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일본 히로시마현 한 작은 도시 풍경에서, 다른 한쪽은 주택가가 밀집한 도쿄의 한 동네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53년작 <동경이야기>에서 노년 부부는 자식들을 만나러 도쿄로 향하지만, 야마다 요지의 리메이크작 <동경가족>(2013)은 자식들 위치에서 부모를 맞이한다. 부모세대 입장과 자식세대 입장. 또는 세대를 뛰어넘은 거장과 거장의 만남. 야마다는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히는 오즈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동경가족>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동어반복이 아닌 어떤 응답 혹은 정면승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패전 후 일본. 급속한 공업화·도시화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자본주의 고도 성장과 지난 2011년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쓰나미. 두 영화는 겹쳐지는 듯하면서도 다른, 절망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사는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전한다. 부모가 이야기 중심인 건 동일하지만 야마다는 오즈보다 좀 더 아랫세대 관점에 서고자 한다. <동경이야기>에서 전쟁 중 죽은 것으로 나왔던 셋째 쇼지를 '살려낸'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 쇼지가 죽은 지 8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시부모에게 극진했던 며느리 노리코는, 후쿠시마 원전 자원봉사 현장에서 만나 사랑을 키운 쇼지의 여자 친구로 <동경가족>에 등장한다.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동안 동트는 새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 슈키치. <동경가족>의 한 장면이다. 슈키치는 "아름다운 새벽이었다"고 말한다. /캡처

오즈는 변해가는 것, 사라지는 것을 다소 냉혹하다 할 정도로 무심히 바라보고 끝내 슬프게 받아들인다.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맑고 고즈넉한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남편은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새벽이었어." 여기엔 세상의 질서, 순환법칙에 대한 담담한 순응이 있다. <동경가족> 역시 같은 장면을 반복하지만 아버지는 쇼지에게 한 마디를 덧붙인다. "쇼지, 네 엄마가 죽었다." 왜 야마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각인하고자 했을까. 무심보다는 직시. 순응보다는 반응. 이 말을 아랫세대에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죽음의 시발이 된 어머니가 쓰러지는 장소가 첫째 아들 집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동경이야기>를 비롯한 오즈의 영화에서 계단은 세대 간 벽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좁디좁은 2층집에 온종일 카메라를 비추지만 계단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야마다의 선택은 다르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격정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을 바로 그 계단에서 찍었다. 그것도 초등학생 손자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던 와중이다. <동경이야기>에서 손자들은 할머니 죽음과 관련된 어떠한 장면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동경가족>의 손자들은 마지막 인사까지 드린다.

안녕히 주무세요, 할머니. 야마다는 오즈가 느꼈을 윗세대로서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일본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고 간 오즈 세대는 야마다 세대 앞에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즈는 떠나가는 사라지는 것들을 그저 묵묵히 흘려보내야 했다. 이제 오즈의 자리에 선 83세의 야마다는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서 함께 대화하자고 말하는 듯하다. 세상이 더 나빠지기 전에. 윗세대는 윗세대대로, 아랫세대는 아랫세대대로 각자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세상이 계속되지 않도록 말이다.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넘어 변화하는 세상을 놓고 두 거장은 그렇게 소통한다. 우리는 어떨까. 세대 간 단절과 적대를 극복하려는 존경할 만한 삶의 태도나 예술적 열정을 쉬이 찾을 수 있는가?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이기는 싸움을 만드는 '거장들'의 지혜와 실천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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