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오백리] (7) 전북 남원시 운봉읍~인월면 풍천교

전북 남원시 운봉읍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까지 내려온 남강 본류는 강정마을 앞에서 임천(일명 엄천강)과 합류한다.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의 물길을 이루는데 서북쪽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는 야트막한 똥뫼산이 있고 남서쪽은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곱내들이다.

이번 남강 오백리 7회는 남강 본류보다는 지류 임천을 톺아간다. 임천이 시작되는 곳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람천(濫川)이다. 다르게는 광천으로 불리기도 한다. 남강은 경남의 주요 강이지만 이곳 전라도에서 흘러온 물이 더해지는 것이다. 운봉읍에서 인월면까지 흘러온 람천은 풍천과 합류하고, 다시 산내면에서 지리산 노고단 아래 심원, 달궁, 뱀사골에서 흘러온 만수천과 합류한다. 그리고는 함양군 마천면에서 지리산 백무동 물줄기와 합류해 곱내들에 닿기까지 임천으로 불리게 된다. 거의 200리에 이르는 물길이다.

지난 6회에서 잠시 밝혔듯이 임천은 남강 상류에다 높은 수질과 풍부한 수량을 더하는 주요 지류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려온 물길은 모두 남강으로 흘러들었다. 거기에다 골짜기마다 되짚어야 할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국보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33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등 많은 문화유적을 가진 실상사(사적 309호)가 있고 지리산 절대비경이라 일컫는 용유담이 있다. 여기에다 근현대사 속 지리산 빨치산 활동 흔적과 산청·함양·거창에 이르는 민간인학살사건 루트가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1~2회 정도 보도 횟수가 늘어나더라도 찬찬히 더듬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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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골짝물들이 람천을 이루었다

국도 24호선을 타고 람천을 따라 가는 길에는 비구름을 허리에 두른 백두대간 바래봉(1167m) 덕두봉(1148.9m) 등 지리산 서북쪽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읍내는 평온하고 정감이 넘쳤다. 수십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운봉이용원에는 허리 굽은 이발사가 역시 자신만큼 노쇠한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다. 추석을 앞둔 떡 방앗간 입구에는 '추석 송편 팝니다'가 붙어있고 쉴 새 없이 허연 김이 오르고 있다. 마치 옛 기억 속 어디쯤에 자리한 동네로 들어온 듯했다.

운봉읍사무소 양재우 씨는 운봉읍이 지리산 서북쪽 중턱에 위치해 해발 470m 이상의 고원 분지라며 '골짜기 안에서도 사람 사는 듯이 사는 동네'라고 소개한다.

"여기가 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전라북도지만 람천이 남강으로 흐르고 낙동강까지 가는 건 주민들이 다 알고 있지요. 람천은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아영·산내 3개 면의 젖줄입니다."

람천은 하천지도 상으로는 덕산제에서 흘러내려와 공안천과 합류해 운봉읍내로 흘러든다. 좀 더 넓게 보는 이들은 지리산 백두대간 고리봉 동북쪽 세걸산에서 부운치, 팔랑재, 바래봉, 덕두봉과 고리봉 북쪽으로 고기리에서 중매산, 수정봉, 여원재, 방현에 이르는 백두대간 동부에서 합수된 물줄기가 람천이라 말한다.

"이 일대 골짝에서 쏟아지는 물이 모두 람천을 만들어 인월면으로 가지요."

이곳 주민들도 남덕유산 자락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주민들처럼 물길이 시작된 발원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는다. 주민들에게 람천은 평생 동안 살아온 내 집안 우물이고 마당이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전을 기록하라"

운봉읍과 인월면은 이성계의 황산대첩(1380년·우왕 6) 승전 지역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안에서 조선 500년 역사를 시작한 태조 이성계의 흔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있는 황산대첩비지.

황산대첩비지는 이성계가 이곳 황산(690m)에서 왜구를 섬멸한 승전을 기록한 비석이다.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있다. 현재 전촌마을에서 황산대첩비지로 곧장 들어가는 대첩교는 공사 중이라 비전마을 앞 황산교를 건너 에둘러가야 했다.

비전마을 어귀 밭에서 일하던 노인은 길을 가르쳐주며 "비석이 그리 있어도 찾는 사람이 없더만 둘레길인가가 생기고 나서는 대첩비지 찾는 사람이 많다"며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좁으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황산대첩비지는 강둑을 사이에 두고 앞으로 람천이 흐르고 뒤로는 소나무 숲을 두르고 있다.

중앙에 놓인 비각의 승전비(勝戰碑)에 따르면 고려 후기 왜구가 내륙으로 침입해 지리산 방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삼도통사 이성계를 보내어 왜구를 토벌케 했고, 이성계는 운봉읍 화수리 황산 일대에서 왜구를 맞아 일제히 소탕했다.

황산대첩비는 선조 10년(1577년)에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폭파됐다가 1957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복원을 한 것이다. 지역민들은 파비각(破碑閣)에 폭파된 비석 조각들을 한데 모아 두었다.

