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명절 때마다 쌀 기증하는 진해 경화시장 '사랑해'모임

지난달 24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창원시 진해구 병암동주민센터 앞으로 쌀 20kg 10포대가 배달됐다. 보낸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민센터 직원은 누가 보냈는지 대충 짐작한 듯 익숙하게 받아든다. '감사히 잘 쓰겠다'고 당장에 전하지 못할 말은 속으로 삼킨 체 대신 조용한 미소로 고마움을 표한다.

"남들한테 알리기 위해 하는 일도 아닌데 므할라꼬 얼굴 보이면서 줍니꺼. 부끄럽구로." "쌀 몇 포대 보내는 게 무슨 큰일이라꼬 소문내면서 줄까예~."

너도 나도 한 마디 보태며 입을 모으는 이들. 일명 '사랑해' 모임 회원들이다.

1999년 3월 결성된 '사랑해' 회원들 대부분은 진해 경화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거나 장날이면 좌판을 펼쳐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다. 장바닥에서 수십 년간 살갗을 맞대고 살아 온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나누며 삶의 터전을 함께 일궈왔다.

15년 전 신발가게 주인이 "어려운 이웃 한 번 도와주지 않을란교"라며 가볍게 툭 던진 말을 상인들이 선뜻 받아들인 것도 평소 서로 간 쌓아 온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느 조직이나 제대로 운영되려면 운영위원이나 관리자가 있어야 되는 법. 전업주부로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왕언니' 조명옥(73) 씨가 회장 임무를, 장날 난전에서 야채를 파는 김옥자(64) 씨가 총무 역할을 맡고 있다.

▲ '사랑해' 모임에서 회장과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왕언니' 조명옥(왼쪽) 씨와 채소 장수 김옥자 씨. /문정민 기자

매달 정기모임 장소와 시간을 정해 일일이 통보하는 명옥 씨와 한 달 개인 1만 원씩 거두고 장부를 정리하는 옥자 씨는 모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모은 돈으로 1년에 두 번 설, 추석에 쌀을 사서 어려운 이웃에 전달합니더. 보통 24포대(29kg)를 사면 14포대를 홀로 사는 어르신한테 주지예. 나머지는 동사무소에 맡깁니더."

명옥 씨 말에 옥자 씨가 덧붙인다 "어렵고 힘든 가정은 누구보다 한 동네에서 함께 사는 우리가 더 잘 알지예. 주민센터라도 개인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직접 챙깁니더."

자신들이 아니면 잘 모를 숨겨진 소외계층은 직접 방문해 쌀을 전달하지만, 주민센터에는 쌀 배달만 주문하고 일절 걸음을 하지 않는다.

보여주기식 아닌 그저 작은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인 만큼 굳이 얼굴 알리며 전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아 많지 않은 쌀 포대를 보낸 게 오히려 민망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행여 주민센터에서 함께 쌀을 전달하자며 전화라도 오면 손사래를 친다.

한동네에서 오면가면 부딪치는 얼굴들인데 한쪽은 어렵다고 쌀을 받고, 한쪽은 돕는다고 나눠 주고…. 그 순간이 불편하고 왜 어색하지 않겠는가.

"한번은 멋도 모르고 전달식에 참석했는데 쌀을 받는 상대방 얼굴을 차마 못 보겠더라니깐예. 그 이후로 주민센터에 쌀만 맡기고 얼씬도 안하잖아예."

명옥 씨는 그때가 떠오른 듯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워낙 남한테 드러내기를 꺼린 탓에 생필품을 기증하는 사람들이 기관이나 시설물 앞에서 으례 찍는 흔한 기념사진 한 장 없다. 그나마 단체 모습을 담은 거라고는 일 년에 한 번 모처럼 멋 부리고 떠난 나들이에서 찍은 사진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떡집, 방앗간, 보신탕집, 약초, 속옷, 반찬가게 주인 등 애초 이웃돕기 뜻을 같이하며 모임에 동참한 12명은 지금껏 '사랑해' 회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개중에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거나 가게를 그만 둔 이도 있지만 초심을 잃지않고 활동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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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기념사진하나없는회원들.함께나들이를가서찍은 사진에서나 단체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해 모임

모임은 식구가 늘고 줄기를 반복하다 지금은 14명을 유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다. 52세 막내부터 73세 '왕언니'까지 20년 차이가 나지만 세월의 간극은 없다. 언니, 동생하며 특유의 친근감으로 결속력을 끈끈하게 다지고있다.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라 개인 시간 내기가 어렵더라도 모임 약속을 알리는 명옥 씨 전화 한통에 군말 없이 꼬박 참석한다.

누구에게는 밥 한 끼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면 끝나는 단돈 1만 원이 누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작지만 큰돈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사람들. '사랑해'라는 말이 주는 따스함과 그 깊이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자 모임 이름으로 정한 사람들. 이들에게 진정 '사랑해~'라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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