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아낌없이 주는 ‘나무농사꾼’이 되었다

‘움직이는 수목도감’, ‘재야의 고수’, ‘조경업계 판관 포청전’.

그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 조경가이자 숲 해설가, 재능기부활동가로 살아온 삶 덕에 모든 수식어조차 식물·나무와 맞닿아 있지만, 그 누구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스스로만 ‘조경학 석·박사학위커녕 조경기사 자격증·전문건설업 면허도 없는 사람’, ‘변방의 비메이커’이자 ‘노가다’에 불과하다고 칭할 뿐.

그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가업인 집안에서 태어난 천생 나무꾼이다. 아울러 책상머리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나무를 벗 삼고 살아온 참 지식인이다. 하지만, 함부로 지식을 뽐내는 일은 없다.

“책상 두 개, 컴퓨터 한 대. 직원이라야 가끔 도와주는 집사람뿐이죠. 그야말로 구멍가게 대표인 사람을 취재해도 괜찮습니까? 괜히 누가 되는 건 아닌지….”

‘겸손이 아닌 실제’라며 쑥스러움에 뒤로 제 모습을 감추는 그. 오히려 그 모습이 정겹고 푸근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슬쩍 던지는 농담에도 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사람. 수목·조경분야 숨은 전문가. 그는 ‘곰솔조경’ 대표 박정기(54)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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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초등학교에서 가장 집이 먼 아이

그는 거제시 일운면 소동리 피나무 골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섬이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두메산골 외딴 동네다. 면 소재지에서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 집은 모교 일운초등학교에서도 가장 멀었다. 자연히 바다보다는 산과 나무를 즐겼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조경업을 하셨다. 물론, 그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이는 거제도가 품은 특성 때문이다. 거제도는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이 많이 들어왔던 곳이다. 그들은 주로 정치어업을 하며 살았는데 가이즈까향나무, 편백, 종려, 소철, 가시나무 등 우리나라 1세대 조경수목도 이 시기에 많이 도입되었다.

“할아버지는 군청, 경찰서, 소학교 등에서 나무 심는 일을 하셨죠. 당시 신품종 감나무, 밤나무, 복숭아나무, 유자나무, 비파나무를 심고 기르셨어요.”

할아버지 과업은 고스란히 아버지가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동백, 팔손이, 식나무, 사철나무 등 조경수목을 재배하고 분재를 생산하였다. 나무를 파고 심으며 키우는 솜씨가 탁월해 도내·외에 이름을 날렸다. 평생 나무를 가까이하며 살아오신 어르신들 덕에 그의 삶에도 자연스레 나무가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운명처럼 맞닿아 있었다.

“1994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병중에 계시던 아버지 일을 물려받으며 기술을 전수받았죠.”

1983년 대학을 중퇴하고 고졸학력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청년. 환영 회식자리에서 ‘10년 후 이 회사 사장이 되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당장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치던 한 청년은 10년 8개월 만에 ‘가벼운 중’이 되어 스스로 회사를 떠났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나 같은 인재를 붙잡지 않기에 이 회사 10년 안에 쫄딱 망할 것이라며 남몰래 저주를 퍼부었죠. 근데, 웬걸 말이 씨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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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가벼운 중’은 ‘자유로운 중’이 되어 그렇게 나무 곁으로 왔다.

스스로 평생 학생의 길 걸으며

거제도 산골, 게다가 나무 키우는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자연 수목과 재배 수목은 일찍이 익숙하게 보고 배웠다. 여기에 플로리스트 아내를 만나고 원예학 석사 처남 덕에 화훼와 원예식물에도 눈을 떴다.

그의 아내 문경애(47) 씨는 2008년 람사르총회 공식가이드 28명 중 1명에 뽑힐 정도로 실력있는 자연환경해설사다. 현재 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임원이자, 어린이·청소년 상대로 생태환경 강사 일을 겸하고 있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넝쿨 뿌리처럼 나무·식물로 엮여있는 셈이다. 여기에 ‘국외 선진사례 답사경험’은 날개를 달아줬다.

“90년대 초 등산을 하면서 산림 수목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3년부터 국외 답사에 나섰죠. 2008년까지 24개국 60여 도시 수목원, 공원, 리조트, 산림, 도시환경을 모두 살피며 국외 기술을 배우고 도입하는데 앞장섰어요. 산림청 지원으로 사단법인 한국조경수협회 국외연수는 물론, 조경학회, 조경업체 국외답사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와 위도가 비슷한 다른 나라에 혼자 배낭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지금도 꾸준히 자비를 들여 2년마다 국외 사례를 배우러 나가죠.”

활발한 활동 덕에 서서히 명성도 쌓였다. 남들처럼 단순히 사업을 확장하기보단 쌓은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자 했고 돈 욕심 없는 아내도 힘을 보탰다. 처음에는 수목·조경 관련 책이나 인터넷, 방송, 신문에 나타난 오류를 바로잡는 일로 나눔을 실천했다. 이후 가로수, 공원녹지, 조경시설 등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갔다.

“꾸준히 숲 해설 강의를 듣고 지역 내 자연·생태·현안에 관심을 두며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전문가 잣대’가 되어 있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절대 유명인은 아닙니다.”

