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8) 전북 남원시 인월면 풍천교~산내면 소재지

"백장골에 변강쇠공원이 있는데 변강쇠타령 배경은 거기가 아닙니다. 판소리열두마당 중 변강쇠타령에 지리산 일대 '등구 마천'이라 해서 분명히 함양군 마천 지명이 나옵니다."

독자 김용규(거제시 외포초등학교 교장) 씨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이다. 2주 전 '남강 오백리' 7회 보도 직후였다. 김 씨는 자신이 함양군 출신이며 오랫동안 함양군과 지리산 일대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해왔다고 말했다.

김 씨가 전화를 건 이유는 기사 끝부분 운봉, 인월을 거쳐온 람천 물길이 '변강쇠와 옹녀가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는 옛 이야기 속 산내면 대정리 백장골 앞으로 향한다'는 대목 때문이다. "변강쇠 이야기 배경은 남원이 아니라 함양이라는 말이지요. 백장골에다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입히고 공원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변강쇠 이야기가 나온 줄 아는데 근거가 정확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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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장골 입구에 있는 변강쇠 백장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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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남원문화원이 세운 백장공원 내 표석. 이곳 산내면이 이 땅의 마지막 성지이며, 변강쇠(가루지기) 타령의 독특한 문화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있다.

남원시 인월면에서 흘러온 람천이 크게 굽어 흐를 때면 도로도 같이 굽어든다. 도로 오른쪽이 람천이라면 도로 왼쪽이 백장골이다. 백장골은 산내면으로 들어서자 삼봉산(1187m) 아래 대정리 골짜기에 있다. 계곡이 깊고 길다.

백장골에는 신기하게도 계곡 곳곳에 남녀 성기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널려 있다. '강쇠바위'라 불리는 남근석, '씨녀바위'라는 여궁석, 태아바위, 음양바위 등 각양각색의 자연석들이 널려있는 이곳은 흡사 '19금 성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요즘 말로 치면 상상력 좋은 사람이 바위 하나하나에 이름을 짓고 계곡 전체에 스토리텔링을 한 듯하다. 여기에다 남원시가 1998년부터 백장골 쌈지공원에다 팔도 장승과 솟대 등을 세워 지금의 '변강쇠 백장공원'을 조성해놓았다.

하지만 함양군 사람들 주장과 반응은 다르다. 변강쇠전은 배경이 되는 데가 백장골이 아니라 휴천면 오도재(悟道峙) 정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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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의 허규(許圭)가 쓴 창극단 대본에 있는 '두 년놈이 지리산중에 찾아가 등구 마천에 이르니', '지리산 등구 마천 강냉이 방아가 웬일인고', '소장은 경상도 등구 마천 산길을 지키는 장승의 아내로써…'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함양군에서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현재의 함양군 마천면을 '등구마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발단은 민속주 이름 가지고 시작됐어요. 강쇠주니, 변강쇠주 옹녀주니…. 근데 나중에는 남원시와 함양군 두 지자체가 맞닥뜨렸습니다. 남원에서 백장공원을 만들고 함양에서는 오도재에다 공원 조성을 하고…. 20년도 넘은 갈등이지요."

산내면으로 귀촌한 지 10년 가까이 된다는 한 주민은 민감한 부분이라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홍길동전을 두고 장성과 강릉이, 별주부전으로 사천시와 태안이, 의기 논개를 두고 장수와 진주가 서로 주장이 엇갈리는 것과 같은 거지요. 지역 전설이나 옛 작품은 최고의 관광자원이니 더욱 민감하지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2005년인가, 함양군은 물레방아축제에서 변강쇠·옹녀 선발대회를 행사로 내세운 적이 있다. 이 행사는 꽤나 많은 사람들의 흥밋거리로 입에 올랐다. 특히 최고의 변강쇠, 옹녀를 가려내는 기준을 두고 말이다. 그러나 결국 남녀 커플의 노래나 춤 경연대회였고, 이 행사는 단 한 번으로 그쳤다.

백장골 앞으로 지나온 산내면은 람천(濫川)과 만수천(萬壽川)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인월면에서 백장골 앞으로, 다시 산내면 산내교를 지난 람천은 심원, 달궁, 뱀사골 등 지리산 골짝골짝 물을 다 모아온 만수천을 만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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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인월면에서 흘러온 람천과 지리산 심원, 달궁, 뱀사골계곡을 흘러온 만수천은 남원시 산내면 소재지에서 합류한다. 두물머리는 산내면 장항리와 입석리 대정리가 걸쳐 있다.

산내면은 지난해 슬로시티로 선정됐다. 슬로시티는 전북에 13곳, 남원에는 산내면 1곳이다. 지리적 환경적 여건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귀농·귀촌인이 많다.

"2001년부터 2013년까지 귀농·귀촌 인구가 390여 명 늘어났습니다. 실상사에서 오래전부터 귀농·귀촌 교육을 해왔었고, 뒤를 이어 (사)한생명에서도 귀농·귀촌 교육을 열었고, 최근에는 면소재지에 있는 '까페 토닥'이 중심이 되어 '시골살이학교'를 열었습니다."