황산대첩비지를 돌아 나오면 바로 옆에 조선시대 동편제 창법을 창시한 송흥록(1780~?)과 명창 박초월(1917~1984) 생가가 있다. '동편제의 탯자리'라 일컫는 곳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단정하게 조성된 서너 채의 초가가 들어온다. 왼쪽이 송흥록 생가이고, 오른쪽이 박초월 생가라 한다. 마당에는 고수의 북소리에 소리를 하는 송흥록 동상이 정면에 있다. 이곳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가산리에는 2007년 남원시에서 조성한 '국악의 성지'가 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는 조선시대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고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람천은 화수리 전촌마을과 비전마을을 잇는 대첩교와 황산교를 차례로 흘러간다. 운봉읍에서 인월면으로 이어지는 람천 유역은 고원분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이라 다니다보면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구름비 떨어지는 가운데도 홀로 걷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상스럽지 않은 곳도 이곳이다.

인월면 피바위...달을 끌어당겨 적장을 쏘다

미처 알지 못했다. 전북 남원시에 있는 인월면이 '달을 끌어당겨 높이 솟게 하다'는 인월(引月)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지명이다. 유래를 살펴보니 이성계의 도력을 새긴 지명이다.

황산교를 지난 람천은 화수교를 지나 인월면으로 흘러간다. 화수교는 운봉읍 화수리와 인월면 서무리를 잇는 국도 24호선이다. 인월면 서무리에 닿기 전이다. 흐르는 물길을 막을 듯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너럭바위는 붉은 빛이다. '아, 이래서 피바위구나' 싶다. 종잡을 수 없이 내리는 비에 붉은 색은 더욱 선명하고 황산 아래를 금세 지나온 강물은 너울대며 바위를 타고 흐른다.

1380년, 황산에 진을 친 이성계와 병사들은 람천과 인월을 가운데 두고 왜장 아지발도와 10배가 넘는 왜구 병력에 맞서 팽팽한 접전을 이루고 병사들은 죽어갔고…. 캄캄한 그믐밤이다. 이성계는 그의 신궁에 가까운 활솜씨로 왜장을 쏠 수 있었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빌었다.

"달님이여 부디 환하게 떠오르소서."

그러자 동쪽하늘에서 보름달이 높이 솟고 그 밝기가 대낮처럼 훤했다. 순간 이성계는 왜장 아지발도의 이마를 쏘았고 그의 피는 바위를 뒤덮고 왜구는 순식간에 섬멸되었다. 아지발도의 피로 바위는 붉게 됐고 지금에 이른다고.

남원시 인월면 구인월리 람천 한가운데 붉은 색깔을 띤 피바위. 1380년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죽이자 바위가 붉은 빛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람천 강바닥에 드러누운 피바위는 이성계의 승전 표지석이다. 운봉과 인월 일대 많은 백성들이 병졸들을 뒷바라지 했을것이고 또 수많은 병졸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이 땅을 지켜낸 백성들이 흘린 피는 붉은 물길을 이루어 람천과 합류, 남강으로 낙동강으로 흘렀을 것이다. 고려를 부정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승전지에는 옛 이야기가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해내려 오고 있다.

람천을 건너 인월장으로 가다

황산대첩 피바위에서 1km나 내려왔을까. 인월면 소재지다. 인월면은 남쪽은 산내면, 서쪽은 운봉읍, 북쪽은 아영면, 동쪽은 경남 함양읍에 접한다. 인월장터는 3일과 8일이 장날이다. 장날이지만 서늘한 비가 흩뿌리는데도 사람들로 꽉 차있다. 머릿속 셈을 따져보니 추석 대목이다.

"인월면은 영·호남을 잇는 국도 24호선이 람천을 따라 이어지고 88고속도로 지리산 IC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지요. 지리산 성삼재, 정령치에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되니까 인구나 면 규모에 비해 상권이 좋고 장이 큽니다. 요즘은 장날이면 관광객들도 제법 많아요."

남원시 인월면 인월장. 3일과 8일이 장날인데 람천을 따라 걷거나 건너온 운봉읍, 산내면, 함양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남원시 인월면 인월장. 3일과 8일이 장날인데 람천을 따라 걷거나 건너온 운봉읍, 산내면, 함양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인월면 취암리에서 왔다는 김 노인은 인월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말통으로 받아가는 길이다.

장날이면 남원이나 운봉읍 방면에서는 운봉읍 화수리와 인월면을 잇는 화수교를 건너 오고 산내면이나 함양군 마천면에서는 구인월교나 풍천교를 건너야 한다. 모두 람천을 가로지르거나 기대어 있는 다리다.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명절 대목장날이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장관이었지요. 큰 강이 아니니까 맨발로 건너는데 남자들과 아이들이야 건너다가 물에 젖어도 예사지만 여자들은 치맛자락을 말기에 동동 말아 올리고 장보따리와 신발을 머리에 이고 줄을 이어 건넜어요. 그러다가 발을 헛딛기라도 하면 낭패 보는 거지요. 그게 겨울이면 더 낭패였고요."

람천은 인월리와 상우리를 잇는 풍천교에서 북쪽 아영면에서 흘러 내려온 풍천과 합류해 구불구불 몇 굽이를 휘돌아 남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변강쇠와 옹녀가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는 옛 이야기 속 산내면 대정리 백장골 앞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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