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고성 상족암 '코끼리다리' 쏙 닮았죠?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0) 고성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09월 17일 수요일

◇고성 600m 좁은 목

고성읍 북쪽 대가면 무량산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고성천은 고성읍 대평마을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바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당항포해전을 벌인 당항만으로 나아간다. 왜군은 고성 동해면과 마산 진전면 사이 좁고 긴 바다가 고성읍에 막힌 줄 모르고 들어왔다 패전했다. 송학동고분군에서 직선으로 4.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1500~2000년 전 옛날에는 바다가 고분군 바로 앞(기월·대평마을 일대)까지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고성읍 서남쪽 대독천 일대도 옛날에는 물이 더 들어와 논밭이 아니고 얕은 바다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성읍 동~서 육지 너비가 6km 남짓이지만 1500~2000년 전에는 0.6km 안팎인 '좁은 목'이었다는 얘기다.

충무공 당항포대첩기념탑.

남쪽 육지는 고성 동해·거류면을 거쳐 통영으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그 너머 바다에는 거제도·한산도·미륵도 같은 섬들이 숱하게 깔렸다. 배 모는 기술이 요즘 같지 않던 옛날에는 바다를 빙 두르느니 '좁은 목'에서 건너편으로 물품을 넘기는 편이 훨씬 품이 덜 들었다. 고성 일대는 가야 세력의 터전이었고 이런 지리 조건을 바탕 삼아 남해안 일대 교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소가야(小伽倻)에서 '소'는 무슨 뜻일까?

고성을 두고 고려 스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다섯 가야를 늘어놓으면서는 소가야(小伽倻)라 했고, 물계자라는 사람을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고자국(古自國)이라 적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내해 이사금 기사에서 고사포국(古史浦國)이라 했고 '지리지'에서 "본디 고자(古自)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했다. 중국 옛 책 <삼국지>는 '위지 동이전 변한조'에서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라 했고 일본 옛 책 <일본서기>는 '고(구)차국(古(久)嵯國)'이라 했다.

이렇듯 고성을 '소가야'라 적은 기록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고성은 '작은' 가야가 아니었다. 해상 교역을 발판으로 삼은 '센' 가야였고 그 주력 물품은 '쇠'였다. 옛날 사람들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도 소리도 두루 빌렸음을 감안하면 일연이 적은 '小伽倻'의 '小'에는 작다는 '뜻'이 아니라 '세'거나 '쇠'라는 '소리'가 담겨 있지 싶다.

소가야만 빼면 나머지는 '곧' '곶' 계열이다. 고성박물관에 '古(고)'라는 글자가 새겨진 가야 시대 그릇도 있다. 또 오래 전부터 일러온 이름 고성(固城)과 별칭 철성(鐵城)까지 아우르면 고성 옛 이름은, 한자로 어떻게 표현됐든, 곧은 나라 또는 굳은 나라 아니면 곶의 나라였으리라. '곶'은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뭍인데, 고성은 이런 '좁은 목' 덕분에 교역 중심이 됐다.

◇송학동고분군이 일본식이라고?

일본 고분은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전형이라 한다. 옛 고성의 가야 세력을 대표하는 송학동 고분군도 겉모습은 전방후원분 비슷하다. 그래서 일제는 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경영했다는 학설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송학동고분군을 도굴했다.

고성 사람들이 무기산이라 하는 외따로 오똑한 언덕배기에 송학동고분군이 들어서 있다. 1999~2002년 발굴 결과 자연이 만들어준 산이 아니라 사람이 일부러 만든 언덕임이 확인됐다. 지배세력의 무덤을 만들려는 의도로 쌓은 토산이라는 얘기다. 인공 토산을 다시 파낸 다음 앉힌 무덤이 무기산에서 모두 일곱이 발굴됐다. 이를 분구묘(墳丘墓)라 하는데, 만든 시기가 모두 다르다고 확인됐다. 말하자면 겉모습은 일본 전방후원분과 비슷하지만 실제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고성 시가지가 보이는 송학동고분군.

