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나라 위하는 마음 밀양만한 곳도 없다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1) 밀양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9월 24일 수요일

◇'밀양아리랑'의 힘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 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밀양아리랑'은 밀양 들판이 낳았다. 밀양아리랑이 '아랑(阿娘: 조선 명종 시절 밀양부사를 지낸 윤 아무개의 딸로 종놈에게 살해당했다가 그 원혼이 억울함을 풀었다는 전설 속 인물)'의 소산이라지만 근거가 뚜렷하지 않고 실은 들일을 두레로 하면서 부른 노래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하겠다.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같은 다른 아리랑은 비장한 느낌이지만 밀양아리랑은 어깨가 들썩여질 만큼 밝고 시원하다. 전라도 진도나 강원도 정선이랑 정확하게 비교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 까닭 또한 밀양 일대 너른 들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들판이 너르기에 산물이 풍성했고, 풍성한 산물 덕분에 힘든 노동을 똑같이 해도 사람들이 흥겨울 수 있지 않았을까. <세종실록 지리지>는 밀양이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다"고 했다. 1530년 중종 임금 명령을 따라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밀양 풍속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고", "농사에 부지런하다"고 했는데 이 또한 너른 들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밀양은 예로부터 큰 고을이었다. 조선 시대 도호부(都護府)는 지금 광역시와 비슷한데 밀양은 오랫동안 도호부였다. 명예를 위해 작은 고을인데도 도호부로 삼은 경우도 많았지만 밀양은 단지 인구가 많아서-<세종실록 지리지> 표현을 따르면 "1000호(戶) 이상이 되는 까닭으로 올려서" 도호부로 삼았다. "호수 1612호, 인구 5522명".

◇밀양강과 수산제

너른 들판은 커다란 물길이 없이는 생겨나기 어렵고 커다란 물길은 높은 산 깊은 골짜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밀양은 이를 두루 고루 갖춘 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밀양은 동쪽과 북쪽이 "잇단 봉우리와 겹친 봉우리"며 서쪽과 남쪽은 "긴 내를 굽어 당기며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다." 울산 고현산에서 가장 먼 물줄기가 비롯한 밀양강은 단장천·청도천 따위 다른 물줄기까지 감싸안고 낙동강에 합류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세 물결이 이는 삼랑진(三浪津)이다.

수산제 수문.

가지산·재약산·천황산·화악산 같은 여러 산악이 낳은 밀양강이 다시 너른 들판을 내질렀지만 곧바로 풍성한 물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들판은 사람들에게 고달픈 노동을 내놓으라 했다. 거기 풀과 나무들을 뽑아내고 자갈과 돌들도 골라내야 했으며 높낮이가 다른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논두렁 밭두렁도 내고 물길을 새겨넣어야 했다. 그리고 물길을 따라 흘러들어가 땅을 적시고 곡식을 자라게 할 물을 모아두는 저수지도 만들어야 했다.

역사책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삼한시대 큰 저수지 세 곳 가운데 하나인 수산제(守山堤)가 바로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하남읍 수산리 927번지에 그 자취가 남아 있는데 천연 바위를 뚫어서 만든 수문(水門)이다. 거뭇거뭇하고 커다란 바위가 드러누워 있는데, 뚫은 길이가 적어도 5m는 넘는 것 같다. 별다른 기술도 장비도 없었던 옛적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구멍을 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수산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기록이 있다. 중앙정부도 수산제와 일대 들판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라 하겠다. 1471년 성종 2년 1월 9일치 일곱 번째 기사가 그렇다. "호조(戶曹)에서 '밀양 수산제 아래에 있는 국둔전(國屯田)은 토질이 기름져 거둔 곡식을 군수(軍需)에 보충하는데, 많으면 8000석에 이릅니다. 1467년(세조 13)에 크게 제방을 쌓아 수문이 튼튼했는데, 근래 수령이 태만해… 허물어뜨리기에 이르렀으니… 제때에 수축(修築)하게 하여 경작하는 여러 가지를 다시 권장 독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했다."

◇항일독립투쟁과 밀양

밀양시립박물관 옆에는 밀양독립기념관이 바로 붙어 있다.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밀양처럼 독립기념관을 따로 세워서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을 비롯해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벌이지 않은 고장이 없었지만 밀양은 특히 그 정도가 크고 세었기 때문이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과 소작쟁의·노동쟁의 등 밀양에서 일어난 항일운동도 많았고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도 많아서 무려 60명을 넘을 정도다. 이를 일러주듯 기념관이 있는 앞마당에는 약산 김원봉·석주 윤세주 선생을 비롯한 서른여섯 열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 열사 서른여섯의 흉상

밀양 사람들은 이를 두고도 밀양평야 너른 들판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거기서 나는 풍부한 물산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안목을 갖출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에도 한때는 노동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학생운동이 나름 성했는데 그런 영향이 지금껏 크게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밀양시는 이처럼 독립운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약산 아리랑>이라는 음악극을 기획해 내기도 했다. 약산과 아내 박차정, 윤세주·한봉근·최수봉·김익상 등 밀양 출신 열사들의 활동과 삶을 다룬 작품으로 밀양연극촌이 만들어 2009년 '밀양여름예술공연축제'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 밀양아리랑과 밀양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밀양과 임진왜란, 그리고 사명대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조선군은 적은 병력으로 엄청난 규모였던 왜군의 진격을 밀양에서 며칠 동안 막아낸 적이 있다. <선조수정실록> 4월 14일치 기사에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작원강(鵲院江)의 좁은 잔교(棧橋)를 지키고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적이 여러 날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을 함락하고 돌아서 뒤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작원강은 작원 일대 낙동강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작원은 양산에서 밀양으로 이어지는 데 있는 지명이다.

