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동구밖 생태·역사교실] (15) 함양

8월 23일 토요 동구밖 교실 생태체험은 진해 명동·꿈나무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함양으로 떠났다. 10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운곡리 은행나무와 화림동 골짜기 정자들을 둘러보고 간단하게 물놀이까지 곁들일 예정이었다. 함양 화림동 골짜기는 풍경이 아름답고 흐르는 물이 좋아 예로부터 사람들이 즐겨 찾아 노닐던 장소였다. 옛날에는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고, 여덟 개 물웅덩이에 정자도 여덟 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가운데 거연정·동호정·군자정 셋이 남아 있고 가장 아래쪽에 가장 멋지게 남아 있던 농월정은 아쉽게도 2003년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운곡리 은행나무는 화림동 골짜기 위쪽에 있다. 운곡리 가운데서도 은행마을이라는 동네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다들 짐작하는 대로 '은행'이라는 마을 이름이 바로 이 '운곡리 은행나무'에서 비롯됐다. 함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화림동 골짜기에 들어선 정자들과 운곡리 은행나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우리는 오늘 1000년 이상 살아온 나무를 만나요. 나무가 1000년 이상 살아오다 보니까 사람들이 집까지 마련해 줬어요. 울타리를 사람 사는 집처럼 돌담장으로 마련해 줬어요.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이 나무를 아끼고 가꾸는지를 알 수 있어요."

천 년 넘게 살아 키가 38m, 가슴높이 둘레가 8.75m인 운곡리 은행나무. 그 아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김훤주 기자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나무이기에?" 하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기대를 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은행나무가 그렇게 대단한지 묻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래 봐야 나무일 뿐이잖아요?" 했다. 맞다 그래 봐야 나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래 봐야 인간일 따름이고.

은행마을에 도착해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는 아이들 손에는 스케치북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은행나무와 일대 풍물을 그림으로 담아보자는 취지였다. 은행나무가 내릴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을 한가운데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하자마자 눈에 띄기 시작했다. 머리 끝부터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들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웅장했다.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무에 다가가서 팔을 벌려 안아보기도 했다. 나무는 안기지 않았다. 아이들 품으로는 열 사람이 나란히 서야 겨우 한 바퀴 돌 수 있으려나 싶었다. 나무 안내판에는 키가 무려 38m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8.75m라 적혀 있다. 사람들이 여기에 마을을 만들면서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그림을 슥슥 그린다. 나무 전체를 그리는 친구도 있고 어느 특정 부분을 그리는 친구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커다란 나무를 눈 앞에 마주했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다. 참 멋진 나무, 운곡리 은행나무, 그 앞에 사면 사람으로서 교만함을 떨칠 수 있는 나무, 사람들이 울타리까지 쳐주고 영역을 보장해 주는 나무,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나무, 마을 구석이 아니라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는 나무…. 이런 여럿 가운데 하나 정도는 아이들이 마음에 새겼음직하다.

운곡리 은행나무도 세월이 오래된 다른 여러 나무와 마찬가지로 전설이 있다. 풍수지리 관련으로 마을에 우물이 없는 내력을 풀이하고 있다. '은행나무가 거수(巨樹)가 되었지만 열매를 맺지는 않았다. 밑에 우물을 파고 그림자가 비치게 하면 열매가 연다고 하여 우물을 팠으나 송아지만 빠져죽을 뿐 소용이 없었다. 마을이 배 모양이니 우물은 배에 구멍을 뚫은 셈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사람들은 우물을 메웠고 지금도 우물이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은행나무를 팔아먹으려고 꼼수를 부린 인간들이 있었는데 모두 까닭없이 앓다가 죽음을 맞는 비운을 겪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에다 깍듯하게 예의범절을 지킨다. 그리고 정월에는 마을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악도 울리고 고사도 지낸다.

이어서 화림동 골짜기 옛적 농월정이 있던 자리 밥집 금수강산에서 점심을 먹고 동호정으로 올랐다. 동호정은 이를테면 호가 동호(東湖) 장만리라는 선비를 위해 후손이 1895년 지은 정자인데 화림동 골까지 여러 정자 가운데 가장 우뚝하고 도드라져 보인다. 게다가 앞쪽으로 100명 정도는 넉넉하게 받아안을 정도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영가대(詠歌臺), 금적암(琴笛巖), 차일암(遮日巖) 따위 글자가 적혀 있어 정자가 있든 없든 그 아래위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놀이를 허용해 왔던 터전임이 분명하다.

정자에 올라보면 이런 너럭바위와 둘레를 휘감아돌며 흐르는 물결, 그리고 왼편으로 길게 펼쳐지는 솔숲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바라보는 사이를 보이지 않는 바람이 시원하게 가르며 흐르고…. 물놀이를 하려고 했으나 접어야 했다. 비가 내린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어서 물이 충분히 빠져 있으리라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8월 뒤끝 여름이 접어들 무렵에 내린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 안전이 가장 우선이다 보니 조금만 불어도 물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아쉬움을 마음에 안고 통나무를 파서 만든 계단을 밟고 올라 둘레 풍경을 한 번 내려다 본 다음 기념으로 다함께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이 기획은 두산중공업과 함께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