옆에는 칠성바위 고인돌도 있다. 원래 삼산면 두모 마을에 있었는데 2005년 옮겨왔다. 위쪽에 커다랗게 파인 알구멍(性穴)이 모두 서른 정도 된다. 옛날 다산·생산을 빌었던 자취라 하겠는데 이렇게 크고 많은 알구멍을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렵다. 고인돌을 본 다음 송학동고분군을 넘어가면 고성박물관이 나온다. 이렇게 송학동 고분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거닐면 들떴던 마음도 절로 가라앉고 가장 높은 데 올라서면 고성시가지도 두루 눈에 들어온다.

송학동고분군을 비롯한 고성 지역 유물을 보관·전시하는데 갈색으로 옛날 토기를 닮은 겉모습이 꽤 단단해 보인다. 대표 유물은 '古(고)라고 새겨진 옛날 그릇'과 '새무늬(조문鳥紋) 청동기'다. '古'자 그릇은 나라 이름이 소가야가 아니었음을 일러준다. 새무늬 청동기는 전후좌우 균형이 잘 잡혀 있는데, 원형 그대로인 채 발견되기로는 고성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공중을 나는 새가 사람을 하늘과 이어주는 신성한 존재였음을 일러준다. 물론 생활용품은 아니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그 주관하는 사람이 의식용으로 썼던 물건이라 한다.

옛 고(古)가 새겨진 토기.

◇지구의 역사를 간직한 퇴적암

고성은 바닷가인데도 산들이 많다. 이런 산들이 옛날에도 모두 지금 같지는 않았다. 조산(造山)운동이 1억 8000만~1억 2000만 년 전에 가장 심했고 뒤이어 분지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바위는 퇴적암이 주류였는데,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자갈(역암礫岩)·모래(사암砂岩)·진흙(이암泥岩) 따위와 뒤섞인 화산암도 많았다. 이러면서 바닷가나 호수 밑바닥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했는데 금태산 자락에 가파르게 자리잡은 절간 계승사 살림집 앞(해발 330m 안팎)에 그 자취가 있다.

1억~2억 년 전 물결 무늬가 제대로 아롱져 있고 절간 뒤쪽을 비롯한 곳곳에 공룡발자국화석과 빗방울자국화석이 있다. 계승사는 인심도 좋은데, 찾아간 때가 점심 먹을 어름이면 살림하는 보살이 일부러 나와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나중에는 밥까지 한 상 차려주기도 한다. 물결무늬 새겨진 그 무른 바위를 닮아 보살도 마음이 누그러진 덕분일까.

계승사에서 직선으로 18km 남짓 되는 남서쪽 바닷가에는 산으로 오르지 못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마찬가지 아주 무른 퇴적암이다. 여기 상족암에서 족은 바로 다리(足)고 상은 밥상(床)과 코끼리(象)로 달라지지만 그 나타내는 바는 다르지 않다. 바람이 들이치고 바닷물이 깎아내어 이쪽저쪽 뚫어내어 상다리 코끼리다리를 만들어냈다. 물이 좀 빠지면 들어갈 수 있으며 함께 찍힌 뚜렷한 공룡발자국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상다리, 코끼리 다리를 닮은 상족암.

동쪽으로 마주보는 맥전포쪽 바닷가에는 잘 발달된 주상절리가 있고 그리 가는 길에는 공룡과 새 발자국이 함께 찍힌 바닷가 화석 지층도 있다. 고성 일대가 퇴적암으로 덮여 있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화산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다른 갖은 고체들과 뒤엉긴 용암이 이 진흙 퇴적암을 뚫고 바다로 뻗어 나간 자취도 그래서 남았다.

이는 사람살이에도 영향을 끼쳤다. 학동마을 아름다운 돌담장은 둥근 돌을 쓰는 다른 지역과 달리 납작돌이 주로 박혀 있는데, 거기 쓰인 상당 부분이 퇴적암이고 아니면 화산암이다. 대체로 평평한데다 손쉽게 자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가까운 뒷산에서 갖다가 돌담은 물론 축대를 쌓는 등 곳곳에 써먹었다. 이런 보기는 마암면 장산마을 마을숲에도 있다.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평상이다. 아래에 굄돌을 받치고 위에 납작·평평·널찍한 돌을 여럿 올려 만들었다. 굄돌 사이로 군불이라도 때면 겨울에 나와 앉았어도 그다지 춥지는 않겠다.

