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그 후]호호국수 송미영 씨-2011년 5월 11일 자

창원시 성산구 '호호국수 사장님' 송미영(45) 씨. 그는 지난 2011년 페이스북 창원시그룹을 통해 '넉넉한 인심의 사장님'으로 입소문났다. 경남도민일보가 그의 이야기를 다루자 많은 이가 함께 눈물 흘리기도 했다.

미영 씨는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사고로 두 팔·두 눈 잃은 아버지를 보살펴야 했다. 17살 때부터는 신문·음식 배달, 주방일 등을 하면서 가장 역할을 했다. 남의 집 일만 하던 그 세월이 지나고 마침내 '호호국수' 이름 단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배고픔을 아는 그는 따듯한 인심으로 찾은 이들의 배와 마음을 채워주었다.

미영 씨 가게 한쪽에는 가야금이 있었다. 어릴 적 그가 직접 다루던 것이었다. 지금 가곡전수관 조 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했다. 척박한 삶에 가야금을 놓았다가, 3년 전 조순자 관장과 수십 년 만에 재회했다. 당시 조 관장은 "다시 가르쳐서 가곡전수관 목요풍류 무대에 세울 테니까 그때 취재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날이 마침내 왔다. 지난달 25일이었다. 가곡전수관 '목요풍류' 정기공연 여섯 번째 순서에서 미영 씨는 조 관장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가야금 아닌 가곡이었다. 그는 가곡을 들려주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달 25일 가곡전수관 '목요풍류' 정기공연에서 조순자(오른쪽) 관장과 함께 무대에 오른 송미영(왼쪽) 씨 . /남석형 기자

꿈에도 그리던 첫 무대를 마친 미영 씨는 그리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뒷부분에서 좀 떨리면서 배에 힘이 안 가기는 했지만, 그냥 무덤덤했어요. 선생님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그냥 배운 대로만 하라'고 말씀하셔서, 편하게 했어요. 조명이 너무 밝고, 제가 화장품 알레르기가 있어 눈이 따가웠어요. 그래서 관객 신경 쓰지 않고 눈 감은 채 노래에만 집중했어요."

미영 씨는 3년 전 조 관장을 다시 만난 이후 바로 가곡을 시작했다.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 살도 7kg 정도 일부러 찌웠다.

"선생님이 처음에는 '취미로 해보자' 하셨다가, 한번 들어보시고는 '제대로 해보자' 하셨어요. 저 역시 예전부터 가곡을 하고 싶었어요. 어릴 적 가야금 배울 때도 선생님이 가곡을 항상 가르쳐 주셨거든요. 이제 악기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노래가 훨씬 더 좋으니까요."

▲ 조순자 관장과 송미영 씨.

그는 일주일에 한번 가곡전수관을 찾아 공부했다. 더 열심히 배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게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게 있을 때는 늘 혼자 연습했다. 이제는 노래를 듣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가곡전수관에서 살면서 공부하면 좋겠죠. 하지만 장사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가게에서 내내 불러요. 손님들한테 제가 먼저 '들려 드릴까'해서 부르고, 또 실력이 나아졌는지 묻기도 합니다. 제 팬이 3명 정도 돼요. 어릴 적 가야금 할 때는 '아픔이 배어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한이 맺혀 있는 것 같다'고들 말씀하시데요. 어떤 분은 '너무 슬퍼서 못 듣겠으니 그만 불러라'고도 하세요."

가게는 여전히 북적거린다. 후한 인심과 착한 가격도 여전하다. 김밥 1000원, 국수 3500원, 돼지·순댓국밥 5000원, 수육백반 8000원, 수육 1만 5000~2만 원, 모둠 수육 3만 원…. 3년 전 가격 그대로다. 당분간 올릴 계획도 없다.

3년 전 그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 '1층은 식당, 2층은 미용실, 3층은 돈 없는 아이들 공부방'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미영 씨 스스로 "이 가격 받아서 언제 그 목표를 이룰지 저도 모르겠네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가곡이 그의 삶에 들어온 지금, 인생의 목표도 변화하지 않았을까?

"이젠 제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먹고사는 게 급해서 가게를 버릴 수는 없죠. 하지만 여유가 된다면 전 주저없이 가곡을 택할 겁니다. 가곡이 마냥 좋습니다. 제 인생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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