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 사건 재심 결정 받은 노치수 씨…부친 등 141명 한국전 때 사형 "억울한 죽음 한 풀겠다"

노치수(67·사진) 씨에게 올해 추석은 여느 때와 달랐다.

최근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아버지(1950년 사망·당시 39세)에 대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은 보도연맹원으로 사형 당한 12명의 유족이 제기한 청구 가운데 10명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을 했다.

4남 1녀 가운데 셋째인 그는 가족들과 차례상을 올리고 어머니 봉안당을 찾아 재심으로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 노상도 씨는 일제강점기 일본서 대학을 나와 해방 후 마산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 씨 표현처럼 아버지는 단독정부 논란이 뜨거웠던 시기 현실 정치에 휘말렸다. 1948년 미군정의 포고령 위반으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당연히 이승만 정권이 좌익사상 전향과 통제를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 가입 대상이 됐다.

▲ 노치수 씨.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어느 날 사라졌다. 그때 노치수 씨는 네 살이었다. 면사무소에서 부역을 나오라 해서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야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400∼500여 명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7월 15일부터 8월 초순 사이 헌병과 경찰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돼 마산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들 가운데 8월 18일 마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이적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노상도 씨 등 141명은 같은 달 말경 마산육군헌병대에 의해 사형이 집행됐다.

노 씨는 "전쟁이 났지만 법치국가에서 이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나. 구금됐는지, 재판을 받는지 가족들은 몰랐다. 진정한 법치민주국가라면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 씨는 별세한 날도 모르니 9월 9일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왔다.

이번 재심 개시 결정은 아버지를 비롯한 보도연맹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첫 문턱이다.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검찰이 항고해 갈 길은 멀다. 노 씨는 "실제 재심 시작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이다. 바른 판단이 나올지 봐야겠지만 한편으로 기대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과거사위 발표 전에 노 씨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노 씨는 "어머니는 '내 죽을 때 아버지 입던 옷 한 벌 같이 묻어달라'고 하셨다. 재심에서 명예회복되면 함께 고향에 모시려 한다"고 말했다.

노 씨는 민간인 희생자들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힘을 쏟고 있다. 1961년 삼촌이 이끌다 강제 해산된 유족회를 지난 2009년 재창립해 회장(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을 맡아 국가배상소송과 재심 청구 활동, 위령제를 해왔다.

노 씨의 삼촌 노현섭(1920∼1991) 씨도 민간인 학살 사건을 파헤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감옥살이를 했다. 한국전쟁 당시 죽임을 당할 뻔했던 노현섭 씨는 진보 정치인이자 인권노동운동가로 전국적인 명망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노 씨는 "숙부님은 그때 날개가 부러졌지"라고 회고했다. 노현섭 씨는 지난 2010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 씨는 "살생부가 된 보도연맹 사건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할당으로 가입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무죄를 받아야 할 잘못된 사건"이라고 했다. 과거사위로부터 진실 규명을 받지 못한 이들과 희생을 당했지만 나서지 않은 이들을 위해 전국 각지 유족회와 힘을 모아 특별법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노 씨는 위령탑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시신 수습도 못했는데, 유족들이 이름 석 자라도 새겨서 도리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며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우리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전쟁 반대에 이바지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