◇남녘 들판 한복판의 북방 기마문화 자취

장산숲을 지나 옥천사 방향으로 2km 못 미치는 데 있는 석마 마을에 돌말이 한 쌍 있다. 원래 망아지까지 셋이었는데 2002년 1월 24일 도둑맞았다. 마을 사람들은 "전날 일본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더니 사라졌다"지만 어쩌면 우리나라 어느 고대광실 뜨락이나 골동품상 창고에 들었을 수도 있다. 경남민속문화재 제1호로 '마암면 석마'라 이름이 붙었고 마을 사람들은 '마신(馬神)' 또는 '마장군(馬將軍)'이라 했다. 30년 전만 해도 정월대보름 동제에 주신으로 삼고 콩을 한 말 바쳤다가 이튿날 거둬들였다. 정면에서 왼쪽은 배가 불러 있고 오른쪽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왼쪽 돌말이 새끼를 밴 암컷이라 여긴다.

석마마을 돌말. 왼쪽이 암컷, 오른쪽을 수컷으로 여긴다. 가운데 망아지가 있었는데 도둑 맞았다.

말 모시기는 우리나라에 드물고 기마민족에는 그렇지 않다. 말을 모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말은 빠름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그런 빠르기로 자기 소망이나 영혼이 하늘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또 옛날 전쟁에서는 핵심 전력이 말이었고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에 말을 바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말은 값비싸고 귀한 짐승이었기에 흙말 돌말 또는 쇠말로 대신하게 됐다. 여기 돌말도 섬세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크지도 않아 말이 아니라 해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래도 크고 기다란 면상만은 말과 같다고 하겠다.

◇양반 행패 막는 문, 새가 예쁜 자방루

옥천사는 676년 신라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고 돼 있다. 하동 쌍계사도 723년 들어설 때는 옥천사였는데 886년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최치원이 지은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보면 '이웃 절도 옥천이라 하는데 이름이 같아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고 (정강왕이) 쌍계(雙溪)라는 제호를 내렸다'. 고성 옥천사가 하동 옥천사보다 힘이 세었던 때문일까? 옥천사는 산 이름도 바꿨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39년 새로 지었는데 그때 옥천사를 품은 산 이름이 비슬산에서 연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옥천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본거지였다. 정면 일곱 칸 옆면 세 칸으로 널찍한 자방루는 임진왜란 뒤 1764년 들어섰다. 승병이 임진왜란 때만 있지는 않았다. 자방루 아래쪽은 아주 너른 평지다. 승병이 훈련을 했다면 여기였겠고 자방루는 지휘소였지 싶다. 자방(滋芳)은 꽃다움이 불어난다는 뜻인데 석가모니불 말씀은 또 꽃비(雨花)라 이른다. 이런 꽃냄새 때문인지 자방루 안팎에는 새도 많다. 단청해 그려넣은 새들이 마흔을 넘는데, 조금씩 지워져 희미하지만 잘 살피면 도깨비상 비천상 사이로 예쁜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자방루는 일곱 칸이지만 대웅전은 세 칸밖에 안 된다. 작은 규모를 크고 당당하게 보이게 하려는 장치인 듯, 대웅전 받치는 축대가 좀더 높은 것 같고 기와지붕도 좀더 길게 나와 있다. 대웅전과 자방루 사이 양옆에 탐진당·적묵당이 있고 안마당에는 당간지주가 두 쌍 있다. 대웅전 뒤와 축대 위 양옆으로 팔상전·명부각·옥천각 등 작은 전각들이 '이마를 마주대고' 늘어섰다.

이렇게 좁은 것으로도 모자라 통째로 담장을 둘러쳤고 축대 위에 있는 자방루와 담장이 만나지는 양쪽에 작은 문만 하나씩 냈다.

이처럼 작게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승병 본거지였음을 들어 왜적(외적) 침입을 막는 기능이 있다고 본다. 다른 이는 대웅전에조차 말탄 채 드나들기 일쑤였던 지역 양반들 오만방자함과 업신여김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으로 본다. 조선 시대 들어 갈수록 억압을 받아 양반에게 스님은 함부로 부려먹어도 되는 하인 같은 존재였고 절간은 양반들 놀이터가 돼야 했던 사정을 들면서 말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신문 구독을 하지 않고도
경남도민일보를 응원하는 방법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