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이야기 탐방대] (1) 합천에서 만난 남명 조식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8월부터 11월까지 경남이야기탐방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사회 공익 실현을 위해 만든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입니다. 경남 이야기탐방대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경남·부산 스토리 랩' 사업의 한 부분으로 '지역 이야기산업 활성화를 위한 자생 기반 마련'을 목표로 역사적 사건·인물과 설화, 명물 등을 찾아보고 결과를 글·그림·사진으로 내놓는 일을 할 것입니다.

'이야기산업'이란 아직 많이 낯선 개념으로 구체적인 형상이나 생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역 여러 '꺼리'에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해 새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여행·관광은 물론 애니메이션·영화·음식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활용·적용하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시작 단계인 지금은 ①여러 '꺼리'를 찾아내 공유하고 ②이야기를 만드는 경험을 공유하는 한편 ③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직하는 일이 당면 과제라 하겠다.

탐방대는 '청소년'·'예술인'·'SNS'탐방대 셋으로 이뤄져 있다. 제각각 5명씩인데 이들은 8월 27일 치른 발대식 겸 간담회에서 모두 세 차례 가운데 합천 남명 조식 유적과 의령·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적은 공통으로 탐방하고 예술인·SNS 같은 어른 탐방대는 막걸리를 찾기로 했다. 청소년탐방대는 당시 정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통제영과 예술'을 주제로 삼아 통영을 찾았다.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시는 용암서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청소년 탐방대.

가장 먼저 찾은 데는 합천 남명 조식 유적. 남명 유적은 산청(남명 산소·덕천서원·산천재 등)과 김해(산해정·신산서원)에도 있지만 합천으로 한정한 데는 까닭이 있다. 남명이 태어나고(외토리) 부모상을 치르고(하판리) 학문을 완성하면서 13년(1548~1561) 동안 제자까지 가르친(외토리) 고을이 합천이다. 그만큼 중요한데도 정작 눈길은 제대로 끌지 못하는 데가 합천이다. 남명이 1561년 일가를 이끌고 옮겨가 1572년 일생을 마친 산청군 시천면 일대에 가려진 셈이라 하겠다.

또다른 까닭은 '삼가장터 3·1만세운동'에 있다. 1919년 합천 삼가장터에서 두 차례 일어난 만세 시위에 3만을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당해 일어난 정미의병에도 삼가 사람들은 적극 가담한 역사가 있다. 삼가가 큰 고을이 아닌데도 이처럼 의거에 많이 나선 특별한 까닭이 있지 않을까. 삼가가 당시 교통 요충이었음도 원인이겠지만, 경(敬)·의(義)로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가르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역에 이어진 덕분도 있다. 삼가면 소재지 금리마을에 2005년 들어선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은 멋지면서도 씩씩하다.

8월 24일 청소년 탐방 때는 이봉영 어르신을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남명 외가쪽 후손인 이 어르신은 청소년이 기특했던지 남명 생가 등에 대해 많이 얘기해 줬다. 외토리 마을을 건너편 산에서 보면 영판 옆으로 누운 토끼 모습인데 남명 생가는 왼편 가슴에 해당한다거나, 남명 생가가 바로 남명 외가인데 남명을 낳은 딸과 마찬가지로 며느리도 몸을 풀러 와 있었으나 영특한 기운이 외손(=조식)에게 넘어가 외할아버지가 탄식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들려줬다.

9월 15일 예술인탐방대와 23일 SNS탐방대는 정해식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둘러봤다. 합천 으뜸 해설사라는 합천군 추천에 걸맞게 뇌룡정·용암서원·남명 생가를 돌며 알려져 있지 않은 여러 사실을 일러줬고 지금은 사라진 계부당(鷄伏堂=뇌룡정과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터로 짐작되는 장소도 일러줬다. 합천 삼가 일대 남명 유적이 다른 고장 유적보다 뜻깊은데도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아쉬워도 했다. SNS탐방대는 들판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로부터 마을 지형에 대한 설명도 듣고 손수 만든 도토리묵을 얻어먹는 화도 누렸다.

탐방에 나선 이들은 용연서원 고즈넉한 분위기에도 젖어들고 마을 들머리 느티나무 엄청난 크기와 멋진 그늘에도 흥겨워했다. 뇌룡정(雷龍亭)에서는 기둥에 붙어 있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낸다)'을 곱씹기도 했다. 떠들고 나대는 대신 평소는 가만있다 때가 되면 뚜렷하게 나타나고 크게 소리내야 한다는 뜻이 담겼지 싶다. 곽재우·정인홍을 비롯한 제자들은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서슴없이 떨쳐나섬으로써 가르침을 완성했다.

용연서원에서 서원 내력을 새긴 묘정비를 살펴보는 SNS탐방대. /김훤주 기자

이번 탐방에 나선 이들은 어른조차 남명 조식과 그 유적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다. 특히 청소년들은 남명이 경남의 공식 대표 인물인데도 모른다고 했다. 남명이 퇴계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고 서로 인정하는 쌍벽이었다고 말해줬을 때는, "이황은 1000원짜리 지폐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남명 조식은 어떻게 이다지도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어요?"라고 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벼슬에 나선 이황과 나서지 않은 조식, 조식의 문벌과 이황의 문벌, 그 제자들이 활동에서 보여준 차이 등등 앞으로 풍성한 이야기로 이어질 물음이었다.

어쨌거나 남명이 사후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합천·산청 일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또한 잘 모르고 있었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지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이들로 탐방대를 꾸린 때문이다. 그런 지식은 앞으로 알아나가면 되고 어쩌면 그런 지식은 없는 편이 탐방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자기것으로 삼는 데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이들은 자기 열성과 관심을 증명하려는 듯, 탐방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글과 사진과 그림들을 내놓았다.

예술인탐방대 박래녀 소설가가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비문을 읽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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