아가지고 김주열이한테 최루탄 쏘아가지고 시체 유기하고. 그 놈도 반민특위에 잡혀서 재판 받던 놈인데, 이승만이가 습격하라 해가지고 풀어준 놈 중에 한 놈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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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마산 3·15 의거 때 김주열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했던 장본인이 박종표라는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인데요. 그 놈도 일제 때 부산에서 아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가들 잡아서 고문했던 악질 헌병보조원이었죠.

"맞습니다. 박종표."

-부산에서 신상묵이라고 신기남 국회의원 아버지와 함께 활동했던 헌병보조원이었죠.

"신상묵이도 참. 신기남이는 모르고 헛소리 했지. 자식한테 얘기할 리가 있습니까? 얘기 안 하니까 몰랐겠지."

-임상수 선생이 그 이협우에게 끌려갔단 말입니까?

"이협우한테 끌려가가지고 감옥에 있었던 걸 내가 우연히 알았죠. 임상수 쪽에서 들은 게 아니죠. 내 친구 되는 사람이 일개 중위로, 독립중대 중대장으로 와서 보니까 감옥에 있는 사람들 꼬라지가 좀 수상하거든요? 빨갱이 같이 보이지가 않아서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전혀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이 잡혀있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유를 모르겠거든. 빨갱이일 리가 없거든, 이북에서 온 사람인데. 그래서 다 풀어줘 버렸어. 그래가지고 이협우가 난리가 나요. 

그것도 누구에게 들었냐 하면 공의(公醫)라고 있어요. 의사 중에 재판 증언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의사를 공의라고 하는데, 그 공의한테 물어보니까 전부 억울한 사람이라고 그래. 이협우가 돈 뺐으려고 잡아넣은 거라고. 그 사람도 일제 때 있었기 때문에 이협우가 고등계 형사 출신이라는 걸 알거든. 경주하고 가깝잖아요. 울산경찰서에 다 잡아넣은 거야. 그렇게 다 풀어 줘가지고 그날부터 이협우가 이창해라는 이 중대장을 빨갱이라고 내무부에다 얘기합니다. 그 얘기를 내가 들었거든. 딱 여기서 임상수가 한 일을 보니까 이 사람도 그 때 잡혀갔던 사람 아닌가 싶어서 그 식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맞습니다. 내가 형님 면회 다녔습니다' 하는 거야. '어느 군인이 와서 가라 해서 풀려났습니다'."

-그 군인이 이름이 뭐라고요?

"이창해라. 독립중대 중대장으로 공비 토벌하러 왔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일과 개운중학교 설립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그래서 6·25 전쟁이 나니까 또 재산 때문에 또 자칫하면 잡혀가서 두드려 맞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가지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유림, 유도회 땅 가지고 학교를 시작한 겁니다. 돈도 많지도 않은 양반이."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선친이 개운중학교를 인수한 것은 1968년인가요?

"아니야. 1965년인가 66년에 이종률 선생이 여기에 온 게 언젠지 당시 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해. 왜냐하면 문서에 이종률 선생이 나올 수 없는 게, 분명히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도…."

-10년을 받았죠.

"아니, 아예 무죄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건 정확한 연표를 찾아봐야 겠네."

-이종률 선생 연표를 보면 1962년에 구속되어서….

"아니지. 61년이지. 5·16 쿠데타 나고 얼마 안 있어서 민족일보 사건으로 잡혀가잖아."

-그런데 그게 이사장님이 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민족일보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게 아니고, 민족일보 사건 때는 무죄를 받았고요. 그 다음해 1962년도에 민자통,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받습니다.

"아. 그래. 민자통으로 또 끌려가. 나는 그게 거의 연속으로 알고 있네."

-예. 그래가지고 65년도에 석방이 됩니다.

"그래. 65년도에 나오자마자 몇 달 안 되어서 그랬으니까. 65년 몇 월입디까? 일찍 나왔으면 65년일 것이고, 늦게 나왔다면 적어도 66년입니다. 그 때 임상수 선생은 월급도 못 대서 아주 죽을 지경인거라."

-그런데 개운중학교 인수 시기가 어떤 자료에는 65년, 어떤 자료에는 68년으로 나오더라고요.

"그게 이종률 선생 이름은 문서에 올릴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 아버지 이름을 이사장으로 해놓고 교장은 민숙례로 나올 거야. 실제로는 이종률 교장이 하는데 문서에는 민숙례 교장으로 되어있습니다."

-민숙례가 누굽니까?

"(웃음) 이종률 선생 부인입니다. 당시 정권에서 이종률 선생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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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된 거로군요.

"교육청에서 아예 안 받아줘. 교장도 안 되고, 이사도, 이사장도 안 받아줘. 그래서 아이들 졸업장에는 이종률 교장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장님은 1956년에 서울대 철학과 입학하여 졸업은 언제 합니까?

"60년 8월 졸업이지."

-졸업하고 군대는 안 갔습니까?

"갔다 왔으니까 60년 8월이지."

-그 때도 대학은 4년제 아니었습니까?

"군대를 내가 9개월인가 10개월인가 갔다 오거든요. 왜냐면 독자니까. 나중에 독자는 병역 면제인데도 그 때는 6개월인데 제대가 늦어져가지고 9개월인가 했어요."

중앙방송(현 KBS)에 입사했으나 때려치운 사연

-60년 8월에 졸업하고 중앙방송에 입사했는데 졸업한 그 해입니까?

