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역전현상...단체장 ‘낯내기’ . ‘장삿속’ 전락

지금까지 돈벌이로서의 문화를 논하면서 주로 문화산업 혹은 문화콘텐츠산업을 다뤘다. 그런데 이 분야는 대부분 고도의 기술력과 인적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전국 각 지역간의 격차가 현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로 돈을 벌어들이는 또 하나의 통로로 평가받는 축제는 모든 지역이 덤벼들 수 있는 만만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특히 민선자치의 시작과 함께 단체장의 ‘낯내기’용으로 축제가 활용되면서 우리나라는 때아닌 축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축제공화국’이란 신조어가 등장했을까.
일단 지방자치제실시 이후로 활발하게 열리고 있는 지역의 다양한 축제는 문화의 중앙집권화를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인 것 같다. 게다가 지역축제가 1차 산업의 후퇴로 피폐해진 농촌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지난해 전북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에 37만 명이 다녀갔다고 하고 충남 금산 인삼축제는 200억 원의 경제효과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경기도 전체가 매달리다시피한 이천 도자기축제는 80일 동안 다녀간 인원만 600만 명을 웃돌고 그 경제적 효과는 이천 지역만 3500억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판의 고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내용인즉슨 해마다 전국에서 펼쳐지는 1000개에 가까운 축제들이 그 목적부터 선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치단체장이 선심행정 차원에서 관행적으로 마련한 것들도 적지 않고, 장사치들이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 짜낸 시장 난장판 같은 축제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깊은 역사와 사려 없이 급조되다보니 형태나 크기나 프로그램이 어슷비슷하다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축제의 가치가 본질적으로 ‘역전’됐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애초 우리 조상들은 농경사회의 24절기를 생활 주기로 삼아 크고 작은 축제를 열어 오며 지역 및 마을공동체를 형성해왔다. 말하자면 조상들에게 있어 축제란 농경생활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다른 나라의 축제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의 축제로 평가받는 브라질의 리우축제도 사순절이라는 종교적인 문화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축제에서는 이와 같은 생활문화적 반영(反影)을 찾아볼 수 없다. 각 축제의 특성과 매력은 결국 이러한 반영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이 부분이 결여돼 있으니 모든 축제가 어슷비슷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작금의 현실이 그렇게 실망스러운 것도 아니다. 강압적인 일제시대는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문화를 초토화 했고, 이후 남과 북 사이의 첨예한 이념적인 대립은 일말의 다양성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적인 중앙집권문화를 양산했으며,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는 도시의 익명화를 부추겼다. 이런 척박한 토대 위에서 불기 시작한 축제의 바람은 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불과 5~6년 사이에 적지 않은 축제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다만 축제의 ‘본질’에 충실할 때 그 축제가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점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과거와 같이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활의 반영이 바로 축제로 발전하기는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과 선호를 가진 지역주민들이라도 활발한 의사소통과정을 거친다면 지역 고유의 매력적인 축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자치단체 또한 하루빨리 축제의 ‘대박신화’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 간에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지원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축제란 지역주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을 때 가장 매력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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