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유족 김영오 씨의 단식은 끝났지만 세상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어둡다. 고통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행복한 순간이 미안해진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유희를 즐기거나 취향을 드러내는 일상조차 죄악시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와중에' 영화와 뮤지컬을 보러갔다가 욕먹은 게 대표적이다. 사태의 중심에 있는 장본인이니 그러려니 싶은 비난이었지만 분위기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물과 소금만으로 육신을 지탱하고 있는 이 엄숙한 상황 앞에 세속적 욕망은 배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물질적 이득을 좇는 것.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 예술작품 감상. 아름다운 자연. 맛있는 음식.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 보내는 시간. 궁금해지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럼 언제쯤 마음껏 느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세월호특별법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유족들 아픔이 치유되면? 그것으로 끝일까?

냉정히 따지면 우리는 단 한시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선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온 국민이 브라질월드컵에 열광하는 동안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선 수많은 아이들이 무참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경북 구미의 합섬업체 스타케미컬 해고자 차광호 씨는 일방 폐업에 맞서 100일 넘게 45m 굴뚝 고공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햇빛과 빗물을 막을 천막조차 없는 참담한 환경이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빈곤에 신음하다 혹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사고로 누군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또 어떤가. 이 모든 현실 하나하나를 낱낱이, 생생하게, 밤낮없이 되새기고 아파하면서 우리는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사측의 일방 폐업에 맞서 100일 넘게 굴뚝 고공농성을 진행 중인 스타케미컬 해고자 차광호 씨가 지난 7월 31일 대구·경북 지역언론 <뉴스민>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

선과 악, 죄와 벌, 양심의 가책 등으로 뒤덮인 도덕적 세계를 경계한 니체의 말이 떠오른 건 그래서다. "실제 생활 속에서 동정심을 일으키는 계기들을 한동안 의도적으로 뒤쫓아보고 자신의 환경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비참을 항상 마음에 그려보라. 그런 사람은 반드시 병들고 우울해질 것이다."

잊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감과 연대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특정 사안 내지 특정인을 절대진리화·숭고화하며 그것을 누군가를 지배하는 도구로 활용하려 들 때다. 김영오 씨에 대한 최상의 연대는 똑같이 함께 단식을 하는 것이지만 모두가 성자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 또는 가족 등을 위해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다음날을 버텨낼 힘과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 누구도 잘 모르는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의 삶과 세월호 유족의 싸움을 세속 대 신성, 욕망 대 정의 등으로 편 가르고 대립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짓일까?

가령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8월 29일 자 <한겨레> 칼럼에서 "세월호 유족들은 '이'(利)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義-진상 밝히는 일)를 말하고 있다"며 '이'를 좇는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 지었다.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세월호 유족은 물적 보상을 요구해선 안 되는 건가? '이'를 추구하면 '의'를 배신하는 건가? 임금 인상과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서민은 '의'와 무관하므로 탐욕적이고 천박한 이들로 취급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뿐만 아니라 유족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웃음과 활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평화롭고 풍요로운 일상이 늘 그들 곁에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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