산내면 관계자는 산내면 귀농·귀촌인들이 마을신문을 내고 전국모임을 갖기도 하고, 취미별 동아리모임을 열어 재능 기부 등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내면 소재지에는 대정리와 장항리를 잇는 산내교와 대정리와 입석리를 잇는 람천교, 두 개의 다리가 있다. 이 중 1998년에 완공한 산내교는 비단 만 필을 펼쳐놓은 듯한 지리산 능선들과 골짝골짝 실꾸리를 풀어놓은 듯한 아흔아홉 계곡 물줄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곳은 람천의 주요 지류인 만수천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만수천은 오롯이 '지리산 물'이다. 지리산(1915m) 고봉인 고리봉(1248m), 종석대(1361m), 노고단(1471m), 반야봉(1732m) 등에서 흘러든 물이 가장 상류에서 만수천을 이뤄 심원계곡을 끼고 흘러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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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마을에서 산내면에 이르는 계곡에는 만수천을 따라 야영장이 줄을 이어있다. 달궁, 덕동, 뱀사골을 비롯해 사설 야영장도 들어서 있다. 사진은 뱀사골 솔섬 야영장.

심원마을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알려진 마을이다. 그러나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다. 1988년 이후 지방도 861호선이 포장되면서 민박식당촌이 됐다. 다행히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아직 원형에 가까운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물은 맑고 숲은 고요하고 푸르다. 산내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초입에 있으며, 행정적으로는 구례군 산동면 좌수리에 속한다. 지난 7월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심원마을은 핵심 생태계보호구역으로 포함돼 내년이면 주민들은 이주하고 마을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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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만수천 최상부인 심원계곡이 있다. 지리산국립관리공단은 내년에 마을을 이주 시킨 후 2016년부터 지리산 핵심 생태계보호지역으로 가꿔질 예정이다.

만수천은 다시 만복대(1438m), 두루봉(1108m) 골짝물을 더해 달궁마을에 닿는다. 달궁, 아름다운 지명이다. 오래전 어느 왕이 이 첩첩 골짜기 안에다 은둔처 같은 궁을 지었을까 싶다. 누구든 아마도 그는 산 속에 한가로이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색하는 것을 즐겼을 것으로 상상된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다. 사람들은 '달의 궁전'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달궁(達宮)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곳에는 다른 지형과는 달리 아주 너른 자갈밭이 있다. 달궁마을의 북쪽이다. 주춧돌로 쓰였을까 싶은 모양새의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1700년도 전에 마한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달궁터'라고 말한다.

남원문화원이 펴낸 <내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따르면 진한군에 밀려 지리산까지 숨어들어온 마한왕조가 이곳에다 궁을 짓고 지리산 주요 길목마다 8명의 장수를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팔령치, 정령치, 황령재 등 지금 남아있는 지명은 마한의 역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도(李燾)와 최여천(崔與天)이 편찬한 전라도 <남원읍지(邑誌)> 증보판인 <용성지>에 따르면 진한군을 막고자 정령치와 황령재에 성을 쌓고 71년간 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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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바위 전설을 안고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산내면 내령리 구름다리.

마을 앞 달궁계곡에는 만수천이 흐른다. 계곡으로 나있는 집에서는 강으로 내려가는 오래된 돌계단이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마을 앞 달궁교 앞에서 평생 산을 일구며 살았다는 정 노인을 만났다.

"마을 앞에 도로 난 게 88올림픽 땐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어찌나 몰려오던지, 그전에는 외지 사람은 구경도 못했는데….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보는데 옛날이야기 같은 거지요. 우리 마을이 달궁이라니까 달궁인 줄 알아요. 고로쇠 물 받을 때나 약초 캘 때나 갈까 잘 안가는데…."

달궁계곡에서 산내면 소재지로 굽어 흘러 내려오면 반선교에 닿는다.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 화개재 아래에서 길게 내려온 뱀사골 골짝물이 이곳에서 합류한다.

지리산 아흔아홉 골짝 어딘들 한국근현대사의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있을까. 한국전쟁은 3년이었지만 지리산 일대 주민들은 1948년 시작해 사실상 7년이라고 말한다.

산내면 부운리 뱀사골 반선 일대에서 1949년 4월 9일 '여순사건'의 주모자 김지회·홍순석이 사살됐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김지회 등이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그러자 여수 순천 일대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토벌 작전이 시작됐다.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14연대는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 산청 웅석봉 등에서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김지회가 이끈 패잔병들은 1000명 정도 되었는데, 반선 전투에서 살아남은 200여 명의 패잔병은 이후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했다.

역사는 여순사건의 김지회와 14연대가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한국현대사의 빨치산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집을 피해 함양 남원 산청 일대 청년들이 지리산에 올랐고 그들이 지리산을 거점으로 '보광당' 등을 결성, 항일무장투쟁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지리산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지리산에 남아있던 항일무장 세력이 이후 해방정국에 맞서는 빨치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60여 년이 훌쩍 지난 지리산 뱀사골 계곡은 곳곳에 야영장이 들어섰고 계곡마다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일제강점기 말과 해방정국,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조국해방과 이념대립이 빚은 상흔은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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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노고단 아래 ‘하늘아래 첫동네’로 알려진 심원마을(750m).

심원마을에서 산내면까지 80리에 이르는 길고 긴 만수천을 따라 내려오니 다시 람천과 만나는 산내면 두물머리다. 다시 산내면 소재지를 슬쩍 굽어 빠져나온 람천은 천년 사찰 실상사(사적 제 304호)를 향해 흐른다. 이곳에서 남강 본류와 만나는 산청군 생초면 강정 둔치는 아직 150리 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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