"그 후에. 그게 61년인가 봐요. 졸업하고 유학 갈까 했다가 돈이 안 되기에 책이나 보고 룸펜 생활했죠."

-이후 중앙방송에 입사했는데, 그 때 정확하게 PD로 한 겁니까, 배우로 한 겁니까?

"피디가 아니고 연출 1기라는 말을 썼습니다. 드라마 연출을 위한 연출만 따로 뽑았습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텔레비전 방송 계획이 있어가지고 뽑았던 겁니다. 처음입니다."

-그 때 방송국에 들어가니 이순재(탤런트) 씨도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까?

"아니 아니. 순재는 드라마센터 단원으로 나가고 있고, 방송에서는 KBS 안에 군 방송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중앙방송에 들어갔는데, 3개월 만에 나와 버린 건 왜 그랬나요?

"5·16 후에 직장을 마음대로 관두거나 이탈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이건 할 일이 아니라. 딱 보니까 선전요원으로 뽑은 거예요. 그런 곳에서 불량한 나 같은 게 들어와서 찍찍거리고 말하는 걸 보니까 방송국장 이런 사람들이 볼 때 뭔가 애매하게 자꾸 굴더라고. 일거리 안 주고. 게다가 참 말하기 안 좋지만 얼마나 연출료가 비싼지 한 달에 30분짜리 하나만 하면 대학의 정교수보다 많아. 거의 두 배쯤 돼. 엄청나. 따라서 이건 국장서부터 그런 돈 다 갈라먹는 거야. 작가료, 연출료, 그 다음에 배우들 개런티 해서 그 돈을 갈라가지고 방송국 직원 월급으로 쳐왔어. 

그게 묵약이 다 되어서 돌아가는 판이야. 지나간 일인데도 이런 걸 아무도 글 하나 안 쓰고 뭐하는지 몰라. 나 같은 사람은 증거도 없고 아무 것도 없으니 못하지만. 정부 전체 기관이 그 따위로 돌아가는 판이라. 그러니까 아 이런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 이승만이가 쫓겨나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승만 때 하던 그 짓 그대로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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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방송도 애초부터 국영이었나요?

"국영이 아니라 아예 국가기관이에요. 공보부의 외청이죠."

-거기서 무슨 정권홍보성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했습니까?

"완전히 그 판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방송국 전체가 그랬어. 월급도 그렇게 갈라먹고 있는 판인데. 증거는 없지만, 우리를 뽑은 이유가 새로운 군사정권의 선전도구로 써먹으려는 것이지."

-그래서 3개월 만에 사표를 내신 건가요?

"사표도 안 냈어요. 사표를 안 받아줘요. 왜냐하면 사표를 받아주면 우릴 관리하는 계장이면 계장, 과장이면 과장이 문제가 생겨요. 그런 분위기를 아니까 계장보고 나 먹고 살려고 그만둘 테니까 알아서 하시오. 그들이 일거리를 안 주고 있으니까 핑계를 잡았죠. 차비 일정하게 더 줘요. 차비 몇 달이고 난 상관 안할 테니까 난 안해. 그러고 그냥 나와 버린 거죠."

-나온 뒤에는 아버지에게?

"탄광으로 가버렸지. 여기서 얼쩡거리다가 또 오라하고 딴 소리 날까봐 아예 시골로 가버렸어요."

-5·16 쿠데타 이후였죠?

"뒤지."

-그래갖고 1961년 하반기부터 아버지 일을 돕게 되신 거네요?

"정확하게는 탄광에 합류하게 된 것은 62년부터. 내가 연탄공장은 늘 했고, 그러다가 나중엔 빈 연탄공장으로 남아 있게 되고. 그 내막이 내가 학교도 가고 해야 하니까 내가 뭘 할 수도 없고. 아버지는 탄광에 매여 있어야 했으니까. 나는 빈집이 되어 있는 연탄공장 안 땅굴에서 나 혼자 책 보고 하면서 살았죠."

-아버지가 삼척군 도계에서 탄광을 할 때 서울의 연탄공장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고 가신 거네요.

"탄광 갈 때 사업하러 간 것도 아니에요. 자식 죽고 나니 그냥 싫어서 간 거죠. 죽으면 죽고 그냥 모르겠다 하고 간 거죠."

-그렇게 해서 방송국 때려치우고 탄광에 합류했을 때 어떤 역할로 가게 됐나요?

"기가 막혀요. 그것도 때려치울 결심을 하기 전날 가보니까 부도가 나기 직전인거요. 지금도 부도가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죠?"

-채권자들이 압류하러 오고 그러지 않나요?

"그 정도밖에 모르죠?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률인데 우리는 하도 신용이 무너져 있어서, 수표가 부도나면 위조어음 발행자가 돼요."

-그렇죠. 부정수표단속법에 걸리겠네요.

"그 법 때문에 감옥에 갑니다. 나도 그 땐 그걸 알 리가 없지요. 아버지가 감옥에 간대요. 잡혀간대요. 도망가야 된대. 예? 장사를 하다가 도망을 가요? 그게 법이래. 그것 참 찰스 디킨즈 시대도 아니고 장사를 하다가 잘못 됐다고 해서 망하고 거지가 되는 게 아니고 감옥을 가고 도망을 가? 나도 그걸 처음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들어보니 돈을 못 막으면 은행에서 부도가 되고, 그날로 이미 범죄는 성립한다는 거야. 한 건 한 건마다 범죄야. 매 수표 한 장마다가 범죄야. 이런 개념 아십니까?"

(11월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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