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옛길을되살린다](74) 통영별로 40회차

지난주에 추분을 지나 그런지 요즘은 퇴근 무렵이면 전보다 많이 어둑해진 느낌입니다. 오늘은 지난 여정을 마무리한 단성향교에서 서쪽으로 예담촌을 거쳐 소남역으로 이르는 길을 걷겠습니다.

◇면화시배지 산청 배양마을 = 단성향교 남쪽 마을은 목화씨를 처음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 사월리 배양마을입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삼우당 문익점(1331~1440) 선생이 원나라에서 목면 씨앗을 가져와 처음 심어 배양한 곳입니다. <태조실록> 14권, 7년(1398) 6월 13일 기사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들여와 재배하게 된 내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선생은 단성면 신안리 신안마을에서 태어나 가업을 이어 농사지으며 독서에 힘써 공민왕대인 1360년 벼슬길에 올랐고, 3년 뒤 원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가져와 배양마을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10년 만에 온 나라에 목면 재배와 베 짜는 기술을 전파하였습니다.

<태조실록>은 "계묘년(1363)에 순유박사로 좌정언에 승진되어 계품사인 좌시중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 할 때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경위를 전합니다. 지금껏 널리 알려진 '강남의 귀양지에서 몰래 목화씨 세 톨을 따서 붓두껍에 넣어왔다'는 얘기와 다른 내용인 게지요. 밀수품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이어집니다. 선생은 이듬해(1364) 단성으로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심게 하여 배양에 성공하였고, 1367년 봄에는 그 종자를 향리에게 분양하여 기르게 하였습니다. 이 무렵 원나라 승려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오자 그에게서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배우고, 홍원은 그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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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익의 여종이 베 짜는 기술을 배워 한 필을 만드니, 그 기술을 이웃 마을에 전하여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 온 나라에 널리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직 우리가 알고 있듯,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물레를 제작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고, 무명이란 이름은 문래의 동생 문영이 베 짜는 기술을 배워 보급한 데서 비롯했다는 것과는 다르지만 <태조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지금 그곳에는 면화시배지 터와 이를 알리는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전시관이 있고, 입구에는 '삼우당문선생면화시배사적비'가 있습니다.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강성군효자비'와 업적을 기리는 부민각(富民閣)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강성군효자비와 그 빗돌을 보호하는 빗집이 있는 곳이라 비각거리라 부르고, 배양마을은 달리 효자리라고도 합니다. <한국지명총람>9에 의하면 문익점선생효자비에서 비롯했습니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 자리를 지키며 시묘살이를 떠나지 않을 만큼 지극했고, 적조차 효심에 감동되어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금의 빗돌은 이 사실을 기려 우왕 9년(1383)에 정려된 것을 뒤에 고쳐 세웠습니다.

◇남사마을 = 배양마을을 나와 망해봉 기스락길을 걸으면 살고개(사월고개) 아래서 길이 갈립니다. 곧장 남쪽 남강 가를 따라 난 1049번 지방도를 버리고 서쪽 지리산을 향해 난 20번 국도를 따릅니다. 고개를 넘어 도평마을을 지나면 예스런 모습을 간직한 남사마을에 듭니다. 살고개 서쪽의 도평은 <조선오만분일지도> 순천1호 단성지도에 승평으로 나오고, <한국지명총람>9에는 딧들로 나옵니다. 남사의 뒤에 있는 들이라 딧들이라 한 것을 현대 지도서는 소리와 뜻을 취하여 도평이라 하고, 승평은 그것을 한자의 뜻을 빌려 그리 적은 결과입니다.

이를 지나서 드는 곳이 남사마을인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마을 북쪽을 휘감아 흐르는 내가 크게 곡류하여 마을은 반달처럼 생긴 충적지 위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 생김새가 반달과 같으므로 그것이 메워지지 않도록 가운데에는 집을 짓지 않고 비워두었습니다. 뒷산은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곡부의 니구산(尼丘山)에서 빌려 왔고, 마을을 휘감은 내는 사수(泗水)입니다.

옛 이름은 여사등촌(餘沙等村)인데, 지금도 남사에서 단속사로 향하는 다리에는 여사교라 새겨져 있습니다. 여사등촌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인 생육신 남효온이 성종 18년(1487) 9월 지리산을 유산하고 남긴 <지리산일과>에 나옵니다. 그는 여기서 9월 27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로 갔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사등촌의 여는 함안의 여항산에서 보듯 그 뜻인 '남다'가 '넘다'는 뜻을 품고 있기에 북쪽을 흐르는 사수 너머 모랫등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이 훈차를 음차로 표기하면서 남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름철 남사마을 고샅길에서 만난 회화나무. 300살이 넘었다. 서로를 보듬는 듯한 모습에 부부나무라고 불린다.

남사마을은 조선시대 이래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전주 최씨 등이 세거하며 많은 선비들을 배출했었습니다. 고려시대 윤씨 문중에서 왕비가 나왔고, 고려 말 정당문학을 지낸 강회백과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른 하연도 이 마을 출신입니다. 지금도 하연이 일곱 살 때 심었다는 600년 더 된 감나무가 있고, 700년이 더 되었다는 매화나무는 마을 북서쪽 단속사 터 강회백이 심었다는 정당매(政堂梅=강회백의 벼슬 정당문학에서 온 이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사랑받는 나무는 300살 넘은 회화나무입니다. 고샅길 양쪽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서로를 보듬듯 서 있어 부부나무라 이르며, 이 아래를 부부가 함께 거닐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포토존으로도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런 오래된 나무들과 이곳 출신 인물들로 미루어보면 남사마을은 고려시대 이래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현전 고택은 대개 18세기 이후에 지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됐고, 최근에는 토담과 돌담 3200m 가량까지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으로 등록문화재 제281호가 됐습니다.

◇솔재를 넘어 소남역에 들다 = 남사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남쪽으로 꺾어지며 솔고개를 넘어 소남역이 있던 남강 가로 향합니다. 옛길은 1001번 지방도가 덮어 쓰고 있는데 조금 걷다 보면 고개 들머리에 어묵과 삶은 달걀 등을 파는 간이음식점이 나옵니다. 복사꽃이 피던 즈음에 이 길을 걸었었는데, 마침 참새 방앗간처럼 나타난 가게에 들러 따뜻한 국물로 시린 몸을 녹이고, 예전 주막이 했을 법한 구실을 대신하고 있어 가게 할머니에게 막걸리까지 한 잔 청하여 주린 배도 달래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솔재는 남사리에서 관정리로 넘어가는 높지 않은 고개인데, 솔고개 또는 소리고개라고도 하며, <한국지명총람>9는 고개가 솔아서(좁아서) 붙은 이름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선오만분일도> 순천1호 단성지도에는 고개에서 내려서는 서쪽 골짜기에 선돌(先乭)이 있다고 적었으나 행선을 벗어나 있어 확인하지 않고 곧장 소남역(召南驛)이 있던 관정리 덕동에 듭니다. <한국지명총람>9는 관정리(官亭里)의 유래가 이곳에 있던 관청에서 비롯했다 전하는데, 바로 그 관은 소남역을 이릅니다. 덕동마을은 옛 사근도에 딸린 소남역과 소남원이 있던 곳이라 위 책에는 역들, 역골, 역동, 구역동, 무역골(묵은역골) 등의 이름이 채록되어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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