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73) 통영별로 39회차

절기가 한 주 전에 벌써 백로를 지났으니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칠 즈음입니다. 어린 시절 백로 지난 즈음 아침 들녘을 걸어 학교에 가다가 이슬에 바지가 흠뻑 젖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만, 우리 아이들에게 이 느낌을 어떻게 전해 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신안역이 있던 신안마을에서 단성현을 거쳐 진주 땅으로 드는 길을 걷겠습니다.

◇경호강변을 걷다 = 신안역(新安驛)이 있던 신안마을 북쪽 고개를 <조선오만분일도> 순천1호 단성지도는 역항정(項亭)이라 적었고, 예서 길이 갈라져 그 남쪽 왁대고개 서쪽에 있던 나루에서 배를 타고 경호강을 건너 강루리를 거쳐 단성으로 드는 지름길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왁대고개 들머리인 월명산 남서쪽 기스락의 갈로개산(葛盧介山)에는 문익점 선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나오고, 거기서 북동으로 조금 걸어가면 선생을 기리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의류혁명을 이끈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태종 1년(1401)에 세운 것입니다. 서원 바로 뒤는 불미골인데, 아마도 전통시대 쇠부리터가 있었던 듯합니다.

신안역이 있던 신안리 신안마을.

조선 말엽에 제작한 <단성현지도>에는 신안역 남동쪽에 사창이 있고, 옛길은 경호강변 동쪽 기슭을 따라 열려 있습니다. 길을 따라 가면 왁대고개라는 얕은 재를 넘습니다. 양쪽으로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을 지나 백마산(白馬山) 아래에 다다릅니다. 이 산에는 삼국시대 산성이 있는데, 서쪽 사면은 경호강의 공격을 받아 천연 성벽입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지지를 보면, 이 성은 강산성(江山城) 또는 동산성(東山城)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엽에 백마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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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과 적벽산(赤壁山) 사이 작은 내에는 다리를 두었는지 구석다리라는 지명이 남았고, 백마산 남동쪽 모퉁이 마을 이름은 모리(毛里)입니다. 옛길은 줄곧 경호강변을 따르는 길과 이즈음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강루리 뒷길로 향교마을 쪽으로 가는 길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백마산 동쪽 중촌리에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있고, 그 남쪽의 적벽산도 서쪽 비탈은 경호강의 공격을 받아 급애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세를 보면 비리길이 있었음직하지만 3번 국도가 나면서 어찌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지도서> 단성현 산천에 "적벽은 관아의 동쪽 5리에 있다. 둔철산에서 뻗어 나와 원지촌의 으뜸 산줄기를 이룬다. 송시열이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나옵니다.

이 길이 끝나는 즈음의 바위벼랑에는 '가을날 우화루(羽化樓)에 올라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지만 송시열의 것은 아니고, 그 자리를 지나면 원지와 단성을 오가는 단성교가 나옵니다. <여지도서>에 실린 단성현읍지 교량에는 "신안교(新安橋)는 관아의 동쪽 5리 신안강에 있다"고 예전에도 이곳에 다리가 있었음을 적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단성교 동쪽 신안면소재지가 위의 책에 나오는 원지촌(院旨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청/함양 방면과 지리산 자락의 단성을 오가는 교통의 결절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조선오만분일도> 순천1호 단성지도에는 이곳에 오목점(梧木店)이 있다고 표기해 두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강을 건너다 = 단성교를 통해 남강을 건넌 즈음이 강루리인데, 이 마을 이름은 신안루 또는 강루라 불렸던 누정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강루리는 남강의 범람원에 발달한 자연제방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지석묘와 신석기~청동기시대 문화층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특히 최근 읍청정(揖淸亭) 자리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집자리는 이곳이 선사시대 이래로 삶터로 이용되어 왔음을 일러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강루리 신기마을의 지석묘와 삼국시대 고분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성내리 남쪽 사월리 배양마을의 무문토기 산포지와 지석묘 또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단성현 옛터 = 강루리를 지나 성내리 들머리의 장터마을은 조선시대 성문 밖에 둔 읍시가 열리던 자리이며, 장터마을을 지나서 들게 되는 성내리는 옛 단성현의 치소가 있던 곳입니다. <여지도서>에 실린 단성현읍지 건치연혁에는 "조선 세종 때(1432) 단계(단성 북쪽 30리)와 강성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지금 명칭인 '단성(丹城)'으로 바꾸고 현감을 두었다"고 나옵니다. 옛 단성현의 관아와 객사가 있던 곳을 성내리라 하지만, 그런 치소를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쌓지는 않은 듯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등의 지지에 읍성에 대한 기록이 없고, 실제 구조물도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치소가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치소의 동·서·남쪽에는 문을 두었던 듯, 남문거리 서문거리 등의 지명을 남겼고, <여지도서> 단성현 장시에 "읍시(邑市)가 읍내의 성문 밖에 있다. 5일과 10일에 시장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임술민란(1862)의 시발지 단성향교 = 성내에서 배양을 향해 가는 길 서쪽 골짜기에 있는 단성향교는 고려 인종 때 강루리 구인동에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뒤 조선 태종 6년(1406) 이곳 단성현 출신인 문가학(文可學)이 주동이 돼 일으켰던 역모사건인 문가학의 변란이 있고 나서 세종 때 서쪽 산기슭(지금 교동)으로 옮겼다가, 영조 28년(175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이곳 단성향교에는 조선 후기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단성현 호적대장'(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9호)이 수장되어 있습니다.

단성향교 대성전. /문화재청

이곳 단성향교가 우리 역사에서 주목 받는 또 다른 까닭은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란을 거쳐 삼남지방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임술민란의 시발이 된 단성민란의 발화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단성에서는 삼정(三政=전결·군역·환곡) 가운데 환곡(還穀=관청에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받는 제도)의 문란이 가장 심했는데, 그즈음(1855) 경상감사를 지낸 신석우도 "단성의 환곡 폐단이 팔도에서 가장 심하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극심한 환곡의 문란은 농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에게도 많은 부담이 되어 1862년 1월 신등면의 김령 부자가 주도하는 사족회의에서 환곡의 폐단에 대한 저항 논의가 확산되어 농민들도 참가하게 됩니다. 그달 25일에는 읍내에서 향회가 열리기에 이르렀고, 2월 4일 단성현민들은 현감과 관속들을 몰아내고 김령 부자가 정무를 장악하였습니다. 그 뒤 농민항쟁 수습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반포한 삼남환폐교구절목에 따라 단성의 환곡이 거의 4분의 3이 탕감되는 값진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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