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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가장 큰 문바위…거창을 키운 바위들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3) 거창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10월 02일 목요일

◇거창을 키운 것은 8할이 바위

거창 풍물과 문화는 돌과 바위를 빼놓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경남 북서쪽에 자리잡은 거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깥쪽 산지는 잘 깎여나가지 않는 변성암 종류가 많고 한가운데는 상대적으로 잘 깎여나가는 화성암 종류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대를 남강의 지류인 황강과 위천 두 물줄기가 흐르면서 깎아내고 쌓아덮어 가운데를 분지로 만들었다.

거창에는 누각과 정자가 많다. 용암정·관수루·요수정·심소정·일원정·원천정·모현정·인풍정·건계정·망월정·용원정은 문화재로 이름이 올라 있다. 누각과 정자는 산 좋고 물 좋은 데 들어선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골짜기나 여울 또는 소를 이루는 데다. 바위가 없었다면 이런 누정도 이렇게 많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일 바위로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문바위. /김훤주 기자

◇원학동 수승대 거북바위·관수루·요수정

이 가운데 관수루와 요수정이 놓여 있는 금원산 원학동 수승대 일대가 으뜸으로 꼽힌다. 거창 원학동 골짝은 이웃 함양에 있는 화림동·심진동 골짜기와 함께 안의삼동(安義三洞=안의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골짜기 셋)으로 꼽힌다. 옛적에는 일대에 안의현(1896년 안의군으로 바뀜)이라는 고을이 따로 있어서 이 셋을 모두 품었지만 1914년 일제강점기 안의군이 없어지면서 서상·서하·안의면은 함양으로, 북상·마리면·위천면은 거창으로 넘어가면서 이리 소속이 갈리게 됐다.

수승대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였고 신라로 백제 사신을 보내며 '돌아오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해서 원래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 수송대였다는 얘기, 그러다 1543년 퇴계 이황(1501~1571)이 영승마을에 머물다 떠나며 수승(搜勝)으로 고치기를 한시로 권하자 이를 받은 요수 신권(1501~1573)이 따랐다는 얘기 또한 유명하다. 위천이 흐르는 한가운데 화강암 덩어리는 이름이 거북바위(한자로는 구암대龜巖臺 또는 암구대巖龜臺)다. 오른쪽 구연서원 들머리 출입문이 관수루고 요수정은 건너편에 있다. 거북바위는 앞서 말한 퇴계의 한시와 이에 대한 갈천 임훈(1500~1584)의 답시를 비롯해 갖은 묵객들의 시문과 성명을 매달고 있다.

수승대 거북바위.

◇문바위·사선대·분설담·수포동

수승대를 품은 금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바위도 보유하고 있다. 금원산자연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길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쪽에 나타나는데, '달암이선생순절동(達巖李先生殉絶洞)'이라 적혀 있다. 달암은 고려말 판서 벼슬을 지낸 이원달을 이르는데 그이는 고려가 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사위 유환과 더불어 여기 들어와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둘레에는 또 문바위를 두고 치성을 드린 자취도 보이는데 옛날에는 여기서 기우제까지 지냈다. 과연 거창을 거창답게 하는 명물이라 하겠다.

이 밖에도 거창 바위가 이룩한 멋진 풍경은 곳곳에 있다. 남덕유산 자락 월성계곡은 사선대(四仙臺)와 분설담(噴雪潭)을 만들었고 오도산은 가조 일대로 물줄기를 보내 대학동 수포대(水瀑臺)를 베풀었다. 사선대는 신선 넷이 바둑을 뒀다는 4층 겹바위이고, 분설담은 너럭바위 위를 구르며 흐르는 냇물이 흰 눈이 뿜어나오는 것 같다고 붙은 이름이다. 수포대는 사림에서 동방오현으로 꼽는 일두 정여창과 한훤당 김굉필이 5년 동안 강학한 자리라 한다.

◇크고 또 많은 거창의 석불

거창 바위는 불교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지 싶다. 거창만큼 커다란 석불이 많은 데도 찾아보기 어렵다. 얼굴을 다듬는 데 공을 들였고 둥근 돌갓을 쓴 양평동석조여래입상, 비례·균형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상림리석조관세음보살입상, 야리야리해서 어쩌면 여성성을 구현한 관세음보살처럼도 보이는 농산리석조여래입상은 모두 키가 훌쩍 3m를 넘는다.

문바위 위 가섭암터 마애삼존불상도 대좌 광배를 합해 가운데 본존불은 3m를 넘을 것 같고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상도 2m는 넘어서겠다. 바위벽에서는 "염망모(念亡母)", "천경원년십월(天慶元年十月)" 같은 글자가 발견됐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염망모는 가운데 본존불을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로 짐작할 수 있게 하고, 1111~1114년 쓰인 중국 요나라 연호인 천경은 1111년 만들었음을 알게 했다.

거창 바위는 조선시대 펴낸 <동국여지승람>에도 올라 있다. 지금은 고견사(高見寺)라 하는, 당시는 견암사(見巖寺)를 이르면서 "바위 구렁이 깨끗하고 훌륭하다"고 적었다. 옛날 지리서적에서 이렇게 바위를 일러 무어라 하는 일은 드문 편이다. 무덤에서도 거창 바위는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둔마리벽화고분인데, 원래 있던 화강암 바위를 깎아 파내 석실을 만들었다.

