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절대 치유될 순 없는 법. 특히 과거 유년기 아픈 기억은 한 사람 일생에 끊임없이 갈마들어 현재를 파괴하고 미래를 도저히 꿈꿀 수도 없게 한다.

다만 운이 좋은 경우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흔적이 옅어질 뿐,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평생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상처를 부둥켜안고 때로는 뒹굴어가며 힘든 삶의 다리를 간신히 건너간다. 누군가는 그 상처에 정면 대응하며 분노하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도망가는 방식으로.

여기 과거 상처로 인해 신음하는 두 젊은이가 있다. 정신과 의사임에도 어릴 때 어머니 외도로 성에 관해 불치에 가까운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된 한 여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릴 때 의붓아버지의 폭력과 죽음을 둘러싼 사건으로 심한 정신분열을 입게 된 한 남자 소설가.

그의 병이 위험한 것은 가정폭력으로 인한 상처도 상처이거니와 더불어 의붓아버지 죽음의 책임을 덮어쓴 형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환시, 그리고 자해, 궁극적으로는 자살충동으로까지 치달아 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 두 남녀는 회피하거나 왜곡된 형태의 상처로 현실을 간신히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끝난 한 드라마의 내용이다.

드라마라곤 잘 보지 않는 내가 이 작가의 드라마만은 놓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드라마에는 상처 입지 않은 영혼이 없고 또 그 상처를 끙끙 안고 버텨내는 과정이 여실하게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분히 인간적이다. 정신과 의사마저 정신병으로 헤매고 있듯 크건 작건 정신적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는 보편적인 우리를 보듬어 안는 저 겸손한 인간애의 카메라를 보라.

사랑이란 무엇일까. 내가 너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아파하고 있을 때 함께 병상에 누워 끙끙 앓는 환자가 되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냉정하게 진단하고 약을 먹이는 의연한 의사처럼 굴어주는 것일까.

이 드라마가 취하는 사랑의 방식은 상대가 아파할 때마다 함께 끙끙 앓아 누워주는 바보 환자의 사랑법이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세상을 뜨겁게 껴안는다.

그럼에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상처, 그 지난한 과정을 겪어내는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갑작스러운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세월호 희생자들이 떠올랐다.

상처란 상처는 절대 치유될 수도 또 극복될 수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세월호 특별법을 위해 마지막까지 울부짖는 그들을 두고 '그만하라'는 말만큼 그들을 두 번 생채기 내는 폭력은 다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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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만큼은 회피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건강하게 정면 대응하여 분노하는 그들을 껴안고 같이 앓자. 그러한 바보 환자의 사랑법, 바로 우리가 취할 유일한 사랑의 방식.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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