작원관임진순절용사위령비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592년 임진 4월 17일 아침에 동래를 출발하여 양산을 거쳐 침입해 온 고니시의 왜병 제1군 1만8700명의 병력이 부장(副將) 마쯔우라의 지휘로 오후 들어 … 조총으로 사격을 가하며 달려들자 …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 3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기도 하다."

위령비 아래에는 작원관의 원문(院門)이었던 한남문이 1995년 복원돼 있다. 제 자리는 아니다. 원래는 낙동강 따라 1.2km 떨어진 남동쪽에 있었다. 거기에 작원잔도(鵲院棧道)라는 험한 벼랑길(비리길)이 있었고 한때 경부선 철길이 덮어쓰면서 사라진 줄 알았지만 2012년 남아 있는 일부가 확인됐다. 일대에는 작원관과 관련된 빗돌 셋을 모아둔 비각도 있는데 바라볼 때 왼쪽 붉은색이 작원관석교(石橋)비, 가운데가 작원관원문기지(基址), 오른쪽이 작원대교(大橋)비다.

영남루 인근 사명당 동상.

임진왜란 하면 바로 떠오르는 밀양 사람이 있다. 승병장 사명당 유정이다. 해인사 홍제암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정부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 <대동지지>(1864년)는 지금은 절간 표충사(寺)에 들어가 있는 사당 표충사(祠)를 두고 얘기하면서 "임진년에 휴정(서산대사)을 대신해 도총섭(승병 총대장)이 된 뒤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고 짧게 적었지만 전투에서도 외교에서도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사명당에 대한 밀양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영남루 일대에도 그이 동상이 있으며 산내면 남명초등학교 교정에서는 사명당 동상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물리치고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교 동상에서 이순신은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돋보이는 자리에 놓이는 대접을 받는데 여기서는 운동장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표충사 소유자인 학교법인 동국대학교에서 세운 홍제(弘濟:널리 구제한다는 뜻)중학교도 있다. 이런 덕분에 사명당이 태어난 무안면 소재지에 1742년 들어선 표충비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지도 모르겠다.

1.jpg
▲ 표충사 표충비./경남도민일보DB

◇조선 삼랑창과 일제강점기 삼랑진역 급수탑

경부선 철길은 밀양을 지나지만 경부고속도로는 밀양을 지나지 않는다. 서울~부산 가장 짧은 루트가 밀양을 지나기는 하지만, 정치·경제적 이유로 경주·울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밀양은 예나 이제나 교통 요충지였다. 앞에서 본 대로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 왜적의 진군을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며칠이지만 막아낼 수 있었던 작원도 그런 요충 가운데 하나였다.

물길도 교통 요충이었다. 조선 영조 때 밀양에다 삼랑창(倉)을 둔 까닭이다. 밀양을 비롯해 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여섯 고을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서울에 보내려고 모아두는 창고였다. 삼랑창은 삼랑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랑진읍 삼랑리에 있었던 나루로 뒷산에는 일대를 지키는 데 목적이 있었던 산성이 거의 다 허물어져 있다. 삼랑진 가까운 일대에 원래는 삼랑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오우정(五友亭)이 대신하고 있다. 민구령이라는 인물이 1510년 즈음에 지은 정자로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고 다섯 형제는 우애를 다하며 지내자는 뜻을 담았다. 같이 있는 삼강사비는 민구령 형제들의 행실을 기리는 빗돌이고 비석거리에는 삼랑창과 관련된 빗돌도 여럿 있다.

삼랑진 기차역 안에 있는 급수탑도 밀양이 교통 요충이라 일러준다. 일제강점기 기차가 석탄을 때서 물을 데우고 그 동력으로 다닐 때 그런 증기기관차에다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1923년에 세워져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나올 때까지 자기 구실을 하다가 지금은 삼랑진역 명물로 새로 태어났다.

삼랑진역 급수탑.

◇밀양루와 월연대·예림서원

표충사와 더불어 영남루 또한 따로 일러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영남루의 빼어남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표현 하나로 충분하다. "영남은 예전 신라 땅이었다. 크고 작은 고을 관청이 60 남짓인, 누(樓)·대(臺)·관(觀) 등이 없는 곳이 없으나, 대체로 거기서 무엇이 보이느냐를 갖고 이름을 지었는데, 홀로 이 다락만이 영남이라 이름한 것은 그 강산 좋은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니, 올라가 볼 것도 없이 멀리서도 알겠다."

밀양강은 영남루도 빼어나게 만들었지만 월연대 일원도 빚어내어 월연(月淵) 이태(1483~1536년)라는 인물이 월연정 따위를 짓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인물은 무슨 업적이 있지는 않지만 1509년 과거에 급제했지만 사림파와 훈구파가 맞서는 당쟁을 벗어나 벼슬살이에서 물러났는데 그 덕분에 기묘사화(1519년)에 걸리지 않았다.

영남루.

월연대는 밀양강이 동천이 품어안는 자리에 있어서 바라보는 풍경이 빼어나며 밤중에 달빛이 물 위에 어리는 경치도 대단하다. 분위기도 아주 고즈넉하고 아늑하며 산세에 감싸안긴 듯해서 한나절 쉬어가기 좋다. 밀양 출신으로 사림의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김종직을 모시는 예림서원(禮林書院)도 밀양에 있다. 아주 따뜻한 느낌을 뿜으며 거기 심긴 소나무도 향기가 매우 짙어서 한 번 찾아가 옷섶을 여밀 만하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신문 구독을 하지 않고도
경남도민일보를 응원하는 방법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