◇네덜란드식 가옥에 담긴 뜨거운 거창 사랑

남상면사무소 쪽에서 거창박물관을 향해 가다보면 색다르게 생긴 집이 한 채 나온다. 1947년 지어진 '거창 정장리 최남식 가옥'으로 2005년 등록문화재 제203호가 됐다. 계림농원 주인 최남식(1920~2007) 선생이 네덜란드 전원주택을 모델로 삼아 지었는데 설계도 손수 했다. 2층짜리로 눈이 많이 내리는 거창 특성에 따라 지붕 기울기를 크게 했고 처음 지었을 때는 도로 쪽으로 현관을 내었다.

네덜란드 식으로 지어진 최남식 가옥.

주인은 농촌 계몽과 거창 사랑 열정과 고래(古來)에서 벗어나는 주거문화도 이 공간에 담았는데 사람들에게는 이런 점이 돋보인다. 호가 경민(耕民), '밭 가는 백성'인 선생은 1940년 계림농원을 열었고 1960년 거창에 사과를 최초 보급(1965년 거창원예협동조합장 지냄)했다. 건축학계는 누가 설계·시공했는지와 짓고 고친 연혁이 뚜렷한 사실을 높게 친다.

또 지역 문화재가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현상이 안타까워 수집에 적극 나섰으며 1971년에는 제창의원 김태순(1926~2008) 원장과 함께 둔마리벽화고분도 발견했다. 1975년 전국농촌지도자중앙회 회장을 지냈고 1983년 갖고 있던 문화재를 내놓고 향토박물관 설립 운동을 벌인 끝에 1988년 거창유물전시관(지금 거창박물관)이 문을 열자 그 후원회장을 지냈다.

최남식 선생은 생전에 이광수 소설 <흙>과 심훈 소설 <상록수>를 통해 비참한 농민 현실을 알고 농촌지도의 필요성을 깨달아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열아홉살 때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거창으로 전근오면서 농민과 더불어 살며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리라고 결심했다면서 농민이 된 동기를 얘기하기도 했었다.

첫해에 황무지 2500평을 사들여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으나 실패했고 거창군청에 취직한 뒤에는 아침에 손수레를 끌고 출근해 저녁에는 군청 변소를 퍼서 농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다 4년이 되던 해 심었던 가을무가 풍년이 들어 자기의 10년 치 봉급(월급 30원)을 웃도는 4000원 수익을 올리면서 군청 근무를 그만두고 전업 농부 생활로 접어들었다. 해방 뒤에는 정장리 마을에 공동이발소를 기증하고 공동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써 '협동'이 편리함을 알게 했고 공동 앰프, 공동 방앗간 등을 들여와 마을에 분열을 없앴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심기 시작한 사과도 널리 퍼뜨려 '큰 밭은 사과, 작은 밭은 포도' 하는 식으로 거창에서 으뜸 소득을 올리게도 했다.

◇군(郡) 단위 최초 공립 박물관

최남식 선생은 문화재 농사도 지었다. 거창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고 최남식·김태순 원장은 내 고장 문화재를 우리가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문화재를 모으는 데 힘썼다. 이렇게 수집한 문화재를 우리 고장에 되돌려서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향토박물관을 세우는 데 뜻을 모았다. 두 분은 소장 문화재 10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고 1983년부터 정부 지원과 군민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본격적인 향토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였다"고 적혀 있다. 물론 거창박물관이 둘만의 힘으로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창박물관은 거창에서 출토됐거나 고장 사람들이 기증한 유물을 주로 전시하는데 특별히 눈길을 둘 만한 것을 꼽으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의 1864년판으로 거창읍 가지리 밀양 박씨 문중에서 기증했다. '대동여지도 제작 1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2011년 12월 산간 오지 거창에서 열렸는데, 대동여지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다.

나머지 둘은 금원산 문바위 뒤에 있는 가섭암터 마애삼존불상 탁본과 둔마리벽화고분에서 나온 벽화다. 탁본은, 문화재로는 가치가 없지만 가섭암터에서 봤던 불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실제 불상은 바위가 바위와 겹쳐진 동굴 같은 데 있어 제대로 보기 어렵다.

또 둔마리벽화고분은 보존을 위해 공개하고 있지 않기에 거창박물관에서만 벽화를 볼 수 있다.

최남식 선생과 더불어 둔마리벽화고분을 발견하고 거창박물관 건립에도 함께 나섰던 김태순 선생은 1953년 문을 열었던 제창의원 건물을 문화재로 남겼다. 2013년 12월 등록문화재 제572호 '거창 구(舊) 자생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지어진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의원동·주택동·병동이 모두 제대로 남아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거창의 나머지 2할은 소나무

거창 풍물과 역사·문화를 키운 8할이 바위라면, 나머지 2할은 소나무라고 해야 맞지 싶다. 거창에는 그만큼 유별나게 소나무가 많다. 적어도 경남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마을숲이 참나무·서어나무·왕버드나무 같은 잎넓은나무지만 거창에서만큼은 압도적 다수가 소나무다. 거창은 마을 동구에 돌무더기를 쌓아 서낭단으로 삼은 데가 많은데, 여기 심긴 나무 또한 거개가 소나무다.

소나무는 이를테면 독야청청이라 '곧고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바라고 하는데, 거창 대표 인물로 크게 내세워지는 동계 정온 선생이 소나무를 닮았다. 지금 잣대를 기준으로 삼으면 여러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겠지만 전통시대 선비 양반의 눈으로 보면 동계 정온 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동계 정온은 나이 어린 영창대군 살해가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광해군 미움을 사서 제주 대정으로 유배당해 10년을 살았고 인조반정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뒤 곧바로 닥친 병자호란에서는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항복을 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거창으로 돌아와 몸을 숨기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이가 태어난 데로 알려진 동계 정온 고택이 있고, 산 속 어딘가(某里) 들어가 살았다는 데에는 그이를 기리는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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