그는 ‘책을 펴내거나 강단에 서본 적도 없다’며 그간 쌓은 업적을 스스로 평가절하하지만, 무슨 일이든 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자체에서는 ‘저승사자’,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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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오해입니다. 딸 셋의 아빠이자, 노모를 모시는 평범한 가장인걸요. 물론, 매사에 치밀하고 집요하지만 과격하거나 억지를 부리진 않아요. 언제나 학술적 논리를 바탕으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죠. 당하는 처지에서야 ‘골치 아픈 사람’으로 생각하겠지만요.”

이 같은 성격은 평생을 함께하는 ‘공부’로 이어진다. 입학, 중퇴, 편입…다시 재학, 졸업. 그는 대학(학부)공부만 13년째 하고 있다. 물론, 딱히 잘못을 저지르지도, 타인 강요에 의해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열정이 많을 뿐이다. 그렇다고 결코 공부에 얽매이진 않는다.

“어렸을 적 공동묘지를 놀이터로 삼았죠. 그 시절 비석마다 새겨진 ‘學生’의 뜻을 잘 몰랐다가 한참 후에 ‘벼슬 없이 살다 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그런가요. 어릴 적 늘 본 두 글자가 평생 나를 따라다니네요.”

그러면서도 ‘내 사전에 절대 대학원은 없다’고 고집하는 그. 이는 번듯한 ‘억지 감투’ 쓰지 않겠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여러 시민사회·환경 단체 회원이자 자영업자인 만큼 감투가 있을 만도 한 데 전혀 없어요. 그저 배움을 향한 집념이 있을 뿐이죠. 석사·박사 소릴 듣기보단 진정 배우며 나누는 게 편해요. 어쩌면 평생 학생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감투 대신 찾은 ‘딱맞는 모자’

그는 늘 바쁘다. 조경시공 분야를 주 전공으로 하며 365일 내내 사방을 뛰어다닌다. 새벽이면 산에 올라 나무를 파고, 다시 돌아와 심고 관리한다. 주말이면 전국 산을 찾아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 변화에 나무도 사람도 달라짐을 익히 알고 대응책을 마련하곤 한다.

누구보다 바쁜 삶, 변화에 대응할 줄 아는 인생이지만 쉽게 안주하진 않았다. 9년 전부터 그는 남다른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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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복잡한 출근시간 도로 위에서 차에 치여 갈기갈기 찢어진 고양이를 보았어요. 누구 하나 제대로 치우지 않고 있었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아저씨가 시체를 처리하는 거예요. 그때 느꼈죠. 차에 늘 삽과 기타 장비를 싣고 다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저것이라고 말이죠.”

참혹한 동물 시체를 감추고, 로드킬을 피하려다 발생하는 사고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은 어느새 ‘생명존중’이라는 거창한 소명의식으로 발전했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길 위에 있는 동물 시체를 치워달라는 문자도 받는다. 더불어 포털사이트 ‘로드킬 이미지’에 그가 처리한 동물 시체가 가장 먼저 나올 정도니 나름 성공적인 ‘재능 기부’다.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 안 되는 전문가이지만요. 그래도 작년에 야생동물 시체를 길 가장자리로 옮겨놓고 신고하면 포상금을 준다는 조례가 경남도에서 제정됐어요. 나름의 성과이자 보람이죠.”

이렇듯 그는 사소한 곳,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에서 보람을 얻고 삶의 활력을 키워간다. ‘숲 해설가 활동’도 그 중 하나다. 2004년부터 지역 내 숲·생태·환경 관련 NGO 활동을 이어온 그는 2007년, 2010년 경상남도수목원에서 숲 해설가 양성과정을 공부, 자격증을 받는 성과도 일궈냈다. 지금은 수시로 실내·외 강의를 나가 ‘수목의 약리작용’, ‘인문학으로 만나는 나무’ 등을 전하고 있다. 나무와 숲으로 삶 절반을 채우다 보니 그만이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생겼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나무와 대화가 되더라고요.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사람

“나무를 심어놓고 물을 주고 나서 돌아서면 뒤통수가 가려울 때가 있어요. 뒤돌아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 물 안 준 나무가 하나씩 있더라고요. 한 번은 꿈자리가 안 좋아 혹시나 싶어 전날 심었던 나무를 보러 갔더니 나무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기차를 놓쳐 약속 장소에 못 간 대신 나무를 가꾸러 갔다가 쓰러져 가는 나무를 발견한 적도 있죠. 저는 나무가 대화를 걸어온 것으로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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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호 기자

나무를 얻은 대신 잊고 산 것도 많다. 그는 여태껏 술·담배를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절대 잊지 않는 것도 있다.

“스스로, 철저히, 더불어. 우리 곰솔조경의 사훈이기도 하고 제 좌우명입니다. 치열했던 삶 속에서 얻은 약속이자 희망이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책도 쓰고 강단에서도 서보고 싶어요. 제가 지닌 소중한 것들을 다음 세대에 다 물려줘야죠.”

곰솔은 소나무 한 종류인 해송(다른 종류는 적송)의 우리말이다. 바닷가 주변에서 주로 자라는 곰솔은 남성적이며 억센 느낌이 강하다. 대신 듬직하다. 또 아름답다. 그늘을, 맑은 공기를, 볼거리를 주고 나서도 그루터기로 휴식처까지 안겨주는 나무. 순박한 한 ‘나무농사꾼’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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